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축구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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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의 유래와 역사

 
연변으로 이주한 조선인

연변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약칭이다.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발해국의 강역이었고 17세기 초부터는 후금(청나라)의 통치하에 있었다. 1644년 청의 군대가 산해관을 넘은 뒤 청은 백두산 지역을 자기 조상의 발상지로 규정하고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 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은 "아침에 들어와 일하고 저녁이면 돌아가며", "봄에 들어와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가는" 방법으로 꾸준히 개간을 해왔다.
그러다가 1860년 경 조선 북부지역에 연달아 재해가 들면서 많은 이재민들이 살벌한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새 삶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880년대부터 청조는 러시아의 침범을 방비하고 당지의 군사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동북변경에 대한 봉금정책을 점차 철폐했고 1883년 9월에는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길림조선상민 무역지방규약]을 체결했다.
이로부터 한반도에서 대량의 이주민이 연변으로 몰려들었고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조선족 마을이 많이 생겨났다. 통계에 따르면 1907년 연길청내의 조선족은 5만여호나 되었고 1916년 연변지구 총인구 26만 4982명중 조선족이 20만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인구가 더욱 증가해 39만 4900명에 달하였다.

20세기 초~1920년대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서당에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던 조선민족이었던 만큼, 그들이 집결한 곳에는 자연히 많은 서당이 생겼고 시대의 발전에 따라 근대식 학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연변에 제일 처음으로 설립된 조선족 근대학교는 훗날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이 1906년 용정촌에 설립한 ‘서전서숙’이다. 비록 일제의 탄압하에 ‘서전서숙’은 1년간 단기속성으로 74명을 졸업시키고 해산을 선포했지만, 이를 모태로 연변 각지에 여러 가지 유형의 근대식 사립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의 유형은 대체로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조선에서 넘어온 반일애국지사들이 설립· 운영하는 사립학교였고, 둘째는 종교단체에서 꾸린 사립학교, 셋째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1920년대 초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지역에는 조선총독부가 주체가 되어 만든 일본인이 통제하는 학교가 30여 개소였고,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는 19개소,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가 165개소였으며,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는 191개소였다.
연변의 축구운동은 바로 이런 학교에서 태동하고 발전했다.

여기서 잠깐 중국과 조선에서의 현대축구의 산생과 발전에 대해 살펴보겠다.
중국에서 현대축구는 대략 아편전쟁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1890년 홍콩의 두 관립학교(육재소학과 왕영중소학교)의 학생들이 영국인들의 축구경기를 보고 재미를 느껴 축구를 한 것이 중국에서 축구운동을 벌인 첫 시작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대도시의 학교들에서도 축구운동의 윤곽이 어렴풋이 나타났지만 다만 학교 내에서의 오락형식으로 진행되었을 뿐 고정된 축구팀이 따로 없었다.
1900년을 전후해 이런 학교들에 축구팀이 조직되었고 1911~1920년에 이르러서는 중국 여러 대도시의 중고등학교에 거의 다 축구팀이 만들어졌고 축구장 시설도 갖추어졌다. 이렇게 학교에서 축구를 하던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사회적인 축구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1908년 홍콩에 처음으로 아마추어 축구팀인 화남축구팀이 탄생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남화체육클럽이 설립되었다.
조선에 현대축구가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호스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통역관 등이 주축이 되어 1896년 궁중에서 최초의 축구클럽을 결성하였다. 조선에서의 축구운동도 초기에는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889년 5월 서울 동소문밖의 삼신평(현 삼신교 부근)에서 황성기독교청년 축구팀과 오성학교 축구팀이 영국선교사의 지도 밑에 축구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1902년 배재학당에서는 축구학급을 따로 운영했고 1905년 5월 4일 동소문밖의 봉국사에서 열린 프랑스어학교 운동회에서는 축구가 처음으로 정식 경기종목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연변축구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고 지역적인 원인으로 발전초기부터 주변 각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의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김약연


기록에 의하면 1908년 설립된 화룡현 명동학교에서는 김약연 교장의 지도하에 조선에서 온 교원들이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고, 같은 해 설립된 연길 와룡동의 창동학교에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박문호 선생이, 1910년 설립된 화룡현 장동학교에서는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노상렬 선생이 직접 축구공을 갖고 와 축구를 가르쳤다고 한다.
명동학교와 장동학교에서는 매년 두 차례씩 친선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명동학교의 교장 김약연은 반일민족애국지사로 그가 초빙한 교원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망명하여온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화룡현 대립자 명동촌은 조선족 반일해방운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고 명동학교는 이 활동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축구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반일애국지사들은 "국민교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학육(學育)이고 또 하나는 체육(體育)이다.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고 체육은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체육교육을 중시하였다.

 

명동학교의 유지




당시 반일민족애국지사들은 조선족 이주민을 단결하여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수단으로 운동회를 빈번히 개최하였다. 1913년 단오절에 명동학교를 비롯한 사립학교들이 용정촌 부근의 합성유라는 들에서 운동회를 가졌고 이듬해 단오절에는 간민교육회의 명의로 50여개 사립학교들이 연합운동회를 가졌다.
이런 운동회에서는 정식경기를 하기전에 먼저 ‘광복가’를 목청껏 불렀고 운동경기와 축구경기가 시작되면 ‘응원가’, ‘한산도’ 등의 노래를 부르며 응원했다.

<응원가>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아야
황황한 대한혼 발휘하여라.
다다럿네 다다럿네 우리 나라의
소년의 활동시대 다달았네.
반일 대적 연습하여
후일 공훈 세우세.
절세영웅 대 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한산도>
쾌하라 장검을 높이 비껴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한산도에서 왜적을 격파하던
충무공의 칼이 오늘날 다시
번쩍번쩍 번개같이 번쩍
쾌한 칼이 나의 손에 빛나네.
제국의 위업을 떨치누나.

이런 운동회에서 선수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정강이 받치개에 감추었던 삐라, 연락통지서, 쪽지 등을 서로 넘기면서 마을과 마을, 학교와 학교간의 연락을 주고받았다.
반일투쟁의 불길이 거세차게 일어나자 일제는 야만적인 탄압정책을 실시했다. 1920년 10월, 일제는 악명 높은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하였다.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는" 3광 정책에 3천5백여명이 잔혹하게 도살되었고 30여개의 조선족 사립학교가 잿더미로 되었다. 명동학교도 불에 타버렸지만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촌민들의 노력으로 1400여원의 자금을 모아 이듬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학생들의 졸업으로 1920년대 이후부터 축구운동은 점차 사회화 되였다. 1922년부터 1926년까지의 기간에 조선족 이주민 마을에서는 학우회와 더불어 "국자가청년회", "동진청년회", "투도구청년회" 등 16개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체육교류활동을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체육교류는 체육조직의 탄생을 가져왔다. 1925년 초 용정에서 "간도체육회"라는 체육조직이 탄생했고 그해 5월 연길에서 "연길체육회"가 설립되었다.
1925년 5월 연길 국자가에서 역사상 처음인 간도축구운동회가 개최되어 청년부 경기에서 국자가 간민학생 친목회팀이 우승하였다. 6월에는 용정에서 청우장학회가 주최한 축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영신청년팀, 국자가청년팀, 영신졸업생학우팀, 동흥교우회팀, 동흥대성연합회학우회팀, 동산팀, 은진학우회팀 등 7개 팀이 참가하여 동흥교우회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이해 단오절 왕청현 백초구에서도 13개 팀이 참가한 사회축구경기가 열렸고 이란구팀이 우승했다.
당시 농촌의 축구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부 농촌의 축구경기는 그 규모가 오히려 도시를 초월하였다. 마을 간의 경쟁이 치열하여 도시와 학교의 우수한 선수들을 데려오는 일이 많아 경기수준이나 참여인원의 규모에서 도시를 초월했던 것이다.

1920년대에 학교축구는 더욱 급진적 변화를 가져왔다. 1919년 3.1운동이 실패한 뒤 더욱 많은 반일지사들과 진보지식인들이 연변지대에 망명하여 왔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조선에서의 교육구국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들은 연변에 와서 반일 민족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생겨난 학교들이 용정의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등이다.
학교간의 축구교류도 점차 정기적인 활동으로 되면서 대항성 경기로 발전했다. 1923년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용정에서 해성중학, 동흥중학, 개성중학, 명동중학, 구산중학, 은진중학, 영신중학 등이 참가한 대회가 열렸고 용정 은진중학팀이 우승했다. 하지만 판정에 불복한 영신중학팀이 문제를 일으켜 경찰들이 동원되었고 우승기는 일본영사관에 보관되었다가 23일에 은진중학에 다시 돌려주는 일이 있었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은진중학의 교원과 학생들이 우승기를 들고 시위행진을 하다가 영신중학의 학생들과 맞붙어 한차례 유혈사건을 빚어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심판의 수준은 매우 낮았고 경기규정도 명확치 않았다. 전술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팀 작전은 있었지만 대체로 공이 가는대로 선수들이 몰리는 편이었고 공을 멀리 차 보내는 선수가 가장 대단한 선수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년부와 소년부 참가선수들의 자격을 나이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키를 표준으로 삼기도 하는 등 규정도 현재로서는 상식 이하의 수준이었다.

1926년 6월 13일, 김영화를 감독으로 한 용정 동흥중학 축구단 25명이 평양관서체육회에서 주최한 조선 제2차축구대회에 참가했다. 이들은 6월 23일 평양 광성고등학교축구팀과의 경기에서 1대3으로 지면서 탈락했지만, 대회가 끝난 뒤 안주, 정주, 선천, 신의주 등 지방을 돌면서 친선경기를 했고 서울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전 조선족축구팀과 친선경기를 가져 2대2로 비겼다. 이는 연변축구사에서 처음이었던 출국방문이었다.
1920년대 연변에서 가장 유명했던 축구선수로는 수캐라는 별명의 정수원과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박주환이었다.

1930년대~1940년대

1931년 일본은 9.18사변을 도발하고 동북3성의 대부분 지역을 강점하였다.
이 시절 일제의 탄압정책은 더욱 심화되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악명 높은 해란강 참살사건을 비롯하여 연변 각지에서는 4천여명이 학살되었고 민족사립학교는 폐교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족의 축구운동은 저조기에 들어갔지만 용정과 연길을 위주로 한 도심지역에서는 여전히 갖은 방법을 다하여 축구운동을 유지했다.
1932년 단오절, 용정체육회의 주최 하에 간도성축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용정시민팀과 용정학생팀이 우승했다.

 

간도성축구대회 개막식(1932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연길시민팀(1933년)


당시 용정은 만주지역에서 축구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었고 이곳에서 배출한 축구인재들은 후일 남북한과 중국축구계에서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용정 광명중학교의 이종갑은 길림시에서 8.15해방을 맞은 뒤 서울로 가 한국축구계에서 적극 활약하였고 1960년대에는 한국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학교 출신의 김응세는 북한에서 활약해 1966년 제8회 월드컵 북한대표팀 단장으로 8강 진출의 위업을 이루어냈다. 은진중학교 출신의 노광진은 북한에서 [우리 나라 축구]라는 축구서적을 편찬하여 북한 축구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외에도 동흥중학교 출신의 차금돌, 이영광, 류시률, 허죽산과 은진중학교 출신의 박익환 등 다수의 선수가 북한 축구계에 족적을 남겼다.
한편 영신중학 출신의 박노석은 1956년 중국축구심판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57년 연변축구협회가 성립된 뒤 1986년까지 줄곧 협회 부주석(부회장)으로 있었다. 또한 은진중학 출신의 김호주는 중국심양체육학원에서 선수로 활약하다가 흑룡강성 축구팀 감독을 지냈다.

이후 일제는 축구를 순민통치의 어용도구로 이용할 방침을 세우고 1934년 만주제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뒤 1934년 12월에 연변지구를 간도성이라고 고쳤다. 이어 1935년 4월 6일에는 만주국체육연맹 간도사무국을 설립했다. 용정 총영사관 나가이 영사가 회장직을 맡고 간도일보사 사장 선우일이 부회장, 그리고 일제에 아첨하는 김진국, 이철호, 김경하, 유명운, 안창범 등에게 총무부직을 맡겼다.
일제의 압박하에 10여년간 존재하였던 간도체육회와 연길체육회는 1937년 해산하였고 간도사무국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만주국체육연맹은 10여차례 만주국축구대회를 개회하였는데 전부 조선족으로 구성된 간도성축구팀이 9차례 우승했다.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5년)


1935년 6월 신경(현 장춘)에서 6개의 성(省) 팀들이 참가한 만주국도시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간도팀은 하얼빈팀을 5대0으로 꺾었고 결승에서는 1대0으로 심양팀을 누르고 우승을 따냈다. 그 후 간도팀은 이 대회에서 3연패를 하는 등 최고의 성적을 냈고 많은 선수가 만주국대표팀에 뽑혔다. 간도팀 외의 기타 지역팀에도 조선족선수가 많았고 대부분 팀의 주축이었다. 예를 들면 1942년 만주국대표팀 17명의 선수 중 조선족이 13명이었다. 이중 간도팀의 선수가 6명이었고 길림팀의 선수가 5명, 신경팀의 선수가 2명이었다.

1935년 중학교부에서 우승한 용정동흥중학은 1936년 9월 엄정덕을 감독 겸 단장으로 한 15명의 대표팀을 서울로 보내 3차례 친선경기를 가졌다. 연희전문과 3대4, 배재중학교와 2대3, 경신중학교와 0대1 등 3전 전패를 하고 말았지만 상대팀이 당시 조선 최고의 팀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장동축구팀(1935년)


일제는 축구를 순민통치의 어용도구로 이용하였지만 조선족은 조선족대로 민족의 절개를 과시하기 위해 복잡한 사회환경 속에서 자신의 눈물겨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축구운동은 비록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일제는 연변의 축구운동을 발전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에 따른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간도축구팀은 만주국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전부 단체와 군중들의 의연금에 의지했고 감독 양성반이나 심판원 양성반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 시기 연변지역의 축구기술은 대부분 실전 속에서 발전되어 두 다리를 들어 공중의 공을 차는 ‘도리깨 기술’ 등이 있었고 포지션은 주로 탑식(1-2-3-5)을 채용하였다. 선수들 개인의 포지션 개념도 자리를 잡았다. 당시 관중들이 응원할 때 흔히 "윙포워드는 연락, 센터포워드는 슈팅!"하고 외쳤던 소리가 이를 잘 설명한다.
축구심판은 보통 중소학교의 체육교사가 보았고 분쟁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통에 헌병이나 경찰이 축구심판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 연길에서는 오씨 성의 헌병이 늘 권총을 차고 축구심판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차례의 심판교육도 없었던 통에 판정기준이 들쑥날쑥하였고 명성이 높은 심판원이라 할지라도 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상반된 판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6년)


 

동만4성체육대회 축구종목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9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대성, 동흥 학우회(1940년)


 

만주국 제3차중등전문학교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용정광명중학교(1940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제2국민학교(1940년)


 

대동아축구대회에 참가한 만주국팀 조선족 선수들(1942년)

대동아축구대회에 참가한 만주국팀 조선족 선수들(1942년)
 


1945년 해방이후 ~ 1965년 문화대혁명 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했다. 그런데 연변은 비교적 일찍 해방된 지역으로 중국공산당 국내전쟁의 주요후방기지였다. 때문에 학교의 축구운동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축구경기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8년 8.15 해방 3돌을 기념하여 2만명을 수용하는 연길시 인민경기장(현 연길공원경기장)을 건설하여 연변축구운동회를 개최하는 등 해방기념일이나 조선족의 전통명절에는 반드시 대규모의 축구대회가 열였다.
1951년 말, 중국대표팀 선수를 선발하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동북국(현 동북3성과 내몽고 지역 일부 포함) 축구팀에 소속된 8명의 조선족 선수 가운데 이봉춘, 김룡호, 김병균, 최중석 등 4명(총 29명)이 선발되었다.
1953년 2월, 상해에서 열린 전국청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연변팀은 예선에서 광주, 중경, 남경 등을 꺾고 1위를 한 뒤, 다른 조 1위 팀인 상해, 여대(대련)팀과 결승전을 벌였지만 홈팀인 상해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박만복, 김창길, 최호균, 최증석, 김인걸, 박증철 등 연변팀에 소속한 6명의 조선족 선수가 중국청년팀에 선발되어 1954년 4월부터 1955년 10월까지 헝가리유학을 다녀왔다. 헝가리유학팀에는 또 한명의 조선족인 장경천(대련)도 선발되었다. 당시 중국청년팀의 헝가리유학은 주은래 총리가 직접 비준할 정도로 고위층도 중요시했었다.
그리고 이 팀의 선수들은 대부분 중국축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멤버가운데 니엔웨이시(年維泗)는 훗날 중국축구협회 주석(회장)을 지냈고 첸청다(陳成達)는 아시아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냈다. 7명의 조선족 선수 가운데 최호균, 김인걸, 박증철 등 3명은 50년대 후반 북한으로 이주해, 나중에 평양팀 감독을 지내는 등 북한의 축구발전에 기여했다.

 

1954년 파견된 헝가리 유학팀. 이 가운데 7명이 조선족 선수였다.


 

헝가리 유학팀에 속해있던 조선족 선수들


1955년 2월, 전국 대도시 지역별 축구선수대회에서 연변팀은 여대(현 대련)팀에 밀려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고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전국축구연맹전에서는 7위에 올랐다.

1955년 8월 1일 길림성 축구팀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연변축구의 실력이 길림성 기타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보니 이 길림성 축구팀은 길림팀이자 곧 연변팀이었다. 이 상황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비록 현재 장춘에 장춘 아태라는 슈퍼리그팀이 있지만 이 팀에 길림성 출신 선수는 몇 명 되지 않아 길림성의 한족(漢族)들도 연변팀을 길림팀으로 간주하고 있다.

당시 길림팀은 실력이 뛰어났기에 빈번하게 외국팀과 경기를 가졌다.
그해(1955년) 8월 14일, 길림성팀은 중앙체육학원(사실상의 중국대표팀, 현 북경체육학원)과 친선경기를 가져 1대1 무승부를 이루었고 11월 22일에는 소련 레닌그라드 제니트축구팀과 경기를 가져 0대1로 졌다. 이 경기가 주선된 경과가 재미있다. 이 경기는 원래 중앙체육학원팀이 출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첫 경기에서 동북체육학원팀이 0대8로 대패하자 길림팀을 대신 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12월 2일에는 헝가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청년팀과의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하였다.
1956년 10월에 장춘에서 열린 조선국가대표팀(북한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 0대0으로 무승부를 이루었고 1957년 알바니아 티라나팀과 2대2 무승부, 1957년 8월에는 소련 민스크 스파르타팀에게 0대1 패, 1958년 11월 소련대표팀에 0대4 패, 1959년 3월 소련 레닌그라드 제니트팀에 0대2 패, 1960년 7월 소련 아완노브 방직팀에 0대1 패, 체코 프라하 스타르타팀에 0대1 패, 1965년 8월 알바니아 대표팀에 1대2 패, 그리고 1966년 6월 북경에서 기니 대표팀을 맞아 2대2 무승부를 이루었다.

 

연변노동자축구팀과 북한 함경북도 축구팀과의 친선경기


 

구 소련 노보시비르스크를 방문, 친선경기를 갖는 길림성전업축구팀 선수들(1959년)


중국 건국 10대 원수의 한명인 하룡은 경기에서 언제나 용맹하고 열정적인 길림팀을 무척 좋아하여 북경에 와서 공안부 축구팀과 겨루어보라고 초청경기까지 마련해주었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길림팀 선수들에게 솜옷 한벌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당시 중국의 실정을 고려하면 이는 대표팀도 누리기 힘든 특급대우였다. 1956년초 길림성팀이 상해에서 동계전지훈련을 하고 있을 때, 하룡 원수는 또 한번 특별히 찾아와 "길림성팀은 국가팀의 기술을 배우고 국가팀은 길림팀의 훌륭한 풍격(風格)을 배워야 한다."고 격려했다.

 

전국 8개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연길현팀의 선수들을 찾은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1956년)


이 시기 연변의 아마추어 팀들도 전국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56년 7월 전국 23개 팀이 출전한 교육계통 교직원들의 대회인 종성(鐘聲)컵에서 연변종성팀은 결승에까지 진출했지만 홈팀인 상해에 져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해 8월 전국 8개현의 축구경기가 북경에서 열렸는데 연변에서는 무려 5개의 팀이 초청받아 연길현팀이 우승하고 왕청현팀과 훈춘현팀이 각각 3, 4위에 올랐다. 이렇게 연변 각지의 학교팀과 기업팀은 전국대회에 참가했다하면 최저 8강에는 들었다.

 

사회주의개조시기 상해에서 동기훈련을 하고 있던 길림성전업축구팀(1956년)


 

전국소년축구경기에서 2위에 오른 연변소년팀 선수들(1957년)


이때부터 중국축구계에는 "북연변, 남매현"(北延邊 南梅縣)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언론에서는 연변을 “중국 축구의 고향”, 길림축구팀을 "동북의 호랑이"라고 추켜세웠다. (주1: 매현은 현 중국 광동성의 梅州로 축구운동이 연변 못지않게 보급된 곳임.) (주2: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중국축구의 발원지라는 뜻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곳이라는 뜻임. 중국어로는 “足球之鄕”)

당시 연변의 각 기관, 공장, 기업, 학교, 부대 등에 모두 체육조직이 있었고 체육활동에 참가하는 인원수가 총인구의 90%에 달하였다. 연길현 1개 현에만 향급(鄕級) 축구팀이 475개였고, 220개 농업사에 축구팀이 있는 외에도 각 생산대(生産隊)마다 자기의 축구팀이 있었다. 1956년 연변체육운동대회에 참가한 선수만 해도 3551명이었고 각 현, 시급 체육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12,288명에 달하였다.
1958년 연변에는 279개의 기층체육협회가 설립되었으며 회원은 32,521명에 이르렀는데, 이 가운데 등급운동선수는 11,181명이였다. 이런 보급에 힘입어 당시 연변은 전국적으로 축구선수 수출지로 유명했다. 5,60년대 연변에서는 길림성팀에 370여명의 선수를 보냈고 이외 전국 27개 축구팀에 선수 270여명을 공급했다.
이 시기 연변이 배출한 유명한 조선족 축구선수로는 미드필더의 "사령관" 지운봉, "탱크" 이광수, 사이드의 "특공대" 정종섭과 "제비" 문정오, 날아오는 공을 맵시 있게 처리하는 "도리깨" 김동하, 스트라이커였던 "대포" 지청룡, 문전위치포착에 능한 "참새" 손중천, 오버헤드킥과 발리슛에 능한 "기계다리" 김흥석, 대인방어에 능한 "집게" 김익갑, 헤딩에 능한 "무쇠골" 최철봉, 그리고 골키퍼인 "철문" 박장수 등 다수였다.

 

전국 제1차 운동대회에 참가한 길림성전업축구팀 선수들(1959년)


길림성팀은 1957년 갑급(甲級)연맹전에서 7위, 58년에는 4위에 올랐고 59년 전국 제1차 운동대회에서 8위, 60년 4위, 61년 8위, 62년 5위를 했다. 그렇지만 1963년 동계전지훈련에서 신임감독이 기술만 강조하고 체력을 소홀히 한 탓에 15위에 그쳐 을급(乙級) 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1964년) 을급연맹전에서 2위로 갑급팀으로 복귀한 뒤 1965년 갑급연맹전에서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우승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중국축구계에서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1999년 요녕팀이 갑급으로 복귀한 뒤 준우승을 한 적이 있고 국제축구계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1997년 카이저스라우터른이 분데스리가로 승급한 뒤 1998년 리그 우승해 기적으로 불린 적이 있다.

 

1962년 전국 10대 스트라이커


 

동북대학생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연변대학팀 선수들(1964년)


 

전국축구을급팀경기에 참가하고 돌아온 연변노동자축구팀 선수들(1964년)


 

전국갑급팀연맹경기에서 우승한 길림성전업축구팀 선수들(1965년)


하지만 이듬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인 축구경기가 전부 취소되었고 5년간의 공백기동안 우승팀의 멤버들은 하나둘씩 축구계를 떠나 공장이나 기업으로 취직했다. 만약 이 멤버들을 그대로 끌고 갔으면 그 뒤에도 몇년간은 중국축구계를 호령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당시 우승팀 멤버 명단:
인솔자: 박병철
지도원: 이광수, 박상복
선수: 박장수, 라산묵, 김석주, 동경춘, 정종섭, 박성규, 홍종우, 지운봉, 유진석, 김정식, 정지승, 정동권, 지수길, 유동수, 최성룡, 문형덕, 최창국, 이룡운, 장한철, 정순도, 이두금, 권명률, 허태렬, 김윤철, 김룡준, 신재룡, 전영춘, 환순석, 이채운, 김은성, 최락현, 양춘석, 유명복

문화대혁명으로 손실을 입은 팀은 길림팀 뿐만이 아니었다. 산서성 대동에서 진행되는 전국소년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길림지구 우승팀인 연변1중팀도 대회가 취소되어 참가가 무산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1990년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축구수준이 대폭 퇴보하였는데, 특히 연변의 축구운동은 민족지구에서 진행된 문화대혁명의 재난을 더욱 심하게 받아 그 회복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늦었다.

5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1970년부터 축구활동이 다시 회복되었다. 길림팀은 그해 광주에서 진행된 초청경기에서 11위를 하였다. 2년 뒤인 1972년 전국축구분조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1973년 전국축구분조경기에서도 2위에 오르기도 해 강팀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1977년에 을급팀으로 강등되었다가 1978년 다시 승급했는데, 1979년 또 다시 강등하는 등 들쑥날쑥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무엇보다 팀 구성원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길림팀은 원래 조선족위주로 팀이 구성되었는데 선수와 지도자들을 모두 조선족과 한족(漢族)을 골고루 섞어 짜다보니 한 민족이라는 팀의 구심점이 없어져 조직력이 부족했고 훈련적극성이 떨어졌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전국 11개 도시 소학생 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용정 안민소학교 선수들(1973년)


 

연변 노일대 심판원들(1974년)


1980년부터 길림성팀은 연변에 귀속되었고 팀을 전부 조선족 선수들로 재편성하였다. 그 결과 1981년 을급연맹전에서 3위의 성적으로 갑급팀에 재진입하였다. 하지만 1983년 원래 팀을 이끌던 단장 겸 감독인 정지승이 물러나면서 한바탕 홍역을 겪고 1985년 강등, 1986년 승급, 1988년 강등이라는 부침(浮沈)을 계속했다.
이 시기 연변팀은 전국 각지의 군부대팀과 철도팀, 화학공업팀, 임업팀, 탄광팀 등에 3백여명의 선수를 보냈다. 이 선수들은 나중에 대부분 해당지역에 남아 각 지역의 축구협회 또는 축구팀의 감독 등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북경시팀으로 간 김정민은 나중에 중국축구협회 여자부 주임을 지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선수는 스트라이커 김광수(현 연변팀 수석코치)로 스피드가 단거리선수 못지않았다.

 

경기전 경기진행에 대해 의논중인 심판장과 심판원들(1976년)


 

동북3성 체육학원, 체육학부 축구초청경기에 출전한 연변대학 체육학부2팀의 선수들(1979년)


 

전국중학생 삼호컵 쟁탈 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연길현1중 선수들(1979년)


 

전국대학생 삼호컵 쟁탈 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연변대학 선수들(1981년)
 


한편, 이 시기 연변의 여자축구가 반짝 꽃을 피우고 져버린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축구운동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며 여자축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연변에 처음으로 여자축구를 지도하기 시작한 것은 연변대학 체육학부 최동섭 교수였다. 여자축구는 1977년 3월부터 연변대학 체육학부 75년급 여학생들을 상대로 1년간의 시험교습을 거쳐 1978년부터 정식학과에 편입되었다.
1979년 6월~7월 사이에 연길, 용정, 개산툰 등지에서 3차례의 여자축구 시범경기를 가져 많은 관중들을 불러 모았다. 특히 용정에서의 경기는 용정인민체육장이 만들어진 이래 최다 관중이 들어왔었다.

이런 노력을 거쳐 여자축구는 사회의 인정을 받았고 1979년 하반기부터 연변의 각지에서 여자축구팀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1979년 말에는 20여개 학교에 여자축구팀이 설립되었다.
1981년 6월 연길시에서 제1차 연변여자축구대회를 개최하여 화룡현 투도중학팀이 우승했다. 투도중학팀은 그해 8월 장춘에서 열린 길림성 제1차 여자축구대회에서도 무패의 성적으로 우승했고 1982년 8월의 전국대회에 길림팀으로 참가해 7위(10팀 참가)를 기록했다.
1982년 말, 투도중학, 송화평중학, 왕청2중, 훈춘2중, 연길시10중 등 5개 여자축구팀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연변여자축구팀이 구성되었다. 연변여자축구팀은 1983년 3차례의 전국경기와 1차례의 국제경기에 참가해 모두 3위권에 드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중 10월에 무한에서 열린 전국여자축구 우승쟁탈대회에서는 당시 중국 최강팀인 섬서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 전국여자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연변여자축구팀
 


당시 섬서, 상해, 북경 등 각 성(省)·시(市)에서는 올림픽 금메달전략에서 출발해 신흥종목인 여자축구를 집중 육성하였다. 이에 비해 연변팀에는 비록 이화련, 안영실, 장어금, 박순애, 이미화 등 5명의 국가대표 선수가 있었지만 시정부(市政府)에는 집중 육성할 마음도 힘도 없었다. 하긴 남자팀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꾸려나가기 힘든 상황에서 여자팀이 살아남기는 불가능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연변여자축구팀은 나중에 화룡현에 위탁운영되었고 1988년 4월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연변의 중등학교 여자축구팀도 선수를 보낼 곳이 없어지자 잇따라 해체되고 말았다.


 

자료원 [플라마] 중국 '축구의 고장(足球之鄕)' 연변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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