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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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강곡(越江曲)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민족의 전주곡/ 애달픔 맺혀있는 민족의 슬픈 노래  

겨울 두만강은 꽁꽁 얼어붙어있다. 눈보라가 아츠란 비명을 지르면서 눈덮인 강우에서 란무한다. 두만강언제에서 바라보는 사이섬은 무척 황페해 보인다. 뒤 돌아보니 멀리 룡정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굴뚝이며 천평벌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촌락들의 하얀 지붕이 바라보인다. 자그마한 호수를 지척에 두고있는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바로 턱밑이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이 언제에 서서 사이섬이며 촌락들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월강곡"이다. 애처로운 "월강곡"노래소리가 눈보라에 실려와 귀전을 울려주는것만 같다. "월강곡"은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우리 민족의 전주곡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북쪽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던가.
항간에서는 게걸스레 먹는 아이를 보면 "기사년에 난 애같다"고들 한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11년간 조선 북부에서는 대한재와 대충재가 련이어 들었다. 특히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함경도의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등 6진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겪어보지 못해던 특대한재였다.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되였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방울 오지 않았으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 아닐수 없었다.
  
조선 리조왕조의 부패한 관리배들의 학정으로 풍년이 들었다 해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이였는데 왕가물까지 겹쳤으니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만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을 캐먹었고 산열매를 따먹었다. 나무도 열매도 없어지자 그들은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다. 집집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길가에는 임자없는 시체가 나뒹굴기도 했다. 어떤 부락에서는 배고픈걸 견디다못해 등에 업었던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때의 참상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일서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굶어죽었으면 이 해를 <굶어죽은 해(飢死年)>라고 까지 불렀겠는가."
  
사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길이 되고말았다. 그러나 이 길마저 순순히 열리는 것은 아니였다. 조선 리조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우고 월강을 엄금시켰으며 월강하다 잡힌자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버렸다.
  
한편 청나라 통치자들은 도읍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긴후 장백산이북의 천리땅을 "룡흥지지" 즉 만족의 발상지로 만들고 엄한 봉금을 실시하면서 이민들의 이주를 일률로 금지했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서 말하는 "봉금령"이다. "봉금령"이 내려진후 만주땅은 천부지토(天府之土: 생산물이 풍부한 땅)로 되고말았다. 무연한 황무지, 끝없는 살림, 무진장한 자연자원이 깊이 잠들고있었다. 연변땅은 청나라 팔기병들의 훈련장소로 인삼과 진주를 캐고 사슴과 수달피 등 진귀동물을 잡아 청나라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수렵장소로 되고말았다. 만족을 내놓고 이 민족이 들어오는 경우 추방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잘못 걸리면 목을 잘리웠다.
  
장백산지구는 이렇게 인가가 없는 황량한곳으로 200여년 비여있게 되였다. 무성한 삼림, 비옥한 땅은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너무나 충분하였다. "앉아서 굶어죽으면 어떻고 월강하다 잡혀 죽으면 어떠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판인데 강을 건너고 보자. 혹 성공하면 살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비밀리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허봉학, 리광수 저)의 독백장면이다.
  
처음에는 일귀경작(日歸耕作)하는걸로 그쳤다.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는 아침이면 돌아갔다. 후에는 며칠씩 북박혀 있으면서 농사짓기도 했다. 청나라 관청의 령이 엄하면 돌아오고 뜸해지면 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만강연안 순라선에서 좀 멀직이 떨어진 산골짜기에 숨어 곡식을 심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봄에 월강하여 깊숙이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주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목숨을 내건 일들이였다. 그러다가 잡히면 엄벌을 받는데 두만강기슭에서 사람을 죽여 목을 걸어놓고 효시하는 장면을 언제든지 볼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고향에 남아있는 안해들은 남편들 때문에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른다. 어느날 불현 듯 두만강가의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남편의 머리를 발견하고 기절하여 쓰러진 녀인들이 얼마였으랴. "월강곡"에는 이러한 애달픈 심정이 련련히 맺혀있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류연산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재되여있다. 1883년 서북경락사 어윤중(西北經略使 魚允中)은 함경북도를 순찰하던 도중 종성의 수향루에 올라 두만강대안을 바라보다가 산발에 오불꼬불 뻗어있는 오솔길을 발견하고 "저건 무슨 길인고?"하고 물었다. "백성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나이다." 종성부사이 대답이였다. "저승길이라니?" "이곳 날농사군들이 강을 건너서 골짜기에 들어가 부대를 일구면서부터 난 길이옵니다. 월강죄는 목을 친다고 했으니 저승길이 아니겠나이까?" 종성부사의 이실직고였다.
  
크게 깨달은 어윤중은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월강죄인불가진살(越江罪人不可塵殺)"이라고 하면서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어 강북으로의 이주를 승인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연변지방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족을 출국시킬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수도 없다면서 집조를 발급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청나라 조정에서는 로씨야의 침략 등 국내외 복잡한 정세속에서 조선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1885년에 봉금령을 페지하였다. 이로부터 변강주민들은 더는 "월강곡"을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월강무죄의 령이 각 부락에 제때에 전해지지 못해 월강죄로 아쉽게 죽어간 마지막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무산의 사포수였다. 그때의 장면을 작가 류연산씨는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월강사냥을 한 사실이 탄로가 나서 관가에 잡힌 사포수는 달구지에 앉아 두만강변사형장으로 떠났다. 국경한계가 없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짐승이야 국적이 있으랴만 사람이 강을 건넜다는 리유 하나로도 당시엔 사형판결이 쉽게 떨어질수 있었으리. 수인차를 끄는 둥글소는 울퉁불퉁한 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암소처럼 대소변 때문에 멈추는 시간랑비도 없이 슬슬 잘도 끌고간다. 강변사형장의 단두대 량옆엔 벌써 명을 받고 온 도부수들이 름름히 대기하고있었다. 도부수들이 손에 들린 선들선들한 큰 칼을 보자 사포수는 진작 혼백이 구중천으로 날아올랐다. 수인차가 사형장에 이르기 바쁘게 사령들은 결박한 사형수를 끄집어내려 꿇어앉히고 단두대에 머리를 얹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고을쪽으로부터 말 한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등에 앉은 파발군은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소리를 쳤는데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 가려 들을수가 없었다. 판결문을 읽고나자 도부수들은 칼을 허공에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목이 두동강이 나면서 뻘건 피가 분수처럼 쏴 - 솟아 사방에 휘뿌려졌다. 목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싸늘히 식어가는 몸둥이는 마치도 커다란 웨침표마냥 모래사장에 뉘여졌다. 그것은 월강죄에 대한 종지부였다.
 
2. 간도(間島, 사이섬)

 

월강죄 두려워한 거짓말 "간도농사"
향연이 짙은 력사의 지명 - "간도"
  
조선 하산봉 농사군 리영수형제
강너머 땅이 얼마가 기름졌으며 버들이 우거지고 풀들이 키를 넘을가. 대한재로 하여 말라빠진 자신들의 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리재민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이렇게 탄식했으리라. 그리고 고양이 기름종지 노리듯 북안기슭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섰을 것이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 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사람들은 저 뚝너머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다음부터 저기 산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잖으면 안됐다더군요."
  
선구촌 제6촌민소조 마을앞 두만강뚝에 올라서면 심정호씨가 말하는 사이섬이 한눈에 활餠쨈? 마을사람들은 이 섬을 "미소(尾島)"혹은 정답게 "꼬리섬"이라고 부른다. 얼마전까지도 사이섬에는 조선농민들의 농막이 있었으며 조선농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섬이 두만강에는 아주 많았는데 "꼬리섬"은 그중 큰 섬이였다. 조선농민들은 감히 륙지를 범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런 섬들을 개간하여왔댔는데 이번에 리영수형제가 담도 크게 이 벌에 첫 괭이를 박은 것이다. 물론 가을이면 곡식을 떼목에 싣고 돌아가서는 정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유작작 사이섬 즉 "간도(間島)"에 가 농사를 지어왔다고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후 농사군들은 절골(애민촌), 애끼골(제동), 자동, 후동 등 광제욕지역은 물론 석정과 연집 등지에까지 파고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가면서도 "간도"에 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간도"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면서 아예 강너머 땅을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도(間島)"와 "간토(墾土)"
1883년, 청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변계가 "김림조선상민무역지방장정"에 의해 개방되고 연변지구에 대한 봉금령이 페제되면서 월간국이 설치되게 되었다. 하여 많은 조선농민들이 연변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땅을 개간한다고 하여 연변지구를 "간토(墾土)"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말이 "간(墾)"자와 "간(間)"자가 같은 음이고 "도(島)"자와 "토(土)"는 근사한 음이여서 민간에서는 구별없이 "간도"라고 불렀다.
"중조 량국간에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시비가 생긴 것은 1903년 <간도시찰사>로 임명된 리범윤이 중국측 월간국에 <간도>는 <땅이 50결(結, 1결은 약 10상)이나 되는데 강복판에 있고 원래부터 조선인들이 개간, 경작했기에 조선의 령토이다>라고 주장하며서부터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간도>란 낱말이 외교에서 사용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에 기재된 자신의 글 "<간도문제>의 발생과 일제의 <통감부 간도림시파출소>"라는 제목의 글을 상기시킨다. 그 글에서 박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두만강류역에는 크고작은 허다한 <섬>들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을 <간도>라 하였다 <동삼성정략>이나 <연길변무보고>의 기재에 의하면 <간도>는 원래 <섬>이 아니다.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 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 측 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光霽 )에 잇대여 있는 륙지였다. 이 <복새험>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복새험>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되었다. 당시 한족들은 이 <섬>을 <가강(假江)> 도는 <강통(江通)>이라고 불렀고 조선족간민들은 <간토(墾土)>또는 <간토(墾土)>라고부럴ㅆ다. 이로부터 조선족간민들에게서 <간도>란 칭호가 나왔다. <간도>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란 칭호가 나왔다. <간도>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 중국의 월간국에 조세를 바치면서 경작하였는데 매년의 조세총액은 800여냥에 달하였고 월간국에서는 조세를 받아 월간사무비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간도문제"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천순만의 조선인들이 터진 홍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었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1883년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는 화룡욕(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소재지)에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이북 길이 700여리, 너비 50여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간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나라는 변방보위수요로부터 출발하여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기구인 월강국을 세우고 전문 조선족의 개간사무를 맡아보았습니다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구로 확정한 이것은 우리 연변력사와 조선족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기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확정하였다. 하여 리범윤이 제기해오던 "간도"가 조선땅이라는 넉두리를 되풀이하면서 조선보호국으로 자처, 조선을 대신하여 간도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압록강, 송화강과 두만강 등 3개 강의 발원지일대에는 <독립소국>이 엄연하게 존재하며 이를 <간도>라고 부르는데""<간도>는 동서 760리, 남북350리나 되며 모아산(帽兒山), 김림성 림강현소속)을 따라 흐르는 휘발하(輝發河)로부터 송화강 이남일대의 지역까지 모두 <간도>지역에 속하는바 그 광활함은 우리나라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해당된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도대체 중국에 속하느냐 아니면 조선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단정하기 어렵다"는 망설까지 해댔다.
  
그후 일제는 자의로 간도를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와 무산간도로 행정구역을 획분하고 4개 구역에는 "도사장"을 임명하고 그 관할하에 41개 사, 290개 촌을 두고 사장, 촌장을 임명하였으며 신흥평, 국자가 등 14개소에는 일본헌병대분견소를 설치하고 헌병과 조선경찰을 배치하였다.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변계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들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로 되었다.  
 
3. 고난의 조선족 간민(墾民)

 

문전옥답 치발역복하지 않았다고 정부에 빼앗기고 사지안에 들었다고 영문 모른채 점산호에 빼앗기고

조선간민구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황무지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훈춘녕고탑초간(招墾)장정”을 반포,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은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60문(文)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후에 갚게 하며 그 나머지는 한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밖에 간민들에게 부림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빚을 갚게 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했다.
  
1885년에 와서 간민전문개간국을 설정하기에 이르는데 그 의의에 대하여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토지를 개간할수 있는 합법적권리를 얻은것입니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변땅에 들어왔기에 그후 민족공동체형성에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한편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정부에서 관황(官荒, 관청의 황무지)을 조사하여 풀어놓은 기회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을뿐만아니라 5년내에 조세를 받지않으며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사금을 선대해준다는 좋은 조건으로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런 좋은 조건은 조선농민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어 수많은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두만강연안의 4개보, 39개 사로부터 해란강이북과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쪽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괴나리보짐을 풀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 2백리 땅이 조선농민들에 의해 전부 개간되였을뿐만아니라 해란강이북지역과 가야하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초강국설치시의 조사에 의하면 당지에 숙지가 적잖았는데 훈춘지방에 5620헥타르, 남강지방에 3073헥타르, 흑정자지방에 144헥타르가 있었다. 훈춘변황후선지부 리금용의 조사에 의하면 가야하로부터 고려진북안에 이르는 구간에는 이미 8곳이나 개간되였는데 그 면적은 2000여헥타르에 달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야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방에 쳐들어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실색한 연변지방 관리들과 군경들은 길림으로 꼬리를 사렸다. 그 기회에 조선간민들은 연변지구에 더 많이 이주하였는데 1909년에 이르러서는 3만4133세대에 18만4867명으로 늘어났다.
  
치발역복 귀화입적
1891년, 청정부에서는 화룡 월간국과 통상국을 무간국으로 고치고 이듬해에는 무강총국을 국자가에 옮겼으며 조선족의 호적을 조사하여 4개보, 39개 사에 편입시키고 조선족을 청나라신민으로 인정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류병호선생은 “조선족에 대한 청나라의 ‘편적위민’과 ‘치발역복’정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간민에 대한 청나라조정의 편적위민은 민족동화를 목적으로 한 치발역복을 기초로 하였다. 근대적국법을 아직 수립하지 못한 청나라조정은 입관시에 관내지역의 한족인민들에게 강요하였던 치발역복정책을 200년후 조선으로부터 이주하여온 조선족간민들에게도 강요하고 이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전제로 삼았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족간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은 령토주권을 버리는것과 같으므로 치발역복하여 만족으로 동화된 조선족간민만이 청나라의 신민으로서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물론 이런 정책을 조선족간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백의흑관은 조선민족의 상징이요, 상투와 머리태는 남서의 성가여부를 상징하는 표징이였다. 장기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상하간의 례의와 타문화에 대한 배타주의사상을 길러온 조선민족은 조상이 물려준 백의흑관을 버리고 호북(만족복장)을 갈아입고 부모가 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는 것을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참으로 머리위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피땀으로 걸구어온 옥답을 빼앗기고 지어 가장집물까지 털린후 강건너 설음의 고향땅으로 쫓겨갈판이였다. 그렇다고 만주호적에 든다는것도 조상들에게 죄스러운 일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치발역복, 귀하입적”하지 않는다면서 문전옥답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관부에서 순찰할 때만 호북에다 머리를 풀어 땋고 평소에는 여전히 한복차림을 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후 짜리로씨야가 연변을 침략하자 연변지방의 관리들이 길림으로 도망치는통에 치발역복바람이 즘즘해졌다. 하여 치발역복하였던 많은 조선족들은 다시 민족복장을 입었다.
  
점산호와 조선족지주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지방관리와 군벌, 대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권세를 등지고 청장(淸丈, 토지를 재주는 일따위)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부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꽂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어떤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하였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상인들을 가리켜 “점산호”라고 하였다. 그때의 정경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점산호들이 차지한 토지면적은 토지증명서에 ‘동쪽은 수림이고 서쪽은 강이며 남쪽은 수림이고 북쪽은 개울’이라고 써넣고 이것을 ‘사지(四至)집조’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사지를 정해놓으니 개간민의 토지도 사지안에 들어갔다. 관청에서 비록 경작지를 다시 측량하고 등록된 면적을 초과했을 때는 ‘부다지(浮多地)’로 처리하여 땅세를 받아들였으나 그것 역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조사해내지 못한 토지가 많고 또 조사해냈다 해도 우선권이 점산호들에게 있어서 땅세를 바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개간민들은 웬 영문인지 모른채 피땀으로 일군 문전옥토를 점산호들에게 점령당하고 빈주먹으로 나앉게 되었다.”
  
거기에다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하지 않은 개간민들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관청에서는 치발령을 어긴자에게 기한을 정해 토지를 한족지주나 한족주민에게 넘겨주도록 강요하고 기한내에 넘겨주지 않으면 강건저 조선땅에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조선개간민들은 자기 손으로 가꾼 토지를 점산호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고농으로 전락되였다.
  
조선이주민속에도 대지주가 나타났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관청과 점산호들에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의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든 덕에 점산호들로부터 몇백헥타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지주가 된 것이다. “변발호복”하여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리를 받아들이며 그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관부와 결탁하여 기타 귀화입적하지 않은 간민들을 고용하여 황지를 개척한 뒤 자기이름으로 령조납세(領照納稅) 함으로써 일약 수십상의 토지를 점유한 지주로 되었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의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끌리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솔가이주하여 일약 수십상의 황무지를 소유한 지주로 되었다  
 
4. 벼꽃향기

 

거치른 벌판에 벼꽃향기 싱그럽고 조선족농민 "어곡전"까지 다뤄
                                 
첫 수리공사    
"연변의 벼농사는 우리 조선족에 의해 시작되였습니다. 력사적으로 보면 고구려나 발해시기에 이곳의 벼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로송의 벼가 좋다>는 이야기는 발해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로송>이란 지금의 개산툰진 광개일대를 말합니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후 동북의 벼농사는 없어지고말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자그마한 연변지도를 펼쳐보이면서 두만강기슭을 가리킨다. 보풀이 일 정도로 낡은 지도는 1920년대초 일제가 만든 지도라고 한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이라는 글에서도 이렇게 설명되고있다. << <만주경제 연구보>에 의하면 1868년좌우 두만강연안에서 제일 처음 수전농사를 지었다고 하였고 또 전하는데 의하면 1895년 두만강연안의 종성위자에서 수전농사가 시작되였다고도 한다.>>
    봉금제도가 엄했던 그 시기 범월잠입한 조선족농민들은 청나라관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두만강북안의 산골짜기의 자연수를 리용하여 처음에는 아마 뙈기수전을 부쳤을 것이다. 그후 1900년 해란강연안의 세전벌인 동성용에서 수전경작이 시작되였다. 1906년 룡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연도인 대교동에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로부터 벼농사는 연변각지에 파급되였다.
  
    버드나무가 제법 파랗게 물이 오르고 종달이가 하늘 높이 떠서 지종대던 1906년 6월 한무리의 흰옷입은 사람들이 곡괭이가 자갈에 부딪치면 불꽃이 튕기는 강바닥을 파헤치느라 비지땀을 쏟는다. 1,308메터의 물도랑을 째느라고 떨쳐나선 대교동의 조선주민 14명이였다. 이들은 륙도하물을 끌어들여 33상의 논을 풀었다. 이것은 연변에서의 최초의 수리공사이다.
  
   박창욱선생은 낡은 지도우에 확대경을 대고 끝내 대교동을 찾아낸후  감개무량하게 말한?
   <<그뒤를 이어 룡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현의 수신향(두도구일대), 평강 등지의 조선이주민들도 해란강물을 끌여들여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지요.>>
  
   강이 많은 연변은 논농사하기가 제격이다. 두만강 북쪽기슭과 해란강기슭의 평강벌, 서전벌 및 부르하통하, 가야하 하류의 넓은 들, 훈춘하연안과 밀강류역이 바야흐로 논벌로 변했다. 조선족개간민들이 무상기가 짧고 기온이 낮은 동북의 불리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고 벼농사에 성공한것은 연변농업에서의 일대 비약이였다. 이로부터 밭농사만 짓고 남방에서 입쌀을 날라다 먹던 력사를 종말짓게 되었던것이다.  
  
동북대지에 풍기는 벼꽃향기    
   쪽박차고 괴나리보짐 등에 지고 처음 왔을 때 조선족농민들의 눈앞에 펼쳐진것은 거치른 벌판뿐이였다. 깊이 잠든 산기슭과 들판으로 야수들이 들락거렸으며 찢어진 옷자락으로는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복장에 하얗게 회칠한 집에서 살면서 하얀 이밥을 먹는 민족이 조선족이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 했던가.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민족이라 했던가. 아무튼 벼지푸라기 하나 없던 이 땅에 논이 펼쳐졌고 밥상우에 이밥그릇이 놓이게 되었다. 고난에 허덕이던 민족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데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에 대해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1918년에 이르러 연변의 벼가 대외로 수출되게 되었지요.  이는 대단한 일입니다. 력사적으로 벼를 수입해오던 연변에서 벼를 수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변화가 관청을 놀래웠지요. 이리하여 1919년 4월에 연길현공서는 <연길현벼농사잠행규정>을 내놓았지요.>>
   
벼농사를 하려면 수리건설을 해야 하고 수리건설을 하려면 밭을 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밖에 땅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행규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사람이든지 벼농사를 하는 농민의 정당한 리익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규정은 당시 우리 조선족농민들의 합법적리익을 보호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1921년 12월 3일, 길림성 성장 홍렬신이 연길현공서에 <<수전농사를 잘 하여 농사를 진흥시키라>>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적지 않는 한족들도 벼농사대오에 가입하였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 일문에서 20세기초 연변 조선족농민들이 온갖 곤난을 극복하면서 수전을 개발한 면적을 연대별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06년 12.6정보
   1912년 185.0정보
   1917년 764.0정보
   1918년 1,458,0정보
   1919년 3,608.7정보
   1922년 6,605.8정보
   그후 수전농사는 멀리 길림, 장춘에 까지 파급되였고 나아가서 흑룡강성의 동경성, 목릉, 밀산, 녕안, 해림, 지어 동부몽골지구에까지 파급되였다.
   <<내몽골의 수전개발>>(리성도 손만수) 일문에서 내몽골에서의 조선족농민들의 수전개발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17년 람루한 홑저고리를 걸친 한패거리의 조선족농민들이 백설로 뒤덮힌 저리무맹대초원의 바얀탈르에 왔다. 이들 15호 74명은 김일선의 인솔하에 매서운 찬바람속에서 물길을 째고 천년묵은 초원을 수전전으로 개간하였다. 수개월동안 악전고투하여 이듬해 봄에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공제호농장>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여태규가 거느린 16호 69명의 조선족농민들이 락봉보에서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대전농장>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4월 김지휘 등 2호 14명이 청하하류에서 동서 150리, 남북 30여리의 평탄하고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수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족농민들은 동북수전농사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세웠다.
  
"어곡전"
    화룡현 동성향 비암촌과 룡정시 개산툰진 광종촌 하천평에 위만주국괴뢰황제 강덕의 <<어곡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광종촌의 <<어곡전>>을 말하려 한다. 1917년 2월 18일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채여난 최학출이 광종촌의 <<어곡전>>을 다루었다.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였던 저명한 민간문학가 김재권선생은 최학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최학출은 1935년에 하천평에 이사와서 지주의 땅을 부치였는데 1941년 봄에 소출을 높이려고 간이창문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해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남들보다 한절기 앞서 벼모를 한데서 소출도 많이 났거니와 입쌀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아 천하진미로 평가되였지요.>>
  
   그후 최학출의 온상육모법이 광범하게 보급되였다. 하여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장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강덕황제의 <<어곡전>>은 다룰 사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최학출은 1943년 봄에는 <<농업사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가서 온상육모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해부터 <<어곡전>>을 다루게 되었다.
  
   농민시인 심정호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매지게 자라서 일매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일매지게 설레이며 사근대는 이삭들의 소리가 마음에 감미롭다. 논두렁을 밟으며 벼들의 속삭임을 듣노라니 <어곡전>을 다루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곡전으로 짐승들이 나들지 말라고 뼝끼칠을 한 울바자를 둘렀다. 모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손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탈곡하면 앞목으로 마대에 넣었다가 쌀을 찧어낸다.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여들어 뉘와 귀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약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그것도 검사에 통과하여야 강덕황제의 어곡합격증을 받는다.>>
  
   최학출이 다룬 <<어곡전>>면적은 천평이였는데 봄에 논갈이 할 때만 소의 힘을 빌고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고 한다. 논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고 버선을 신어야 했으며 거름은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벼가을과 탈곡을 할 때면 해당 관원들의 감시하에 했고 정미한 입쌀을 처녀들이 유리판우에 올려놓고 한알씩 골랐다고 한다. 색깔과 빛이 다르거나 쌀알의 귀가 덜어져도 안되였다고 한다.
  
   어곡을 생산할 정도로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가 소문을 놓았으니 실로 자랑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쌀을 짓는 농민도 허리띠를 졸여야 하는 세월에 어곡을 다듬어 강덕에게 바친다는것은 농민들로 놓고 말하면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5. 피눈물의 지팡살이

 

지주 지방관청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에 녹아나는 조선족농민들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 농사가 제법 잘되기만 했다.
한창 재밌게 농사를 짓고있을 때 난데없는 “다부살이”(만족식두루마기를 입은 점산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친다. 다된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없는 황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들이 사지증서안에 든 땅이였던 것이다. 어떤 점산호들은 조선족간민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체하다가 황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 불현 듯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자들은 계속 농사짓겠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하여 조선족간민들은 자신이 일군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소작농으로 전락되여야 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에 대해 류병호선생은 “점산호와 포산호”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방법을 보면 첫해의 가을 혹은 이듬해의 이른봄에 잡초와 관목들을 베여낸 후 괭이와 보습으로 갈아 번지고 조를 심는데 첫해에는 밭고暳?내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 이듬해부터 콩, 옥수수, 보리를 심었다. 이렇게 2~3년이 지나면 황지가 점차 옥답으로 되는데 이사이에 겨울이면 도끼로 나무뿌리를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간민들을 당시 지방관청에서는 간민이라고 불렀고 한족과 만족들은 지호(地戶)혹은 포산호(創山戶), 즉 산을 뚜지는 사람들이라고불렀다.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된 포산호들의 생활이란 중세기 장원주의 농노와 같았다.”
  
산골짜기에 단풍물 오르고 밭곡식이 여물어서 누렇게 익은 가을, 탈곡장에 높이 쌓은 낟가리를 바라보면서 봄내 여름내 손이 갈라터지게 일한 보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날아든다. 무장한 졸개들을 거느린 다부살이가 탈곡장에 뛰여 들어 마구잡이로 조선족간민들이 지은 곡식을 우마차에 실어간다. 자기들의 요구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집 안해를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자식까지 빼앗아간다.
포산호들은 흔히 4상의 토지를 소작 맡으면 점산호의 1상의 밭을 무상으로 다루어주어야 했다. 또 해마다 10~20일간 점산호의 일을 무상으로 해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점산호를 위해 잡일을 해주어야 했다. 례컨대 음력설전후이면 점산호의 마소들이 1년간 먹을 사료를 썰어주어야 하며 립추전후이면 땔나무 50단을 하여 바쳐야 한다. 같은 글에서 류병호선생은 포산호들의 억울함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채구의 점산호 손보산은 포산호들에게 매년 1상의 감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꼭 김 세벌을 매게 하고 가을이면 잘된 감자만 골라 자기의 국수방에 가져오게 하였다. 점산호들은 잘 다룬 옥답을 빼앗아 례물을 많이 바치는 다른 간민들에게 소작주고 옥답을 빼앗긴 간민에게는 다른 황지를 개척할 것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빚갚지 못해 처자 빼앗겨
옛날에 연변에서 땅 없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부치는 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이란 한어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지주가 차지하고있는 “地方(띠팡)”을 지팡으로 잘못 부른데서 생겨난 말인데 일부에서는 “地盆爾(띠팔)”에서 왔다고들 한다. “이주민들이 입버릇처럼 외운 지팡이란 곧 토지를 비롯한 생산자료가 어느 한 지주에게 들어간 지방을 말한다. 례를 들면 쑹개네지팡(宋家地方), 왕개지팡(王家地方), 조개지팡(趙家地方) 같은것들이다.”(박청산 김철수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개간초기 조선족농민들은 쌀도 농구도 없기에 지주에게 쌀, 농구, 생활비를 빌어 땅을 부치잖으면 안되였다. 이런 것을 방청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쌀, 농구, 부림소, 생활용품을 대주면서 3년동안 소작료를 안받는다 해놓고는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쓸어들고 상품경제가 점차 발전해가자 첫해부터 소작료를 내라고 했다. 첫해에 수확고의 20%, 이듬해에 30%, 그 다음해에 40% 바치는데 거기에다 월리식까지 합하면 수확고의 70~80%를 바치는셈이였다. 네 번째해부터는 종자, 농구, 부림소 등을 자부담하면서 방청을 반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반작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는걸 말한다.
  
등허리를 내리 쬐는 무서운 땡볕아래에서 잔뼈도 굳지 않은 애숭이 머슴애가 후치를 끈다. 이마로는 비지땀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마구 쏟아진다. 후치대를 잡은 아비의 목에서도 겨불냄새가 난다. 이것은 당시 조선족농민의 풍경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조선족농민들에게 있어서 부림소 한 마리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소가 메여야 할 쟁기를 흔히 사람이 메잖으면 안되였다. 뼈가 물러나게, 살이 떨어지게 한해농사를 지어놓았으나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여러 명목의 가렴잡세까지 바치고나면 다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듬해 봄이 되기도전에 쌀독이 비게 되어 조선족농민들은 지주에게서 높은 리률로 쌀을꾸어다 호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곡물반환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봄에 곡물 1되를 꾸어주고 가을에 3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봄이면 지주들은 시장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가을이면 폭락한 값으로 6배에 해당한 곡물을 받아들이다. 례하면 봄이 량식 한되 값이 1원이라면 한되에 1.5원으로 꾸어주는데 가을이면 량식값이 0.5원으로 폭락했으니 의연히 봄의 가격으로 받는다. 그러니 봄에 1되 꾸어온 량식이 가을에 6되 되는 것이다.
  
이외에 점산호들은 고리대로 지호들의 고혈을 짜냈다. 리자는 보통 5푼이고 높을 때에는 10푼자리도 있었다. 정한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처자를 빼앗기기도 했다. 빚을 못갚은 농민들의 아들딸들은 지주집에 꼴머슴, 부엌데기로 들어가야 했다. “덕신향 장동촌 하촌의 최대도은 점산호의 고리대를 갚지 못하여 하마터면 고환을 잘리울번 하였다.”(김희 “장동촌을 개척한 사람들”)
  
가렴잡세와 “동양척식회사”의 착취
“조선족농민들은 지방관청으로부터도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동북의 다른 비장에서는 볼 수 없는 괴이한 세금을 바쳤는데 문턱세, 인두세 같은 것이 그런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조선족농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 없다고 한다.
조선족농민들은 교육비, 순경비, 보위단비 등 자빙세를 바쳐야 하는 외에 사묘, 도로, 교량수축비 같은 촌세를 바쳤으며 억울하게도 문턱세, 인두세, 고용세ᅳ 양우세(養牛稅), 굴뚝세, 입적비, 초대비, 땔나무세, 해산세 등을 바쳐야 했다. 문턱세라는 것은 관청에 불리워간 조선족들이 관청의 대문에 들어설 때 바치는 세금이다. 소로 농사를 짓는다고 소세를 바쳐야 했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받는다고 고용세를 바쳐야 했다. 이외에도 호세(戶稅)을 말한다. 량식, 닭, 닭알, 땔나무, 술, 담배, 잡화의 비용을 모두 호세로 각 호에 분담시켰다.
그리고 군대가 촌락을 경유할 때 촌민들이 무상으로 식사와 잡비를 제고하여야 하고 관리와 경찰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쓰는 비용도 촌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가련한 조선족농민들이 당하는 설음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그들은 악착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압박과 착취도 받아야 했다. 1918년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에서는 조선족농민들의 토지계약서를 저당잡히고는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개척해놓은 땅을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40~50%의 소작료를 받아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의 해설사이다. 이 대형다큐멘터리에서 하마탕주민 오준섭(80세)로인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이 수전, 한전 5헥타르 다룬다면 문패에다 헥타르당 얼마를 바치라는 것을 써붙여놓습니다. 세금이 어찌나 높은지 혀를 찰 정도였지요. 세금을 못내는경우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가장집물을 빼앗거나 부셔놓군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변대학 황룡국교수와의 인터뷰도 있다.
“연변의 토지를 점하기 위하여 일제는 연변에다 ‘동양척식회사 간도출장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구제한다는 명의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토지대금, 밭갈이소값, 농기구값, 량식값 등이 말아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은 그 규정에 따라 밭을 사가지고 토지계약서를 동양척식회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규정에는 리자와 본전을 다 물면 토지계약서도 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자가 어지나 높았던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도 리자를 다 갚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지주와 지방관청 그리고 일제의 압박착취는 조선족농민들의 명줄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6. 《간도협약》

 

부패무능한 청정부 불평등조약 맺고 고난의 조선족들 이중압박에 모대겨
  
장백산 "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나라 관군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여 1691년에 대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 변계를 재확인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20년후인 1710년 조선의 평안도 위원군에 사는 리만기 등 9명이 밤에 월강하여 산삼을 캐는 청나라 사람 5명을 죽이고 삼과 가타 물건을 로략질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강희황제는 두 강 상류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겠다는 것을 확정, 우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류답사를 지시했다. 1711년 강희황제의 상류답사지시문에는 “...도문강은 장백산의 동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문강서남은 조선경역에 속하고 강동북은 중국경역에 속한다. 역시 강을 국계로 한다. 이 점은 이미 명백한바이다...”고 상세히 적혀있다.
  
목극등은 1711년 성지를 받들고 답사길을 떠나려다가 못하고 이듬해인 1712년2월17일 쪽배 10척을 만들어 흥경변(興京邊)으로부터 길을 물어 두도구로 나와 압록강을 따라 수륙으로 소행(溯行) 10일만에 조선 후주에 도착, 조선의 접반사 박권 등을 만나 5월4일 혜산에 도착했다. 목극등 8일에 곤장덕에 이르렀는데 통역관과 짐군 20명, 조선관원 6명, 길안내 2명과 함께 15일간 먹을 량식을 휴대하고 200여리를 걸어 강원을 규명하고저 11일 장백산산정에 올랐다.
  
당시상황을 “만기요람(万機要覽)”이라는 조선문헌에 아래와 같이 서술되여있다.
“11일 산정에 오르니 해가 서쪽 기울어지고있었다. ...정상에는 큰 웅덩이와 같은 큰 늪이 있었는데 주위가 20~30리는 되는 것 같았다. 늪물 색깔은 검푸르고 깊이는 알수 없었다. 여름이 다 되었으나 빙설이 쌓여있었고 바라보면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산모양은 멀리서 보면 흰 독을 엎어높은듯한데 산정에 올라가보니 사위가 솟아있고 독아가리가 우로 놓인듯한데 밖은 흰색이고 안은 고동색이다. 사위벽은 깎아세운듯한데 금주단병풍을 두른듯하다.”
  
수원을 살펴본 목극등은 “북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 솟아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바로 송화강원지이고 산마루에서 약 3~4리를 천천히 내려가니 압록강원지가 있었다”고 송화강과 압록강원지를 비교적 정확히 지적하였다. 일행은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산아래서 동으로 흐르는 시내물을 발견, 그곳이 분수령으로 여겨져 ‘정계비’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이 땅속으로 흐른고로 강계가 불명확하니 비석을 경솔히 세울수 없다”고 지적하고 강물을 따라 동류(東流)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수행인원들은 60여리 더 답사한후 저녁켠에야 돌아와 “물이 과연 동으로 흐른다”고 여쭈었다. 그제야 목극등은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비문은 횡서로 “대청(大淸)”이라 새기고 종서로 “우라총관 목극등이 어명을 받들고 변계를 답사하면서 이곳을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이니 분수령에 돌을 깎아 기록하노라. 강희 51년5월15일, 필첩식 소아창, 총관 홍이가, 조선군관 리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이라고 새겼다. 이것이 력사에서 말하는 유명한 “정계비”이다.
  
“두만강은 ‘투먼(土門)’으로 기록되였는데 녀진어의 음역으로서 ‘만물의 근원’ 혹은 ‘만수의 회합’으로 전이되여 불려진 명칭이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
그후 두 나라는 두만강, 압록강을 계선으로 량국의 변계를 수호하였으며 1714년 청나라에서는 훈춘협령을 설치, 변강지구의 순찰을 강화하였다.
  
일제의 연변침입
세월은 흘러 171년이 지났다. 그런데 170여년후인 1883년에 이정계비가 말썽을 일으킬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조선에서는 장백산 “정계비”위치는 두만강강원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흙무덤”에 세워졌기에 비문의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고 다른 강이라는 이설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70여년이 지난후 발견된 정계비위치가 송화강원류인 이도강강원 우쪽 ‘흙무덤이 문같이 생긴곳’에 세워져있었겠는가?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이다. 아무튼 중국측은 후세사람들이 정계비를 옮겨놓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강희황제의 지시를 받은 목극등이 압록강, 두만강의 ‘극진처’, 즉 두강의 강원을 찾아 정계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송화강연안의 우리총관인 목극등이 두만강이 두 나라변계라는 것을 몰라서 송화강원류인 ‘흙무덤’에 정계비를 세울수는 없었던 것이다”
  
1885년9월에 진행된 제1차변계담판에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를 기준으로 변계를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나라는 비문에 새겨진 “동쪽은 토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동이이자(同音異字)이니 두만강의 강원을 찾아 변계로 확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87년4월 제2차변계담판에서 조선측은 “토문”이란 “도문”의 동음이자의 동일한 강이라는석을 묵인하였다. 결국 두나라 대표와 정부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종전처럼 량국의 천연적국계로 하자는데 대하서는 이의가 없었다.”(임희준 리춘 “19세기 80년대 중, 조 두나라간 두차례의 ‘국계담판’”)
1897년 조선조정내의 친로파는 조선인민의 반일기운을 리용하여 친일내각을 물리친 뒤 고종을 봉대하고 “광무개혁”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후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였다.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은 친로파들은 지난날 두차례의 변계담판에서 확인한 내용을 모조리 뒤엎고 또다시 “정계비위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변을 탈취하려고 음모했다. 이에 로씨야도 동조, “연변탈취”에 관한 비밀협정까지 맺는다. 1902년 “북변간도시찰특사”로 리범윤이 연변에 파견되여온다.
  
연변에 온 리범윤은 조선족간민들의 호적과 토지를 조사하고 스스로 촌의 령장, 참리, 검찰,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호구세를 징수하였다. 그는 또 “자위단”을 묶고 “사포대”를 조직하여 무장시켰으며 청나라관원들의 직무수행을 방해하고 청나라 백성들을 살해, 무장폭동까지 준비했다. 리범윤의 음모를 간파한 중국 길강군(吉强軍)은 폭동군을 숙청하기로 결정, 통령 호전갑(有時殿甲)은 1903년4월10일부터 16일까지 리범윤폭동군을 토벌하였다. 리범윤은 크게 패하여 도망쳤으며 하는수없이 1904년6월 화룡욕에서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체결하고 무력탈취음모를 포기하였다. 로씨야도 1905년 일로전쟁에서 패전,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고 연변을 탈취하려던 친로세력의 음모는 깨여지고말았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지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획책하였다. 1905년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불평등조약 “을사조약”을 맺는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연변은 전략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일본이 서부일본의 니이가다 등지로부터 한국의 청진 등지의 항구를 개척하고 나아가서 청진-회령-길림을 련결시키는 길회철도를 부설하여 ‘뒤문’으로 동북을 침입하는 것은 동부일본의 오사까나 고베로부터 료동반도로 침입하는 것보다 더욱 가까운 로정운 로정이였으니깐요. 결국 일제는 ‘한국의 보호국’으로 자체하면서 ‘한국을 대신하여 간도소속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연변침략을 획책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 “대륙침략의 선봉”이라고 할수 있는 구니모도는 “간도탐험기”라는 글에서 “간도란 압록강상류와 장백산구간에 있는데 백여년래 청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립지역이며 지금의 인구 25만중 조선인이 20만을 차지하고 토지는 대부분 조선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간도”는 “응당 한국의것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이등박문은 친일내각 박제순을 사촉하여 한국정부의 명의로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간도한인을 보호해줄것”을 제기하도록 했다. 일제는 또 로씨야와 “비밀협약”을 맺는 등 교활한 수단을 피우면서 로씨야와 기타 렬강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일본군 소장 사이또일행 63명을 룡정에 파견, 1907년8월23일부터 “조선총감부간도림시파출소”라는 간판을 걸고 이른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자들은 한편 “(1)간도는 한국의 령토이다. (2)한인들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하지 말 것. (3)청국관헌들이 징수하는 일체 조세를 파출소에서는 일률로 승인하지 않는다. (4)청국관헌들의 일체 법령에 대하여서도 파출소는 승인하지 않는다. (5)청국관헌이 임명한 도향약, 향약 등을 한인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는 훈령까지 내렸다.
일제의 연변침입에 대해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일제는 김해룡 등 일진화 회원을 리용하여 조선족간민을 기만, 우롱하고 민족모순을 도발하여 조세를 청정부에 납부하지 못하게 하고 청정부의 지령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일본헌병들은 도처에서 중국내정을 간섭하고 사단을 일으켰습니다. 일제는 간도가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변계문제를 리용하여 대륙침략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에 침입했던것입니다.”
  
불평등조약
“간도귀속문제”와 “한인보호문제”를 두고 청일 두 나라에서는 장시기 티격태격하다가 1909년2월17일 조회에서 일본이 간도가 중국의 령토가 옳다는 것을 똑똑히 승인한후에야 담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연변의 조선족은 “한국신민”이기에 보호국인 일본이 그에 대한 재판권을 항유한다는것과 중일 쌍방이 길회철도를 공동경영하며 천보산동광을 공동개발할 것을 제기했다.
  
청나라는 일제가 만약 조선족에 대한 치유권을 가지게 되면 연변은 표면상 중국령토이나 실제상 일본의 통치를 받는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간파하고 일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역시 ‘간도귀속문제’를 미끼로 로일전쟁후 동북에서 취득한 리권을 더욱 확대, 공고화하려고 지난날 해결하지 못한 안봉철도의 개축(경편철도를 광궤철도로 개축), 일제가 점령한 만철과 병행하여 청나라가 부설한 신민툰-법고간의 철도페지, 로씨야가 지난날 부설한 영구-대석교간의 철도를 일본에 귀속시킬 것, 무순, 연대 탄광의 개발권 등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였다.”(임희준 심홍매 “간도협약”)
  
드디여 1907년9월4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슈인과 청국외무대신 량돈언(梁敦彦)이 북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