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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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도일본총령사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투쟁을 진압한 소굴
연변의 풍부한 물질자원을 수탈한 수뇌부

                

죄악의 붉은 담장
   
   네귀에 삼엄한 또치까를 앉힌 우중충한 붉은 벽돌담장, 2메터도 넘는 그 붉은 담장에 옹위되여 있는 미색의 건축물-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룡정시인민정부사무청사로 사용되고있는 이 건축물이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이다. 지금은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애국주의 교양의 터전으로 각광받고있지만 일제치하에 시달리던 그때 누가 감히 이 건축물을 바라볼수 있었으랴. 악마의 아구리인양 쩍 벌리고있는 그 시커먼 철대문으로는 누런 군복의 일본경찰들이 밤낮으로 반일지사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혈안이 되어 실북처럼 드나들었으리.
   1909년 9월 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 체결한 일제는 길림으로부터 조선 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수축권을 얻었으며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룡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령사재판권을 얻었다. <<간도협약>> 제2조,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해 11월 1일 일제는 룡정에 설치하였던 <<한국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하게 된다.
   3월 13일, 기자가 <<룡정<3.13>반일운동85주년기념대회>>보도를 위해 찾아갔을 때 으리으리한 이 철대문앞에서 전임 룡정시문련주석이며 저명한 민간이야기수집가인 김재권선생을 만나 간도일본령사관 정황을 묻게 되었다.
   <<지금 보고있는 이 청사는 1922년 11월에 불탄후 1924년에 착공하여 1926년에 준공된것입니다. 건축면적은 2,503평방메터인데 담장에 싸여있는 울안은 42,944평방메터나 됩니다. 령사관은 지하 한층까지 합해 3층으로 되었는데 중간 남쪽이 보는것처럼 5층로 돌출되여 있습니다. 바같벽은 미황색타일을 붙였고 지붕은 저렇게 록색뼁끼칠을 한 양철지붕입니다. 청사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는데 반일투사들을 취조하는 감옥이였지요. 지금은 룡정혁명력사전람관입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된 그날부터 연변지구에서 하늘에 사무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여 항일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두 번이나 불에 타 잿더미로 되였습니다.>>
   김재권선생은 깨끗하게 정리되여 있는 정원길로 천천히 걸으면서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소개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초기에는 대리총령사와 부관 1명, 서리생 2명, 경찰서장 1명과 16명의 경찰뿐이였다. 그러나 1920년에 한국통감부로부터 300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총령사관에 경찰부를 두었다. 동시에 10여곳에 경찰서를 설치, 1928년 10월 2일에는 일본으로부터 100여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1931년 11월에는 총령사관 경찰부에 <<특수수사반>>을 두고 지하당의 정보를 수집하고 혁명력량을 파괴하는 죄악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1930년 11월의 조사에 의하면 총령사관 경찰부의 관할밑에 룡정촌, 국자가, 두도구, 동불사, 로두구, 팔도구, 천보산, 의란구, 대립자, 걸만동, 팔도하자, 백초구, 량수천자, 훈춘, 흑정자, 훈춘두도구 등 18개곳에 경찰서 혹은 경찰분서를 증설하였습니다. 1935년 5월의 통계에 의하면 경관은 646명이였습니다.>>
   1937년 11월 5일, 일본과 괴뢰만주국이 체결한 <<만주국의 체외법권을 철회하고 남만철도부속지행정권을 양도할데 관한 조약>>에 의하여 그해 12월에 <<간도일본총령사관>>과 5개 령사분관 및 경찰서를 철회하였다. 그후 룡정 총령사관자리에는 <<개척병원>>이 들어앉았다. 령사관의 관리들은 전부 일본관동군과 그 소속하의 특무기관에 넘어가고 경찰들은 다 괴로만주국경찰기구에 들어갔다. <<특수수사반>>은 <<간도특별공작반>>으로 개칭하고 계속 죄악적활동을 감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소굴

  

    청사 뒤의 지하실문을 여니 좁은 복도가 나진다. 몇메터 들어가니 가로 빠진 복도가 다시 보였다. 복도 량켠에는 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간방과 고문실이였다고 한다. 첫칸부터 다섯 번째칸까지는 혁명렬사박물관을 설치해놓을 예정이였고 이미 3칸을 꾸려놓고있었다. 간소하지만 일제의 죄악이 한눈에 안겨오게 꾸며져있었다.
   정부울안을 정비하면서 발굴했다는 일제가 사용하던 총칼이며 취조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진렬되여있는 세 번째칸에 들어서니 저도 몰래 긴장되고 불안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달틀>>은 시커먼 녹이 쓸어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마나 많은 반일투사들의 손목이며 발목이 거기에 결박되였댔을가. 얼마나 많은 혁명자들이 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을가. 땅바닥에 놓여있는 한틀의 작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진렬장에 놓여있는 녹쓴 창칼, 녹쓴 탄알... 반일혁명가들의 가슴터치는 고함소리가 금방 귀전을 두드리는듯 하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16년동안 간도총령사관 소속 경찰서에서 조선족반일투사들을 28,245명을 체포했는데 그중 녀자가 1121명이였습니다. 각종 형벌을 받은 사람은 16,949명이나 됩니다. <9.18>사변 이후인 1934년 한해의 례만 들어도 대단합니다. 한해동안에 3,635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때 연변에 조선족들이 426,000여명이였으니 인구비례를 따지면 170명당 1명이 체포된셈이지요. 총령사관에서 여북했으면 보이라실까지 감옥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였겠습니까? 보이라실로도 모자라자 이번엔 청진감옥으로 압송했습니다. 1930년 제4차공산당사건시에는 300여명 혁명자들이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여 가기도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아직 발표하지 않은 <<1907년-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이 받은 피해정황>>이라는 론문원고를 건네여주면서 비분에 차 말했다. 론문원고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조선족반일군민 4만여명을 살해했고 38,000여명을 체포구류했다. 그중 반일인사가 10,165명이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2월말까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연변의 조선족반일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벌린 대토벌을 박교수는 이 론문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는 침략군 2만여명을 동원하여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했다. 그번 대토벌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야수성을 남김없이 들어냈는바 간곳마다에서 3광정책을 추행했다. 그번 토벌을 사람들은 <간도참안>이라고 한다. 토벌에서 반일군민 2,600여명 살해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당지의 군벌과 결탁하여 <<3.13>>반일시위를 탄압했으며 1930년 5월에는 연변인민들이 발동한 <<붉은 5월투쟁>>을 탄압했다. 1931년 9월 20일에는 팔도하자 소명당현동에서 기관총으로 12명의 청장년을 살해하고 시체를 집안에 넣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1932년 4월 2일에는 침략군 제19사단이 연변에 기여들어서 <<천명을 오살할지언정 공산당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웨치면서 야만적인 대학살을 감행해 4000여명을 살해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감행된 죄행은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수 없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룡정에다 황민교육을 선향하는 보통학교를 세운후 국자가, 투도구, 배초구 등지에다 분교를 세웠습니다. 령사관에서는 소비돈, 교과서, 기숙사를 공급해주는 등 수단으로 많은 조선족학생들을 유혹하여 끌어들였습니다. 제1기 졸업생중 40%가 일본순사거나 경찰, 직원으로 된것만 보아도 이런 학교들에서 친일분자양성을 주목적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일제가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한것은 침략세력을 확대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조선사람을 취죄하기 위한것이였으며 조선의 신민통치를 위협하는 반일기지를 박멸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총적으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분노에 차 말했다.

               

소가죽 한장의 전설

   

   김재권선생은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자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면서 말끈을 푼다.
   <<기유년에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일본 놈들은 청정부를 욱박질러 룡정에 총령사관을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지을바에는 크게 지어 한치라도 중국 땅을 더 삼키고싶었던 령사놈은 못된 궁리를 꾸며냈지요.>>
   일본령사는 국자가에 자리잡고있는 청나라 도태부에 있는 윤대인을 만났다. 웃음속에 칼을 품고있는 일본령사는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곁으로는 웃음을 살살 발라가면서 레절스럽게 말했다.
   <<대인도 알다싶이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이웃이였지요. 내 오늘 대인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나라의 일을 담론하게 되었은즉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귀정부에서 룡정에 우리 총령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령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령사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도 곁으로는 빌붙는체 했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들이라 욕심부릴줄 모르웨댜. 그저 령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만 떠여주면 족하옵니다.>>
   <<뭐라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
   <<예.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이다. 그만큼하면 족하옵지요.>>
   아무리 큰 소라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큰 구둘에 절반도 펼가말가 하겠는데 령사관을 지을 자리를 소가죽 한장만큼 달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수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윤대인은 속으로 소국놈은 소국놈이로구나 하고 비웃으면서도 꼭 간특한 궤교가 있을것 같아 일본령사를 피하라 하고는 관원들을 불러놓고 전후사실을 말했다.
   <<그자들로 하여금 집을 지으라고 하십시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 집을 짓지 않고 좀이라도 우리 땅을 점하는 날엔 혼쌀을 먹여줍시다.>>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물곬을 팠다. 일은 쉽게 락착되여 일본령사는 물러갔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놈들이 룡정에다 으리으리한 총령사관을 지었다는 소문이 윤대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닫는 말에 채찍을 갈기면서 룡정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관연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있는 속에 커다란 고층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만한 땅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말인가?>>
   윤대인의 벼락터지는 소리에 일본령사는 되려 웃으며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약대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다 령사관을 지었을뿐이옵니다.>>
   <<눈이 먼줄로 아는가? 이렇게 크게 집을 지어놓고도 소가죽 한장만큼이라니!>>
   <<룡정시장의 소 한마리를 사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재여서 딱 그만한 자리에다 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한번 손수 재여보시지요.>>
   령사는 미리 준비해놓고있던 소가죽을 가져오라고 하졸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자가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 오려낸 소가죽이였다. 령사가 오려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하자 졸개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잠간사이에 소가죽을 붙여놓았다.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이 소가죽 한장을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령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사옵니다.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걸 합쳐도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잖고 뭡니까?>>
   간특한 령사놈의 얼굴에 침이라고 뱉어놓고싶었지만 손수 대답한 말이라 윤대인은 입이 막히고말았다. 이렇게 되어 룡정에 으리으리한 일본총령사관이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
 
 
8.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단체들 조선족사회의 건설 위해 몸부림
  
1910년대의 반일단체들
“간도협약”이 체결되자 연변의 조선족들은 한결같이 일떠나 룡정에다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하고 조선족에 대하여 “치의법권”하는 것을 반대해나섰다. “간도협약”이 맺어지자 일제는 상부지내에서 “령사재판권”을 실시했고 잡거구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지조권(知照權)”, “청심권(聽審權)”, “복심신청권(復審申請權)”을 실시하려 책동했다. 이에 각지 진보적인사들은 반일단체를 묶어 저항해나섰다.
  
1910년 훈춘현성에서 리종호 등을 주요간부로 한 해도회(海島會)가 설립되였다. 연해주와 간도에서 한글자씩 따내 이름한 이 단체에서는 로씨야와 연해주, 훈춘, 간도의 반일지사들간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각지와의 통신련락에 전력하면서 일제의 동태를 정찰했다.
  
1911년 왕청현 덕원리에서 대종교수령 서일이 중관단(重光團)을 묶고 단군숭배를 반일민족상으로 고취, 반일인재양성에 힘쓰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서일은 후에 자신이 건립한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재를 맡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밀고나갔다. 북로군정서산하에는 총재부와 군사령부가 있었는데 김좌진장군이 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1912년 왕청현 백초구에서 조상갑을 단장으로 하는 급당(急當)이 설립, 중국신해혁명에 편승하여 민중을 폭동에로 궐기시켜 민족독립을 실현하려 하였다.
1912년 훈춘현성에서는 김학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삼우회(商務會)가 설립, 훈춘시의 시민과 상인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켰다. 1912년 화룡현 덕신사에서 김태일을 단장으로 하는 민권당(民權黨)이 설립되였다. 취지는 급당과 동일했다.
  
1912년 왕청현 라자구에서 김천보를 회장으로 하는 농상회가 설립되였다. 농상회는 농업과 상업을 추진하는 단체로 표방했으니 실지로는 “반일흥한(反日興韓)”을 주장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하여 산업을 진흥시키려 했다.
1913년 훈춘현성에서 황병길을 회장으로 하는 기독교교우회가 설립되였다. 기독교교우회에서는 기독교신자들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키기에 힘썼다.
  
1913년 훈춘현에서는 박상규를 총리로 하는 둔전영(屯田營)이 설립되였다. 이 조직에서는 중한반일인사들을 련합하여 반일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1914년 연길현 의란구에서 황성현을 회장으로 하는 친목회가 설립되였다. 이 단체에서는 일제의 통감정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호상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그 외에도 연길현 동성용에서 설립한 사우계(士友契), 룡정에서 설립한 청년친목회, 국자가에서 설립한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등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런 반일단체들에서는 일제의 중국침략과 조선족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족에 대해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것을 반대해나섰다.
그중에서도 1913년5월에 민국정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설립된 “간민회(懇民會)”가 영향력이 큰 반일단체이다. 간민회는 후에 반일보수단체인 “농민회”첨예하게 대립된다.
  
조선족사회건립 위하여
1910년3월 조선족종교계인사 40여명이 조선족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가에 “간민교육회”를 설립하려고 연길부윤 도빈에게 인가신청을 하였다. 도빈은 조선족교육에서 “중국어를 주요과목”으로 가르치고 교수법과 기타 교과서 등도 “청나라의 지도에 의거”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간민교육회”를 인정하여 허락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귀화입적한후에는 중국경찰학당까지 졸업한 중국어에 능통한 반일친중국파이며 조선족교육가인 리동춘(1873년생)이 “간민교육회”회장으로 임명되였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로임까지 지불했으며 수하에 서기 몇사람을 두고 일하게 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간민교육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간민교육회>에서는 <조선이 망했으니 조선에다 국적을 둘 필요가 없다. 조선에 국적을 둔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 국적을 중국에다 옮기자>는 반일친중국사상을 선전하면서 <신학>을 제창하고 <구학>을 개량하기 힘썼습니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족들의 이러한 활동을 환영하였습니다.”
  
“연길부윤 도빈은 <간민교육회>내부에 <간민교육연구회>를 비밀리에 설치하게 하고 그 회원들에게 조선족을 통치함에 있어서 나타난 문제들을 조사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들을 제출할 임무를 주었다.”(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동맹회”는 만청봉건통치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다. 중화민국림시정부에서는 “련성자치제(聯省自治制)”를 주장했다. 이것은 “간민교육회”의 대단한 활력소였다. “간민교육회”에서는 리동춘 등 4명의 대표를 북경에 파견하여 려원홍(黎元洪)부대통령을 만나 연변지구 조선족사회상황을 보고한후 “간민자치회”의 설립을 허락해줄 것을 바랐다. 려원홍은 찬성을 표하면서 “자치”란 두 글자를 취소할 것을 지시하였다.
  
1913년5월 “간민교육회”는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고 국자가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간민회장정”을 정식으로 통과한후 간부들을 선거 임명하고 동남로관찰사서(東南路觀察使署)의 인가를 받았다. 저명한 반일활동가인 김약연이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간민회”는 자기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간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주한지 40여년이 되고 간민인구도 수십만명에 달하나 식견이 어둡고 종래로 흩어져 거주하기 때문에 통일된 규범도 없다. 이에 간민회를 조직하여 민중지간의 감정을 소통하고 중국의 법률을 연구하여 민중들을 민국의 법률에 복종하게 하며 공화정부의 보호에 의거하여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언어, 풍속의 통일을 기하여 노력할 것이다.”
  
“<간민회>에서는 망국노를 원치 않은 조선족들을 동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정부에 의거하여 중국법률의 보호하에 자치를 실시하며 나아가서는 연변을 반일민족운동의 기지로 건설하려 하였다.”(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마침 민국정부에서도 1912년 국적법을 제정, 반포, 조선족들에게 귀화입적하여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했다. 민국정부에서는 연변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들이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의 통치를 받기만 하면 연변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령토주권을 수호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간민회”에서는 지체없이 “입적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또 구학을 반대하고 신학을 제창하며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봉건가부장제와 봉건미신활동을 반대하는 “사숙개량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족들의 개화를 추동하였다. 각지에 야학교와 신자반을 꾸려 문맹퇴지사업도 전개했고 농민들로 하여금 생업을 개발하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기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운동도 벌렸으며 조혼을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간민회”에서는 로씨야의 “권업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졌고 미국과 로씨야에 건립된 “국민회”와도 련계를 가지면서 비밀리에 반일민족활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간민교육회”를 계승하여 연변에서의 반일문화계몽운동을 건개하였다. “간민회”의 활동을 상해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1920년1월)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간민회>의 조직과 활동은 간도조선인사회의 세 기원을 열어놓았다.”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간민회”의 활동은 연변에 살던 유림(儒林)들의 강력한 반발을 자아냈다. “그것은 <간민회>가 주장하는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운동은 공매지도를 <중화(中華)>사상으로 이어가려는 유림들의 주장과는 어긋났고 또 그들의 사회기반이였던 서당교육을 궁지에로 몰아넣었기때문이다.”(김춘선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이에 유림들은 사회단체로서의 “농무계(農務契)”를 조직하여 “간민회”와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공교회(孔敎會)를 건립하여 신앙활동으로 대중적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1913년 6월 29일, “간민회”가 설립된지 몇 달 안되여 연변의 유림들은 연길현에 모여 “농무계”를 출범시켰다. 최남기가 총회장에 당선되였다. 그해 11월에 200여명 유림이 모여 “공교회 연길지회”를 정식으로 창립하고 공자묘까지 세웠다.
  
“‘농무계’와 ‘공교회’에서는 조선족들의 입적을 반대했으며 입적한다는 것은 민족과 조상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신학을 반대했는데 신학에는 인류교육의 최고의 도덕이 없다는것이였다. 1912년 중화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된 원세개는 공맹지도를 국교로 삼는다는 공포했습니다. 때문에 <공교회>를 믿어도 중국정부에서는 어쩌지 못했지요. 유림들은 <간민회>에서 회비를 강제징수한 문제,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안긴문제, 일부 향약이나 렬신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리용하여 <간민회>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간민회>에 대한 유림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간민회>의 활동에 상당한 곤난을 조성하여주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면서 모순의 실질은 신구문화사상간의 투쟁이였고 초점은 입적여부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한편 “간민회”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중화민국 2년 12월 2일 김약연은 동남로관찰사서에 “보고”를 올려 “공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자들은 공교의 세력을 등대고 첫째는 유신교육을 훼방하고 둘째는 <간민회>를 반대합니다. 무릇 어떤 종교든지 그 성격을 보면 도덕을 양성하는것인데 간민구학구들이 조직한 공교회는 절대로 선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그자들의 행실을 따져보면 형식은 공교회 이름을 띠고 있지만 내용은 <농무계>와 한동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앞날에 지방행정에 실제 위험으로 되는 문제입니다.”
  
조선족의 두 단체는 다 반일친중국견해이면서도 이렇게 법정에서도 민간에서도 계속 첨예화되였다. 한편 관찰사서에서는 “간민회”와 “농무회”간의 대랍의 첨예화가 일제에게 중국내정에 간섭할수 있는 언턱거리를 줄수 있다고 보고 겉으로는 “간민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혐조하고 지지하는척하면서도 실지로는 감독, 간섭, 단속하였다.
  
1914년 3월 원세개는 지방련성자치기관을 철페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 이에 근거하여 길림동남관철사서에서도 포고 11호를 반포하여 “간민회와 농무계가 모두 자치성격을 띤 조직이므로 즉시 해산”할 것을 선포하였다. 연변조선족의 반일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놀던 “간민회”는 이렇게 력사의 무대에서 정치적막을 내리게 되었다.
 
9. 서전서숙과 반일교육의 터전

 

룡정에 뿌리내린 반일교육의 불씨 일제의 문화침략을 반대하는 불길로
  
서전서숙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동쪽구석에 두아름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씌여져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일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신학교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 있다.
  
기념나무 곧바로 뒤에 정자가 있는데 정면 웃모서리에 “리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다. 정자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쏘련홍군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가 세워져있고 그 중간에 바로 자연석으로 다듬은 “서전서숙”옛터 유적지기념석비가 세워져있다. 석비 정면에 “서전서숙”이라는 네글자가 한자(漢字)로 새겨져있고 반듯이 놓여진 다른 돌에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1906년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開塾하였다.
  
1995년4월15일 룡정 3.13기념사업회
4월4일, 일요일이면서 청명날이여서 그런지 교정은 유난히 조용했다. 조무래가 몇이 운동장 저쪽에서 무슨 장난에 심취되여있는지 쪼크리고 앉아 재잘거릴뿐이였다. 정자의 콩크리트바닥에 아무렇게 터버리고 앉은 전임 룡정시문련 주석 김재권선생은 고즈넉한 교정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가 자신이 펴낸 룡정시관광지점안내서 제1권 “유서깊은 해란강반”을 펼치더니 당시의 서전서숙을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깔끔한 초가 앞마당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총총히 걸어나오는데 포도넝쿨로 보이는 바자기둥에 “瑞甸書塾”이라고 새긴 간판이 보기 좋게 걸려있는 사진이였다.
  
“서전서숙은 중국조선족지역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신학사립학교인데 비문과 패문에 새겨진바와 같이 1906년 <헤그밀사사건>때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이름을 떨친 저명한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선생과 갈라놓고 말할수 없지요. 리상설선생은 1870년12월7일, 조선 충천북도 진천고을덕산에서 태여났는데 조선왕조의 부승지(副承旨)로 리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적 있는 리룡우의 양자로 들어가 리희영, 리시영, 려조현 등과 리제촌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후에는 류린석에게서도 학문을 배웠습니다.”
  
김재권선생은 박밀 듯 리상설지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일지사 리상설
리상설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1905년 “을사매국조약” 이 강제로 체결될 때 리조 의정부의 참찬이였다. 그는 고종(高宗)의 고문인 헐버트박사와 사귀면서 언어, 프랑스어를 배웠고 구미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지식도 습숙(習熟)했으며 천주교, 불교, 유교 등 종교철학과 천문학, 지리, 고등수학, 법학 등도 습득하여 당시 학계의 권위자로 되었다. “20세때에 벌써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어 <문행남하위관(文行南下蔚官)>이라는 찬송까지 듣게 되었다. 그후 그는 승정원 비서감, 비서랑, 성균관 교수, 성균관 관장, 탁지부 재무관 등 관직을 지냈다. 그는 고종에게 일제의 침략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였다. 그래서 당시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까지 세상에 전해여진 반일의사였다.”(일목 “조선족지구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반일학교 <서전서숙>”)
  
1904년6월, 리상설은 동지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 회장직무를 맡았다. “대한협동회”의 회장단은 탄탄한 독립의사들로 무어졌는데 부회장은 “헤그밀사사건”때 화란 헤그에서 일제의 작간으로 제2차만국평화회의 참가를 거절당한후 이에 격분하여 자결(화병으로 사망했다는 일설도 있다)한 리준이였다. 총부에 정운복, 평의장에 리상재, 서무부장에 리동휘, 편집부장에 리승만, 지방장에 량기탁, 재무부장에 허위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던 1905년11월에 리상설선생은 의정부 참찬으로 발탁되였는데 곧바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옥에 갇히기도 했지요. 일제는 이등박문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통감부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략된 조선이 망국의 위기를 만회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상설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해보려고 민족독립의사들을 서울에 모이게 한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정자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리상설선생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말끈을 계속하여 풀었다.
  
그번 모임에서 민족독립의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 구체 지방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하기로 했다. 룡정은 조선족들이 집결된곳이기에 반일교육을 진행하기 편리할뿐만아니라 북으로는 로씨야와 가까이 있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편리했고 조선과는 두만강 하나를 사이두고 있어 조선과 래왕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리상설 등을 선봉으로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1906년 4월 18일(음력) 리상설은 일본경찰의 감사를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리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도착, 그 길로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리상설과 리동녕은 정순만(즉 왕창동), 황달영(즉 전공달), 김우용(즉 김동환), 려조현(즉 려준), 박정서(즉 박무림), 홍창섭 등을 만나 연변에 나가 교육진흥사업을 밀고 나가기로 협상했다.
그들은 그해 10월에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룡정촌에 와 자리잡은 후 리상설의 자금으로 룡정기독교 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집을 사 “서전서숙”을 창립하게 되었다.
  
반일민족교육의 요람
학교경비의 대부분은 리상설선생이 개인재산을 털어 해결하였다 한다. 초대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운영을 맡았는데 제일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반일을 취지로 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리상설은 직접 “산술신서” 상, 하권을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에게 교수하였고 황달영은 력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상술과를 려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다 열렬한 반일민족운동가들이였기에 모든 수업에서 반일애국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제에 대한 비할바 없는 증오로 충만되였음을 1907년9월16일 통감부간도파출소 소장 사이또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황제가 양위하였다는 소식이 이곳(연변)에 전하여오자 교직원들과 년령이 많은 학생들은 모두 슬피 울었다. 그중 왕창동(정순만교원)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는 옷을 찢고 모자를 땅에 팽개치면서 분개해하였다.”
“간도서전서숙와산실록”에도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헤그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현규환선생은 자신의 저서 “한국류이민사”에서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서술하면서 간도한인 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륙군중좌 사이또 스에지로와 사무관 시노다 지사꾸 등을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도자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리상설은 산책을 하려고 문을 나서려 하다가 이자들이 온 뜻을 묻게 되었는바 일행은 상업시찰도중에 들렸다고 하였다. 때는 점심시간이였으므로 가지고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더운물과 그릇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수 없다 하며 랭랭히 이를 거절하고 리상설의 경위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일행은 할수 없이 강역에 가 강물로 목을 추겨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간도문제의 회고”를 쓴 사이또의 수행사무관 시노다 지시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청사를 앉힐 정당한 자리를 찾기 위하여 한 학교에 들렸는데 교장으로 보이는 조선인신사가 불손한 태도로 우리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불손한 태도를 취하던 신사가 바로 우리나라를 놀래우고 또한 리태왕의 퇴위를 반대하던 리상설임이 판정되였다.”
  
1907년4월, 고종왕의 밀서를 갖고 리상설의 동생 리상익과 리준이 리상설을 찾아왔다. 밀서의 내용은 5월에 열리게 되는 화란의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리준, 리위종(로씨야주재 공사 리범진의 아들)과 함께 수석특사로 참가하라는것이였는데 고종의 친필밀서였다. 리상설은 리준, 리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로씨야에 가 로씨야주재 한국공사 리범진과 상의한 끝에 로씨야의 니꼴라이황제와 련계하여 로씨야대표의 알선으로 만국회에 참가하려 하였다. 헤그에 이른 이들은 일제의 작간으로 회의참가를 거절당했다. 이에 격분한 리준은 자결로 반항했다.
  
“리상설은 그 길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다 다시 울랄질보스또크로 돌아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1910년 권엽회를 설립하여 사업진흥에 애쓰면서 하바롭쓰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여 사무쳐오는 통분으로 침식을 잃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코디스크로 옮겨 신음하다가 1917년 음력 2월9일 눈을 못감고 천추의 원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재권선생의 비통에 찬 목소리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을 떠나면서 숙장을 려준에게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그해 8월, 통감부간도파출소가 룡정에 세워졌다. 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지어는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하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에서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련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으로 1907년9월경 페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塔道溝)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 후 3개 반 74명을 졸업시켰다.
 
10. 명동과 명동학교

 

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의 요람
  
명동의 5대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 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董閑)이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던 것이다. 1899년2월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4대가족 142명이 하루사이에 여기에 이사왔다. 그때부터 비둘기바위를 선바위로 이름을 고쳤는데 아마 민족의 강한 절개와 굳은 신념의 표현이였을 것이다.
  
선바위에 오르면 오랑캐령에서 발원하는 륙도하, 량켠의 마을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장재촌, 동거우, 룡암촌(지금의 명동촌), 중영촌, 성교촌, 퐁락촌, 수남촌...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김약연을 위주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바라보노라니 떠날 때 들려주던 연변대학 력사교수 박창욱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박교수는 5대가족에 대하여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남종구는 종성5현의 한분인 남명학의 손자인데 이주시엔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는 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제자인 김약인을 따라 명동지구로 이사해온 것이다.
  
김약연은 일족 31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 처음에는 경제형평이 너무도 빈궁하여 땅도 없었으나 동생 유연이와 함께 7도구의 산골에 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고로 동한지구의 집과 림야를 사 1901년 규암재를 꾸렸다.
  
김하규는 일가족 63명과 함께 명동에 이주, 명동마을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병규는 일가족 40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하여왔다. 로력이 많고 재력이 있어서 4대가족중 제일 부유했는바 룡암촌과 중앙촌에 이르는 넓은 벌을 가지고있었고 대사동에도 밭과 가산이 있었다.
윤하현은 1900년에 명동을 이사하여왔으니 4대가족 집단이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부친 윤재옥의 인솔하에 1886년 종성에서 광개향 자동에 이주하여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았다. 후에 일가족 18명을 거느리고 명동으로 이사와 룡암촌에 정착, 토지와 가산이 꽤 되었다.
  
“명동에 집단 이주한 5대가족은 북부조선에서 빈궁하여 살길을 찾아온 기타 류랑민과는 달리 세대로 내려오면서 관북에서 변경방술에 종사하던 무반출신의 후손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종성5현의 후예들이거나 문하사람으로서 학식이 있고 다소나마 재력도 있는 유학자들이였지요. 그들이 집단 이주한 목적은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 개간하여 잘 살아보자는 것이였고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수 없으니 중국의 연변땅에 가 조선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 새 살림을 하자는 것이였지요.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동학교  
선바위에서 내려 륙도하를 거슬러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장재촌이다. 장재촌마을 뒤산기슭에 멀리서도 유표하게 보이는 봉분 세 개가 있다. 김약연과 부인 안연, 장자 김정근의 묘소이다.
1901년 김약연은 자기 동생과 함께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한족집을 사 규암재란 서재를 꾸린 다음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 뒤를 이어 대사동에서는 김하규가 소암재, 중영촌에서는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1908년 명동에서는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려고 규암재, 소암재, 중영촌 함한서재를 합쳐 명동서숙을 세웠는데 룡정의 서전서숙의 근대지향인 반일민족교육방침을 계승했다. 세 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할수 잇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주위의 마을을 망라하여 명동이라 통칭했는데 “ ‘밝은 조선민족’의 새 민족공동체라는 뜻”(박창욱)이다.
  
1909년 북간도교육단 단장 정재면이 명동에 왔다. 그의 영향하에 김약연 등은 근대화한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라 개칭하였으며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최봉기를 서기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으며 유가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였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리희순, 정신태,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여자민족학교를 병성했다. 그리고 마을에는 야학부를 꾸려 어른들의 문맹을 퇴치해주었다.
  
장재촌을 지나 계속 걸으면 길옆에 “윤동주생가”라고 새긴 자연석으로 된 비석비가 한눈에 안겨온다. 새로 복원된 명동교회당이다. 교회종각이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의 종교적분위기가 다분이 안겨오는 교회당이다. 마당 한쪽의 기와비각속에 김약연공덕비가 모셔져있었는데 공덕비는 모진 세월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있었다. 웃모서리가 사정없이 끊기여버린 것이다. 교회당옆에 마을의 정미소가 있고 정미소 왼켠에 난 길에 들어서면 금방 윤동주생가에 닿을수 있다. 8간 기와집으로 된 윤동주생가 마당은 언제보나 깨끗하다. 몇 년전에 찾아왔을 때만 하여도 물을 길어 마셨댔는데 우물은 작년 장마에 꺼져버려 볼품없이 되어 있었다.
  
명동학교자리는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해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밭으로 쓰고있었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것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중학부였다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의 검)이 깃 차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쓸쓸한 터밭을 향해 서있을라니 “명동학교교가”를 부르면서 발걸음도 씩씩히 군사훈련을 하던 열혈청년들의 기세 드높은 목소리가 귀전에 울리는 것 같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하고있었다. 조선어문에 있어서 민족 글과 말을 알게 하는 것은 민족문화이 향상과 보급의 기초이며 문화 향상과 보급은 민족생존과 실력양성의 첩경이라고 인정되였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대한사람”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참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은 력사과작문에서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는데 이는 교장 김약연을 위수로 한 학교의 전통으로 되었다.
창가 역시 명동에서는 조선어문과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였는데 창가는 민족의 존엄성과적에 대한 저항정신을 제고시키는데 작용이컸다.
  
체조는 병식체조를 말하는데 앞으로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로 되었고 학생들을 일정한 군사기초지식이 잇는 반일무장투쟁의 결사대, 전위대로 육성하기 위한것이였다.
민족의식에 대한 제고는 일제에 대한 증오에서 깊이 표현되였다. 교장은 “日本”을 “曰本”으로 또는 “倭놈”으로 불렀고 학생들도 따라했다. 후에 중국의 비행사로 된 서일포는 자기의 이름자에 잇는 日자를 曰자로 고쳐 서왈포로 고쳤다. 학교의 명절에 사용하는 만국기에는 태극기는 있으나 일장기는 없었고 지리부도에도 조선을 독립국가로 여기면서 일본본토와 색깔을 달리 색칠했다. 명희선교원은 가끔 옷을 거구로 입고 다녔는데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는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1910년부터 1925년에 명동중학교가 페쇠되기까지 15년간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들중에서 저명한 반일인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쟁 투사들이 나타났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3.13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많은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을 위주로하는 의사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한 송산우,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다. 20년대후에도 많은 인재들이 나타났는데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비행사 서왈포,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국내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행동이 곧 나의 유서"
“김약연목사님은 언제나 조용하신분이였습니다.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그런분이시였어요. 언제나 한복차림을 정히하고 넓적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구변과 웅변에 능하셨고 사리가 밝고 인정스러운분이시였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요 목사님이 날을 업어주었어요. 목사님은 남을 욕하는 법이란 없었답니다. 그분이 교장으로 계실 때 강의하시다가도 누구든지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고 자기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데요. 학생을 책망할 대신 자기가 강의를 잘못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했다는겁니다.” 명동학교교장으로 일히다 퇴직한 김재현씨의 말이다.
  
유가(儒家)사상을 숭배하던 김약연은 신앙마저 바구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들의 영향으로 하여 유교만 고집하던 민중들은 신문화를 접수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는바 1913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와 학교가 병립된 것이 36개소, 그 영향으로 세워진 사립학교가 62개소나 되었다. 김약연이 쓴 “동만료회 30년 력사”라는 글에는 “3국전도회의 본부가 명동에 있다보니 각 교회와 학교의 임무가 거의 전부가명동학교 출신으로 충당되였다”고 씌여있다. 이런 것을 미루어보아 연변에서의 기독교문화의 전파, 기독교를 통한 사립학교와 신문화의 발전은 명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김약연은 서양문화인 기독교를 접수하면서도 민족의 리념, 사상과 의지만은 잊지 않았으며 민족정신을 언제나 주되는 위치에 놓았다.
“명동이 중국조선족문화의 중심지로 되게 된 것은 김약연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때문입니다.”박창욱교수는 김약연에 대한 찬탄을 아기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무진장했던 김약연은 무슨 일에나 앞장섰다 한다. 나무를 메여도 세사람몫을 담당했고 기와나 벽돌을 구울 때에도 힘든 일을 남먼저 하면서 기술을 제자와 마을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배워주었다. 후학들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자신들의 토지가운데서 10/1의 제일 좋은 토지를 학전(學田)으로 바쳐 공동소유로 하게 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8만평으로 증가되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거의 전부 공동체에 바쳤다.
  
반일의사 안중근, 구춘선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구국의 방도를 토의하기도 하고 독립의 꿈도 무르익히기도 하였다. 일제가 명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명동을 “불령선인의 소국”로 간주하고 감시와 취체를 늦추지 않던 1919년 3월21일, 김약연이 간도대표로 로씨야의 니고리스크에 파견되였다가 돌아와보니 일본경찰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러나 청나라에 입적한 김약연은 청나라당국에 의해 2년동안 연금되여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수 있었다.
  
1922년 연금에서 벗어난 그는 어느덧 55세의 나이가 되었다. 반일민족운동은 일제의 미친듯한 토벌로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사회주의 시조가 바야흐로 일고있었다. 1924년에는 자연 재해로 하여 경제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룡정이 새로운 문화도시로 된 형편에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상론하여 중학교를 은진중학교에 넘기기로 하고 소학교만 명동에 남겨두었다. 김약연은 2년동안 정재면, 구춘선, 마진 등과 련계를 맺어 간도국민회를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29년 61세의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가 1년간 수학하고 목사로 된 다음 명동으로 돌아와 명동책임목사로 되어 기독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1937년 룡정으로 이사와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학교의 리사, 리사장으로 있다가 1942년 광복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
  
김약연의 제자 림재준은 스승을 이렇게 찬송했다.
“규암선생의 일생은 맹자가 수양했던것과 가까운바 담담하나 싫지 않고 간단하고 고상하며 온화하면서도 리지적이였다. 선생의 일생에서 먼 것은 가까운데서 비롯됨을 알수 있고 그 행동에서 결백함을 알수 있으며 사소한것에서 현명함을 알수 있다.”
 
11. 룡정《3.13》반일운동

 

노호하는 3만 조선족군중 부패군벌과 맞서고 한족반일군중들도 조선족과 어깨 겯고 싸워
  
"3.13"반일의사릉
반형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3.13”반일의사릉은 멀리에서도 유표하게 알린다. 하얀 비석이며 잘 정리되여있는 묘들을 가쯘하게 가공된 석재로 둘레를 쌓아올려 보기에도 한결같이 정연했다.앞줄에 모셔진 묘소가 9자리이고 뒤줄에 모셔진 묘소가 4자리였다.
  
기념식비정면에는 한자로 “3.13반일의사릉”이라고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1919년 3월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 정책에 저항하여 일떠나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혁명투쟁이다. 동월 17일 룡정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렬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방당국의 잔폭한 죄행에 항의하였蔑굔?비문과 19명 렬사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들로는 채창현(蔡昌鉉 충렬대 지휘자), 공덕흡(공덕흡 충렬대 기수), 박문호(朴文鎬), 김흥식(金興植), 정시익(鄭時益), 현봉률(玄鳳律), 김승록(金承彔), 김태균(金泰均), 장학관(張學觀), 김종묵(金鐘黙), 허준언(許俊彦), 김병영(金炳榮), 박상진(朴尙鎭), 최익선(崔益善), 현상로(玄相魯), 리유주(李裕周), 차정룡(車正龍), 원인선(元仁先), 리균섭 등이다.
  
룡정 “3.13”반일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만든 석비를 어르쓸면서 입을 열었다.
  
“1989년 한국 동아일보 문화부 부장 리영철씨가 <3.13>반일운동좌담회에 참가하고저 왔을 때 이묘소에 대해 물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하반년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수십차의 답사를 거쳐 합성리의 방청화(당시 81세)로인에게서 우연히 <만세묘지>가 있었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묻은 묘소라는것이였습니다.”
  
그 로인을 앞세우고 고증한 결과 바로 최근갑선생이 애써 찾던 묘소였다. 하여 1990년 4월 10일에 확정하고 5월19일에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추모회를 열었다.
“당시 주당위 장진발부서기가 힘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잊혀지지 않습니다. 장진발부서기는 ‘항일하다 사망된 사람은 민족을 불문하고 기념할수 있는바 이는 력사유뮬주의에 부합된다’고 지시했지요.”
이 자리에 안치된 렬사들은 모두 14명이였는데 후에 한분을 친척들이 딴곳으로 이장하여가서 지금 13자리이고 5명은 그 당시 저마끔 안치했다고 한다. 3월 17일까지 5일장을 보았는데 4000여명 군중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길손들이 다니면서 추모하라고 이곳에 모시것 같습니다. 후에 추모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나 일제가 공공연히 간섭하고 제지시키는 바람에 이 황페한곳에서 쓸쓸히 지냈지요. 가슴에다 안장한 것이 아니라 봇나무껍질에 감아서 모셨더군요.”
  
최근갑선생은 “3.13”반일운동은 물론 조선의 “3.1”반일봉기를 지지성원하는 연변인민들의 대규모적군중운동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떠올리였다. 제1차세계대전중인의 (民族自決主義)에 자극받아 1919년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자결주의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그해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여 온 겨레가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본관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210개 지방의 1500여개 단체들이 일떠났는바 동원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