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下 제3부 송화강 5천리 - 제2장 류조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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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下 제3부 송화강 5천리 - 제2장 류조변(1)

기사입력 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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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룡흥지지(龙兴之地)》를 봉금한 후로 광활한 송화강류역은《변외(边外)》라고 불렸다. 강희(康熙)20년 청정부는 오늘의 료녕성 개원시(开原市)로부터 길림성 리수현(梨树县), 이통현(伊通县), 장춘시(长春市), 구태현(九台县)을 경유하여 서란현(舒兰县) 바트향(法特乡)의 송화강변에 이르기까지 무려 350km의 구간에 버들울타리를 치고 군사를 풀어 지켰다. 이 버들울타리를 사람들은《류조변(柳条边)》이라 했고 울타리밖의 금구를《변외》라고 했던 것이다. 

 

속담에《바람이 새지 않는 울타리가 없다》고 했다. 가경(嘉庆)년간에 산동성의 기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버들울타리를 넘어《변외》로 범해왔다. 한헌종(韩宪宗)이라는 소년도 부모를 따라 길림으로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헌종은 성인이 되여 도박에 빠졌는데 엄청난 도박빚을 물수 없자 오늘의 화전현 쟈피구(桦甸县夾皮沟)로 도망하여 금전판에 들어갔다. 당시 비적들이 도처에서 살판을 쳤던바 달변인 한헌종이 비적괴수를 설복하여 금광을 보호한바 있어 도금수령(淘金领袖) 마문량(马文良)의 중용을 받았고 마씨가 죽자 금광을 차지하게 되였다. 그는 쟈피구의 풍부한 황금으로 송화강량안을 독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확장했는바 아들 수문(受纹), 손자 등거(登举), 증손 수당(秀堂)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거쳐 동으로는 목단강 서안, 서로는 휘발하(辉发河)류역의 광활한 지구에 한씨의《독립왕국》을 만들었다. 이《왕국》에는 일련의 관리기구가 세워졌으니 회방(会房)을 중심으로 채금업, 행정, 사법, 조세(租稅) 등 권력기구를 두었다. 그외에 림업, 삼업(參业), 수렵도 관할했으며 한씨화페《금사(金砂)》를 발행하기도 했다.《화전현지(桦甸县志)》에 따르면 당시 송화강류역의 사람들은《한씨는 알아도 청조가 있다는것은 몰랐다(只知有韩, 不知有淸)》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한씨를《한변외(韩边外)》로 불렀다고 한다. 만주사변 이후 한변외의 금업이 철저히 패퇴하여 한씨일가는 쟈피구를 떠났고 다시는《한변외》가 존재하지 못했다. 

퇴페의 일로를 걷기 시작한 청조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돈과 주먹이 왕 행세를 했던《류조변》밖의 송화강류역으로의 조선족의 이주는 두만강, 압록강류역에 비해서 훨씬 뒤의 일이였다.《동북삼성실황》기재에 의하면 1922년 봉천성(오늘의 료녕성)에는 159,907명, 길림성에는 490,020명(당시 연변 두만강류역의 화룡, 연길, 왕청 등 세개 현에 444,420명이였으니 송화강류역의 안도, 돈화, 길림, 장춘 등지에는 45,600명이라는 통계이다), 흑룡강성에는 고작 661명이였다. 송화강류역의 조선족은 두만강과 압록강류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과 로씨야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재이주였으며 절대 대부분은 30년대 일제의《이민정책》에 따른 집단이주민들이였다.

 

일제는 동북에서의 항일세력을 소멸하고 동북을 중국내지와 동남아국가를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하여《집단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1936년 8월, 20년내에 100만호(500만 인구) 일본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재만인지도요강》에 근거하여 1937년부터 해마다 동만지구와 동변도지구 23개 현에 1만호의 조선농민들을《집단이민》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제정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들이 적잖게 이주해왔지만 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한 조선의 농민들은 만주에 가면《집도 있고 먹을것도 있고 돈도 벌수 있다》는 일제의 거짓말에 유혹되여 조선총독부에서 발급한《이주민증》을 가지고 동북3성의 일망무제한 황야에 수없이 밀려왔다. 

 

서굉신은《류하의 조선개척민》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 이런《개척민》들은《만주국》에 오자마자 인차《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의《자작농창정법》에 의해 재난 많은 이 땅에 얽매이게 되였다. … 이 회사에서 그들에게《선사》한 토지, 집, 자금은 모두 임대해준것으로서 10년 내지 11년내에 본전과 리자를 상환해야 했다. 만일 기한이 되여도 상환하지 못하면 토지와 가옥소유증을 얻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이사해갈수도 없었다. 기실 아무런 자유도 없는 노예로 전락된 것이다. 

 

정병남(丁炳南 1926년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 태생. 현재 장춘시 거주)선생은 말한다. 

 

《1937년 음력 2월 초, 함평군 대동면 함평면 학교리와 광주의 송영리에서 각각 10호씩 40호가 류하현으로 집단이민 왔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한겨울에 다시차란 곳에 떨어지니 집도 없어 언땅에 막을 치고 들었지요.〈만척회사〉에서 땅도 떼여주고 농구며 식량이며를 대주었습니다. 량식은 뜬 수수쌀과 좁쌀을 주었는데 그나마도 배불리 먹을수 있으니 그보다 좋은게 없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변리쌀이라 뼈빠지게 농사를 지었어도 타작을 마친 날부터 다시 변리쌀을 맡아 먹어야 했지요. 빚은 해마다 늘어나고 광복이 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만척〉의 노예로 될 팔자였답니다. … 》

 

류하현 삼원포는 유서깊은 독립운동 책원지의 하나였다. 1911년 4월에《경학사》가 서고 뒤미처《신흥무관강습소》,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이 건립되였다. 그런데 30년대 일제《만척회사》는 대면적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이여 이곳에《안전촌》을 만들었다.《안전촌》의《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경찰을 주둔시키고《무장자위단》을 세웠고 촌마다 보총 10자루, 권총 한자루를 발급하였다. 촌민들이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량민증》이 있어야 통과할수 있었다. 이런 수단으로 항일부대와 백성들의 련계를 엄하게 단속하였던 것이다. 

 

《집단이민》의 무장화는 1944년의《풍향의용개척단》이 유명하였다. 조선에서 고급소학교를 졸업한 청년 90명을 모집하여 류하현 대통구촌 신가가에 이주시켰다. 그들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였는데 군사화한 농업조직이였다. 단장은 니야께 히사오, 군사교관은 아다찌, 정치교원 야스다 등은 모두 일본인이고 분단 성원은 모두 조선사람이였다. 전라도 사람들은 제1분단, 충청도는 제2분단, 경상북도가 제3분단,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는 제4분단, 황해도가 제5분단이였다. 2년사이에 개척단의 20여명이 일본관동군에 들어갔고 30여명이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갔다 오면서 가족을 데려왔고 일본인 군사교관도 가족을 끌고왔었다. 광복후 개척단은 해산되고 개척단 성원들은 모두 동북민주련군 리홍광지대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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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송화강류역 마을들은 현재 조선족이 있든 없든간에 마을 이름만 보면 예전의《집단이민》부락이였는지를 대뜸 알수 있다. 대개《집단이민》부락 이름은 조선에서 살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온것이였다. 류하현 창성, 벽동, 경기, 초산, 가평 등은 조선반도의《군》이름을 단것이다. 안도현 금화, 원주, 고성은 강원도의《군》이름이고 장수, 정읍, 금제, 익산은 전라북도의《군》이름들이다. 청흥은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자와 신흥군의 흥자를 따서 단 이름이고 안산은 전라북도 진안군과 익산군의 중간자를 따서 단 이름이다. 그리고 조양은 조선의 조자와 강원도 양양군의 양자를 함께 붙인 이름이다. 말하자면 집단이민들이 송화강류역으로 밀려와 새로 생겨난 조선족마을들은 대개가 조선의 고장 이름을 그대로 옮겨온것이요, 이주민들의 조국애와 애향심을 나타낸것으로서 조선반도의 복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줄로 안다.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이주초기 일제의 수탈과 비적들의 등쌀에 늘 바늘방석에 앉은 신세였다. 

 

연변대학 반룡해(潘龙海 68세)교수는 20년대 말 길림지구에서 살면서 비적의 략탈을 당하던 일을 회상한다. 

 

《비적들은 쩍하면 조선족마을을 략탈했답니다. 조선족들은 후원력량이 없어 습격해도 뒤근심이 없고 또 수전농사를 하므로 입쌀을 얻을수 있었고 아무리 가난한 집일지라도 첫날이불 한채는 갖고있었거든요. 어느 해엔가 말 탄 비적 한무리가 마을로 들이닥쳤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에 모였는데 녀성들은 솥검댕이를 얼굴에 발랐습니다. 비적들이 젊고 얼굴이 반반한 녀성만 보면 강간을 하기가 일쑤였거든요. 그리고 벌겋게 물든 아주머니들의 월경대를 소랭이에 담아 문밖에 놓았답니다. 비적들이 피를 보면 불길하다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미신이였지요. 그런데 굶주린 비적들은 곧장 우리 집으로 들어오더니 마을사람들을 몽땅 끌어내고는 집집을 샅샅이 뒤지여 돈이 될만한 물건이며 짐승들을 모조리 끌어갔지요. 그번 비적지란을 겪은 다음 우리 집은 장춘으로 이사했답니다.》

 

광복이 나자 송화강류역 조선족마을들은 비적지란을 뼈저리게 당했다. 어떤 마을은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부근의 한족들은 몽치며 도끼를 들고 마을을 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것은 일제가 심어놓은 민족리간책의 악과이기도 했다. 광복을 맞은 한족들은 일본인과 조선족을 동등시하고 보기만 하면 때려죽이는 판이였던것이다. 한족마을에 끼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조선족부락으로 도망을 하고 지어 조선족부락 사람들은 이불보따리를 싸 이고 모든 가산을 버리고 도주하여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으로 왔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미처 떠나지 못한 조선족부락들에서는《자위대》를 조직하여 밤낮으로 보초를 서고 마을을 보호했다. <계속>

 

정리: 이정희 기자 lumiere0620@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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