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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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 리 함

연변일보 날짜  201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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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연안 출발을 앞둔 조선의용군 합영사진.

무정 장군 

사진 제공:

무정 장군 8촌 동생 대련 김하수씨(79세) 

 

"조선의용군 간부대대는 태항산에서 출발한 태항산의 주력부대였다. 이들은 동북의 대문으로 불리우는 금주에서, 연안에서 오는 조선의용군부대와 력사적인 회합을 가지게 된다"

정철준은 회고록에서 그때의 심정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다.

생각하니 꿈만 같고 그 기쁜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하남점과 남장마을 쪽을 바라보니 궂은 비속에 어렴풋이 바라보이는 우리 학교 교사, 우리 분맹이 있던 집, 한해 겨울 두 여름을 지내온 우리의 두번째 고향, 마을사람들, 그들과의 석별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 이른새벽에 어마어마한 벼랑길을 기여올랐다. 일구어놓은 오지산의 감자밭, 나무 하나, 바위 하나도 다 눈에 익은 것들이였다. 그곳에다 뿌린 우리의 땀은 그 얼마였던가!

정녕 정이 든 고장과 마을사람들, 피땀 흘린 밭들이였다. 영원한 석별과도 같아 리근영(李根荣)이라고 부르는 한 전사는 돌림신문 《곰방대》 제2호에 이런 노래를 실었다.

하, 그곳 바라보니 흰구름 가리였네

오지산도 맘에 있어 우리를 환송하나

아마도 감자 동무의 눈물 가린 수건이리

태항지대는 처음 하루 로정을 35리로 잡았다. 하루저녁 지대 구락부 위원들이 모임을 가지고 벽보위원들이 행군도중 돌림신문 《곰방대》를 견지할 것과 촌극—‘개똥이와 이뿐이’를 한주일에 한번씩 보장할 것을 결의하였다. 매개 분대에는 벽보통신원이 한명씩 있어 그들이 분대에서 생긴 좋은 일, 나쁜 일들을 회보하면 벽보위원들이 그것을 모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32절 종이 한장에 적어 맨 앞사람부터 뒤로 돌리면서 보게 하였다.

처음 하루 로정 35리가 점차 70리, 80리로 늘어났다. 45분씩 걷고는 15분씩 휴식하였다. 이렇게 내처 20여일을 걸으니 북평에서 장가구로 통하는 철도선을 넘게 되였다. 이제부터는 일본군 패잔병의 반항과 국민당부대의 교란을 받을 가능성이 커간다. 부대가 강행군에 나서니 하루 로정은 100리, 120리, 140리로 늘어났다. 몸이 약한 사람들은 견지하기가 어려웠다. 선전고동사업의 필요에 따라 분대장이고 문오위원이고 나팔수인 최지준(崔智俊)은 고개를 만날 때마다 남보다 먼저 산마루에 올라가 나팔을 불면서 부대의 사기를 돋구어주군 하였다.

조선의용군 전사 정길운의 상기 회고—<<기로예지대>>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479페지-480페지)에 따르면 화중지대 동지들과 하남 복양(濮阳)의 조선 동지들을 합치니 100여명을 이루었다. 이들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원의 명령에 의하여 조선의용군 기로예지대로 개편되였다. 지대장 왕신호(즉 김웅)가 사업의 수요로 연안으로 떠나고 양원(杨远)이 새 지대장으로 부임되였다. 조선의용군 기로예지대는 신사군 기로예군구와 배합하여 하남땅에서 대적사업을 펼치다가 북상길에 올랐다. 1945년 10월 중순경에 기로예지대는 북평과 천진 사이 옥전(玉田)에서 태항산에서 오는 조선 동지들과 만났다. 정길운은 무정를 비롯한 조선의용군 총부 여러 지도자들을 이곳에서 만났다면서 ‘조선간부대대’를 3개 대대로 재편성하고 그 인수는 300여명, 대대장은 왕신호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군 출신인 신상초(申相楚)의 회고는 이와 다름을 보이고 있다. 신상초의 회고에 의하면 화중에서 연안으로 움직이던 부분 화중지대 대원들은 일제 항복 소식을 듣고 방향을 바꾸어 태항산의 군정학교에 편입되여 20여일간 생활하였다고 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화중 동지들을 망라한 태항산의 300여명은 ‘조선의용군 간부대대’를 구성하고 산하에 2개 중대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태항산 간부대대 대대장은 화중지대 지대장 왕신호가 맡았다. 그들은 10월 초순경에 산해관에 이르고, 10월 중순경에 금주에 이르러 연안에서 나온 조선의용군 부대와 합류하게 되였다. 이는 신상초의 회고록 《탈출》(한국 태양문화사, 1977년 제 160페지-173쪽)에 올랐다. 다시 염인호 교수의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으로 제322쪽에 올라있다.

조선의용군 간부대대는 태항산에서 출발한 태항산의 주력부대였다. 이들 태항산의 주력부대는 동북의 대문으로 불리우는 금주에서 연안에서 오는 조선의용군부대와 력사적인 회합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이들 전체는 금주에서 여러 패로 나뉘여 기차편으로 심양으로 이동하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김현대의 회고(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538페지-539페지)를 보면 1945년 8월 20일, 화중에 남아있은 조선의용군 편대는 신사군부대를 따라 강소 익림을 떠나 상해 쪽으로 남진하였다. 이들 화중지대 100여명 동지들은 1946년 2월 화중건설대학 사생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강소 회음현소재지를 떠났다고 하니 그들은 화중과 화북을 망라한 팔로군, 신사군 지구에서 맨 마감으로 떠나는 조선의용군부대였다.

 

사진 속 다리 건너면 라가평골에 들어선다

심양 대회합

료녕성 소재지이고 동북 최대의 대도시로 불리우는 심양은 연안과 화중, 화북 등지를 떠난 조선의용군의 집결지로 알려진다. 심양에 제일 먼저 도착한 조선의용군부대는 하북 기열료군구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다. 이들 100여명은 주연(朱然)의 지도하에서 조선의용군 선견대로 되여 팔로군 기열료(冀热辽)부대를 따라 심양에 진출하였었다.

본문의 ‘조선의용군의 분맹사업’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이들 조선의용군 선견대의 전신은 1944년 9월 13일에 하북 창려현의 한 농가에서 설립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선발대) 를 가리킨다. 그때 주연은 제1지대 정치처 주임을 맡고 지대장 리익성의 지도하에서 기동지역에서 무장활동과 관련 선전활동을 활발히 벌리다가 조선의용군 총부의 명령을 받고 선참 심양에 진출하게 되였다.

주연이 이끄는 기동지구 조선의용군 선견대가 심양에 도착하니 1945년 8.15 전에 무정이 동북지역으로 파견한 조선의용군의 한청 등이 활동하고있었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포한 그날 서탑(西塔)조선인중학교(지금의 제6중학교)에서 봉천(奉天,심양)의 조선인거류민회가 주최되고 500여명이 참가한 조선인들 경축대회가 열리였을 때 한청은 일제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면서 항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조선의용군 무장대오를 조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며칠 후 8월 18일에 심양에서 드디여 한청을 지대장으로, 홍주흥(洪柱兴)을 부지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독립지대가 조직되였다. 이어 조선청년들이 너도나도 입대하니 대오는 신속히 9개 중대 1100여명으로 늘어났다. 9월 중순에는 주연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대는 금주(锦州)를 지나면서 변해덕(边海德)과 심명(沈明)이 조직한 의용군대오 350명을 받아들인 데서 이들 대오는 450여명으로 구성(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75페지)되여있었다.

한청과 주연은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동창으로서 서로 익숙한 관계였다. 현실을 보면 한청 등이 심양에서 조직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는 1100여명이라지만 간부가 따르지 못하고, 주연의 조선의용군 선견대는 독립지대에 비하여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지만 혁명에 참가한 오랜 대원들이 많아 간부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청과 주연은 토의를 거쳐 독립지대와 선견대를 합병하기로 하고 그 이름을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고치였다.

새로 조직된 심양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한청이 종대장을 맡고 홍주흥이 부종대장을 맡았으며 주연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종대 참모부는 산하에 군사훈련과와 후근과, 선전과, 간부과, 민운과(民运科) 등을 설치하였다. 한청의 회고에 따르면 중공당원은 한청 한사람으로서 신입당원을 발전시킬 수도, 당조직을 건립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한청(韩青)의 회고록(이하 모두)에 따르면 1945년 10월 중순에 심양주둔 쏘련군 헌병사령부에서는 국민당군대가 동북 여러 도시를 접수하니 팔로군과 팔로군 소속 부대는 심양을 떠나 80리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심양 소가툰을 경유하여 단동(丹东)으로 가 조선인학교에 주둔하게 되였다. 단동에 도착한 오후 조선 평안북도 주재 쏘련군사령이 련락병을 보내 이튿날 아침 7시 압록강교두에서 만날 것을 희망하였다.

약속한 날 아침 7시, 한청이 압록강다리를 건너 조선측 교두에서 쏘련군 사령을 만나고 쏘련군측의 의견 대로 그날 12시에 전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가 군악을 울리며 의용군행진곡 노래높이 조선 신의주에 들어섰다. 그런데 쏘련군사령은 “포츠담(波茨坦)3개국 회의 결의에 따라 남조선에는 미군만 진입하고 북조선에는 쏘련군만 진입하기로 되였다.”면서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한청은 자기의 소속부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용군이니 절대로 무장을 해제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그때 조선의용군 주둔지는 신의주중학교였다. 쏘련군 사령과의 토의 결과 서로의 평화적 해결에 동의하고 조선의용군은 무기를 집중하여 보관하고 관련 훈련을 하기로 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동북으로 가 원 계획 대로 군대건설에 나서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쏘련군 제5군 련대참모장은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공산당을 통하여 쏘련공산당에 항의하겠다는 한청의 또 한차례 강경한 태도는 쏘련군 참모장을 한걸음 물러서게 만들었다.

한청 등이 령솔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압록강 건너 조선땅에 처음 진출한 부대로 알려진다. 쏘련군참모장은 조선의용군 선견종대가 동북으로 건너가는 것을 동의하고 한청 등의 요구 대로 신의주에 돌아온 후 신의주에 집중된 평안북도의 무기들중 일본군의 보총 500자루, 경기관총 20정을 넘겨주었다. 11월 5일에는 쏘련군의 환송을 받으면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심양으로 돌아가 무정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사령부와 회합을 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의용군 총부는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300여명을 이끌고 1945년 9월 15일(한청의 견해) 혁명의 성지 연안을 출발하여 도보로 혹은 기차로 3000여리 귀국로정에 올랐다. 도중에서 각지의 조선의용군부대들과 합류하니 그 대오 무려 700여명이였다. 이 대오가 그해 1945년 11월초에 심양에 이르고 심양의 조선의용군 선견종대와 회합하니 무려 2000여명의 끌끌한 대오를 이루었다.

심양의 조선사람들은 오래만에, 적절히 말하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36년간 처음으로 자기의 군대—조선의용군을 보게 되였다. 이때를 두고 조선의용군전사 최강은 이렇게 회고(최강회고. 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90페지)하였다.

조선인동포들은 35년간 보지 못한 자기의 군대—조선의용군을 최대의 열정과 성심으로 환영하였다. 우리들은 동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격동된 심정으로 며칠 푹 쉬고 로독을 풀었다.

그 시절 연안과 태항산 등지를 떠나 심양에 금방 이른 조선의용군부대의 진실한 모습이다. 최강의 회고에 따르면 무정 등 조선의용군총부는 심양 남경거리 5구간(지금의 성건설은행 자리)에 자리잡고 부대숙영지는 시교의 오가황(五家黄,大兴村), 대석교(大石桥) 일대의 조선마을들이였다. 한청은 조선에서 돌아온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황고구 명렴가(黄姑沟明廉街)에 주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리화림의 회고에 따르면 “무정 사령원이 령솔하는 조선의용군은 항복을 거역하는 일본군대의 저애를 받는 바람에 순조롭게 동북을 거쳐 조선에 진입하지 못했다.”(리화림 구술. 머나먼 려정. 민족출판사, 2012년 5월 출판, 196페지)

1945년 11월 7일은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이다. 이 기념일을 맞아 쏘련홍군과 조선의용군은 심양역광장에서 10월혁명과 쏘련홍군기념탑의 락성을 기념하면서 성대한 열병식을 가지였다. 열병식에는 조선의용군 2000여명 전체가 참가하여 성세를 이루었다. 이어 시위행진이 있었다. 행진대오는 심양역에서 출발하여 성내, 중앙거리를 거쳐 북릉(北陵)까지 나아갔다.

1945년 11월 16일, 무정 등은 중공중앙동북국의 지시에 좇아 심양시 교외의 우홍구 오가황(于洪区五家黄)조선인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체대회를 소집(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291페지)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친히 대회를 사회하고 연설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항일전쟁승리 후의 시국을 분석한 뒤 대부분은 계속 동북 여러 성의 조선사람 집거지역으로 가 조선인민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우리의 력량을 확대하며 공고한 동북근거지건설을 위하여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정은 계속하여 새 부대 편성을 선포하였다. 무정의 선포에 따르면 현유의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나누었다. 제1지대는 남만에서, 제3지대는 북만에서, 제5지대는 동만에서 활동하기로 하였다. 제1지대 지대장은 김웅(金雄), 정위 방호산(方虎山,통화지역에서 활동)이고 제3지대 지대장은 김택명(金泽明,즉 李相朝),정위 주덕해(朱德海,할빈지역에서 활동)가 임명되였다. 이날 대회에 앞서 무정은 압록강지대 지대장에 김호(金浩,즉 蔡国藩), 정위에 리명(李明), 정치부 주임에 김강(金刚)을 임명하면서 단동지역에 진출하여 산동지역에서 온 리명 부대를 토대로 활동하도록 명령하였다.

회의 후 심양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무정사령원의 명령으로 종대 전체가 김웅의 제1지대에 편입되였다. 한청은 연안간부 6명과 더불어 한개 소대 인원들로 조선의용군 독립대대를 뭇고 료동지역에 파견되였다.

조선의용군 정위 박일우(朴一禹)는 제5지대(지대장에 李益星, 정위에 朴一禹)를 따라 연변행에 나섰다. 박일우 등은 길림에 도착한 뒤 당지 조선사람들의 요구로 제5지대의 80여명으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조직하여주었다. 지대장에 박훈일(朴勋一), 부지대장에 최명(崔明)이 임명되고 활동범위를 길림지역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