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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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만원 탈취사건

 

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지막한 언덕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奪取十五萬元事件遺地”라고 새겨져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백양나무가 서있지만 옛날에는 버들방천이였지요. 바로 저기에 동량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제법 주막집까지 있었습니다.”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마을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페촌되여버린 마을자리에는 나무와 잡초가 무성할뿐이였다.
  
“<3.13>운동에서 희생된 동지들이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철혈광복단성원들은 자나깨나 무기를 갖춰야 하겠다는 생각이였지요.”
철혈광복단 단원인 최봉설, 림국정, 한상호는 무기를 갖추기 위해 로씨야에 건너가려고 작심했다. 이에 그들의 부친들은 자래우던 송아지를 팔아 려비를 마련해주면서 어떻게 하나 총을 구해가지고 오라고 고무해주기도 했다.
  
로씨야에 건너간 세사람은 막로동판에 뛰여들어 돈을 벌었다. 돈이 되는 일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았다. 무기를 사기 위해 아글타글 돈을 모으면서 죽을 고생을 겪었다. 돈이 모아지자 그들은 권총4자루, 보총 2자루, 수류탄 몇 개를 사가지고 귀향했다.
  
“3.13”운동이후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가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그들은 무장근거지를 건립하고 군사훈련소, 사관양성소 같은 것을 대량 설립하여 군사인재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간에 있는 렵총과 재재식총을 거두어들여 재빨리 자신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씨비리에서 쏘련사회주의혁명을 무력으로 간섭하려고 쳐들어왔던 체코군단이 패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을 일본돈 30원에 마구 팔아버리고있었다. 이것은 군자금만 손에 쥐면 맘대로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1919년 여름, 연변지역의 유지인사들은 군자금을 모아 국민의회 군사부장이며 철혈광복단 간부인 김하석에게 주어 무기를 구입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여 2000여자루의 총과 수십만발의 탄알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수도중 무기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되는 바람에 아까운 무기를 몽땅 바다에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후과를 책임져야 했던 김하석은 연길현 와룡동에 있는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내에 군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철혀로강복단 단원들인 최봉설, 윤준희, 림국정 등은 빠른 기일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면 금융기관에 있는 조선족들과 줄을 달아야 했다. 그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이 조선은행룡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윤준희는 전홍섭에게 룡정총 예수교병원뒤쪽 공동묘지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띄웠다. 약속한 시간에 윤준희는 림국정과 함께 전홍섭을 만나서 상급의 지시와 군자금 모금정황을 소개한후 “일본놈들이 회령에서 룡정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속금액과 그 구체적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아주 손쉽게 해결할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홍섭은 자기도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 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그런던 1919년12월 그믐날 전홍섭은 끝내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룡정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가 다게다 지로우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새해 1월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15만원의 현금을 수송해오게 된다는것이였다. 전홍섭은 즉각 최이붕의 장인인 김하규를 통해 최이붕에게 비밀통지를 전달했다.
  
1920년1월1일, 전홍섭의 비밀통지를 받은 최이붕은 즉시로 윤준희를 찾아갔다.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4~5일에 있게 될것이요.”라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있는 쪽지는 너무도 돌발적이고 격동적이였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담숨에 와룡동에 있는 김하석네 집으로 뛰여갔다. 전홍섭의 쪽지를 받은 김하석은 윤준희와 최이붕더러 인차 명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찾아가서 거기에 대기하고있는 박웅세와 김준을 만나 행동계획을 면밀히 짜라고 지시했다. 1월3일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이붕, 한상호, 림국정 등 6명은 교동에 있는 김계하네 집에 집결하여 습격계획을 짰다. 습격지점을 동량어구로 정하고 행동편리를 위하여 여섯사람을 두 개 조로 나누었다.
  
비장한 격전  
1920년1월4일,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늦은 아침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이따금 개짓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는 동량리마을은 오늘따라 느닷없이 한가로와보인다.
권총, 포승, 철봉은 휴대하고 명동촌을 떠나면서 여섯은 사자산과 선바위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거사가 성공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저녁무렵에야 동량리어구에 도착한 이들은 한족 류충괴, 리수옥이 경영하는 주막에 들여 식사한후 두 개 조로 나뉘여 큰길옆 버들방천에 숨어 송금대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은행권수송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4일 아니면 5일이라 했으니 혹 래일 오는 것이 아닐가. 래일 다시 와서 기다려야 하는걸가. 대원들은 추위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기만 했다. 윤준희는 최이붕더러 한 개 소조를 데리고 계속 버들방천에서 기다리게 하고 박웅세, 김준과 함께 회령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시간후에 윤준희일행은 짐실은 말을 앞세운 적들의 수송대를 발견했다.
  
“수송대가 틀림없소! 김준형, 어서 최이붕소조에 소식을 알리오!”
윤준희는 간단히 명령하고 박웅세와 함께 길옆에 매복했다. 김준에게서 소식을 받은 최이붕일행은 인차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이 오는 방향을 향해 줄달음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들의 수송대는 거들먹거리면서 동량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수송대가 점점 똑똑히 알렸다. 은행권을 실은 말이 앞서서 오고 그 뒤로 우편물을 실은 말이 따르고있었다. 일행은 도합 6명, 룡정에서 파견한 은행원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순사 나가도모, 박연흡, 상인 진길풍 그 외에 우편원 하라가시이였다. 우편물을 실은 말과 은행권을 실은 말을 앞세우고 그 뒤로 진길풍과 나가도모순사가 말을 타고 따르고있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루구찌은행원과 박순사, 맨뒤로 하라가시가 따라오고있었다.
“땅! 땅!”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맵짠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제히 일본순사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와 상인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우에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말에서 떨어진 일본순사 나가도모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박웅세와 김준의 철봉에 맞아 당장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총소리에 놀란 말이 내처 앞으로 내달렸다.
“빨리 말을 잡아타오!”
윤준희는 소리치면서 은행권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최이붕도 달려와 우편물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15리 떨어진 팔포강 산중턱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조금후 한상호가 달려왔다. 마바리에 실은 흑색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셋은 환성을 터치였다. 10원짜리 지페 5만원, 5원짜리 지페 10만원 도합 15만원의 새 돈이 꽉 차있었던 것이다.
  
셋은 돈을 나누어가지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할 작정이였다. 한편 박웅세와 김준은 습격지점에서 자기들의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우편물을 실은 말을 몰고 윤준희일행이 떠난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일행은 간고한 급행군을 하여 새벽 3시경에야 와룡동에 다달았다. 그들은 와룡동 최이붕네 뒤산 가둑나무숲속 귀틀집에서 저녁 8시까지 늘어지게 잔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 류채구로 출발했다. 의란구에서 모든 준비를 갖춘 윤준희, 최이붕, 한상호, 림국정 등 4명은 김하석과 함께 1월10일 돈을 휴대한후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건이 발행한후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1월5일 룡정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도난사건을 사출해내려고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평강일대에 파견하여 조선족인민들을 검거 체포했다. 1월6일 일제는 일본경찰 36명과 지방순경 57명을 동원하여 와룡동을 수색하면서 도난사건의 실머리를 집게 되었다. 하여 최이붕의 종적을 찾아 사처를 수색망을 펼쳤지만 최이붕일행은 이미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난후였다.
  
일제가 윤준희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악에 받쳐 발광하고있을 때 이들은 신한촌에 머물러 있으면서 무기상들과 련계를 맺기 시작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기만 하면 갖고온 돈으로 3만여자루의 총을 살수 있었다.
무기구입을 책임진 림국정이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한 것이 끝내 화근으로 되고말았다. 엄인섭은 언녕 변질하여 울라질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 숨어들어 일제의 졸개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감쪽같이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일본정부는 현병대의 정보를 제공받은후 즉각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을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조선인반일투사들을 일망타진할 주밀한 계획을 세운 일제는 1월31일 밤 신한촌을 대검거하기 시작했다.
윤준희 등은 무기교섭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술을 마셨는지라 눕자마자 꿈나라에 떨어지고말았다. 한밤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는통에 잠을 털고 일어나 일행은 왁작대는 바깥동정에 정신을 차리고 준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박참봉네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있었던 것이다.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갑자기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먼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셋은 어쩔새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문곁에서 자고있던 최이붕이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하고 문을 박차고나가면서 앞에 서있는 일본군을 발길로 걷어찬후 나는듯이 달려가면서 키넘은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일본군헌병들이 최이붕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어깨에 총탄을 맞은 최이붕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맨발로 계속 앞으로 내처 뛰였다. 얼마 안가 이번엔 왼쪽발에 또 상처를 입었다. 몇 번이나 눈앞이 캄캄해나는 것을 참으면서 뛰고 또 뛰였다. 최이붕은 반일비밀공작원인 채성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하여 현장에 있던 일본돈 12만8000여원을 압수당했으며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고말았다.
1921년8월25일, 일제는 서울감옥에서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을 사형에 언도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림국정은 27세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이붕은 그후 “적기단”을 결성한후 단장직무를 맡고 쏘련과 연변에서 무장투쟁을 벌린 한편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14. 봉오동전투

 

일본침략군과 진행한 첫 련합작전 반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첫 승리
  
봉오동전투의 도화선
도문 일광산(해발 397.7메터)은 아름다운 산이다. 깎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 있는 일관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쳐준다.
  
일광산턱밑에 있는 마을이 유명한 삼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다. 간평 혹은 새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月新社)에 귀속되여있었다. 일광산에서 내려다보면 간평대안의 자琉또?마을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원래는 종성군에 소속)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돌아서서 바라보면 도문과 조선 남양이 지척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밑으로 법진령고개길이 뉘연히 누워있다.
  
1920년6월4일 아침 5시, 신민당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헌병군조 후꾸에 산다로이하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강양동습격전은 당시 연변의 각 반일단체들에서 진행하고있는 조선국내진입작전의 일환이다.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군경주둔지거나 경찰서를 습격하는 일이 련속 일어났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습격사건은 1650여차나 되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라고 한다.
  
그날 박승길부대는 돌아가고 걸만동방면으로부터 다른 한갈래의 반일부대가 강양동습격을 목표로 삼툰자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두만강남안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양동방면으로 향하다가 두만강북안의 항일군을 발견하고 총질, 이에 반일부대도 맞불질을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양동초소가 습격당하고 삼툰자마을에서 일본군종성수비대와 항일군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총격전을 벌리였다는 급보를 접한 남양수비대의 아라요시중위는 6월6일 오전 11시 자기소대와 야마모도헌병오장이 거느린 헌병을 포함한 17명을 거느리고 삼툰자에서 7~8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로 기여든후 범진령을 에돌아 삼툰자서쪽 작은 골짜기로 내려와 마을 뒤산을 점령하고 반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한 목적으로 삼툰자마을을 습격하였으나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자 악에 받쳐 마을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는 범진령을 넘어 반일부대 종적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일광산기슭에서 숙영하면서 대안의 후원을 바라고있었다. 밤 10시, 수십명의 무장한 반일부대는 삼툰자 서북쪽고지에 이르러 숙영하고있는 일군의 보초선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퇴각, 쌍방의 손길은 별반 없었다.
  
6월5일, 일본군 야스가와소좌는 조선주재 제19사단의 명령을 받고 보병 제73련대(라남)소속 기관총 1소대와 보병 제75련대(회령)소속 보병 1개 중대로 이른바 “월경추격대대”를 편성하여가지고 6월6일 저녁 9시부터 해란강과 두만강합수목에서 10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도강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광산에서 숙영하고 있던 아라요시부대는 안산방면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곧추 안산방면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헌병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보병 약 200명, 헌병 8명, 경찰 10명 합계 220여명이였다.”(최홍빈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봉오동을 진군하기 위하여 일본군추격대는 길 안내를 찾으려고 정찰병을 후안산마을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에 가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 모금대가 전안산 최명국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후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 와 등불을 밝혀놓고 금후 행동방안을 상의하고있었다. 일본군정찰병들이 후안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한집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누구의 집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 갑자기 뛰여든 일본군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 반일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쏴눕히고 집을 뛰쳐나와 북쪽 고려령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에게 불질하였다. 일본군은 항일군의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왔다. 전투는 2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진행된 준비없는 싸움이 였던지라 쌍방은 그다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일본군 1명이 죽고 독립군 1명과 최진삼의 처가 희생되였으며 마을사람 5명이 체포되였다.

일제와의 첫 겨룸  
물파란 호면에 주변의 산자락이 곱게 비껴있는 봉오동저수지, 멀리 초모정자산의 번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안겨온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곳이기만 하다.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이곳이 대일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가. 그번 전투는 전 중국에서 일제와 격돌한 첫 전투였다.
  
저수지뚝아래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시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6월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놓고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독아주었다.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중공도문시위 통전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
1993년6월7일
  
유적비밑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아직 콩크리트를 바르지 않은 비완성상태였다. 기념비왼켠에 름름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있는데 하늘을 날아오를 기상이여서 그제날 영웅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 것 같아 보였다. 한 아름으로는 안을 수 없는 보기에 끼끗한 소나무였다.
  
1920년6월7일 아침 4시45분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에서 최명국일행과 교전하다가 계속 추격하여왔는데 전위중대가 드디여 리화일부대의 매복권에 들어서게 되었다. 리화일부대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 후 쏜살같이 고려툰 뒤산 산둥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쪽을 후퇴해버렸다. 돌연습격을 받은 일제는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배해가지고 리화일부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추격하여 8시30분경에 하촌마을에 들어섰으나 이미 온 마을이 텅 비여있을때였다. 헛물을 켠 일본군은 골짜기를 따라 중촌으로 진격했다. 중촌에서 늦은 아침을 지어먹은 일본군은 계속하여 상촌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마구 총탄을 퍼부어 많은 살상자를 냈으며 한 농민을 길잡이로 상촌을 향해 진격했다. 낮 12시경 일본군 척후병들이 반일부대의 매복권내에 들어섰고 오후 1시경에 일군추격대 전부가 드디여 매복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상촌에서 일본군은 북동과 남동을 수색했으나 마을은 텅 비여 사람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그제야 독립군의 매복전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남동 앞골짜기로 하여 비파동으로 퇴각하려 시도하였다.
  
“땅!”
산골짜기를 찢는 맵짠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지휘관 한놈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총소리는 홍범도장군이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산과 동산에서 분노의 총탄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일본군은 두정의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산을 향해 돌격했다. 이때 서산지휘소에서 작은 붉은 수기를 흔드니 골짜기홈채기에 매복했던 허형근소대가 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허형근소대의 매복지점으로 돌격하고 다른 한갈래는 서산으로 계속하여 돌격해갔다. 이에 허형근소대는 접근하는 적들을 대응하는 한편 서산을 향해 돌격하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드디여 적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허형근소대를 덮쳤다.
  
이번에는 동산에 매복해있던 최명록부대가 허형근소대에 덮쳐드는 일본군주력부대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동서로 되는 교차사격권에 든 일본군은 황급히 퇴각하려 했다. 이때 남산에 매복해있던 신민단부대가 적을 향해 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동서남 삼면의 교차사격을 받게 되었고 남쪽의 퇴로까지 차단되였다. 일본군은 쩔쩔 매다가 병력을 집중하여 동쪽방향으로 퇴각로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때는 오후 4시20분경이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다란 우박이 폭풍과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빌어 흩어진 부대를 긁어모아 가지고 비파동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반일부대도 억수로 퍼붓는 우박과 비 그리고 전투에서 지쳤는지라 더는 추격하지 않고 싸움터를 수습한후 왕청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련합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자를 격파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의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는 또 연변의 반일무장부대들의 첫 련합작전이였다. 1920년3월 홍범도는 조선국내에 대한 진공작전을 효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대한의군단의 본영을 명멸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로 옮기고 당시 연변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와 손잡고 군무위원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회군과 련합하여 정일 제1사령부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최진동과 련합을 도모했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11일 홍범도, 최진동 등 북로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도합 4개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은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련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5월28일에는 대한의군단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련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사령부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두었으며 병력을 집결하여 강력한 조선국내진격을 계획하고 주요 간부와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광범한 대중들에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무장을 들고 굳게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침략자라도 격파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15. 《훈춘사건》

 

출병구실 만들기 위해 조각한 가짜사건 세상을 놀래운 경신년 대참안의 도화선
  
음험한 획책
“일제는 연변반일무장대오가 저들 정규군을 참패시킬만큼 력량인 줄 몰랐지요. 봉오동전투후 일제는 깜짝놀랐지요. 반일무장대오를 업신보고 제멋대로 봉오동골로 진격했다가 호된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대량의 정규군을 연변에 파견하여 항일무장대오를 소멸할 획책을 꾸미게 됩니다. <훈춘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훈춘사건”을 설명하면서 “훈춘사건”은 오래전부터 꾸며온 음모였다고 말한다.
  
“3.13”운동후 조선족지구에 건립된 수많은 반일무장단체와 그들이 진행한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5월 상순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 장작림과 일중공동“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과 간도일대의 조선족반일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1920년7월16일, 봉천 총령사관 아까쯔까총령사는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측 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고문 사이또가 동행하며 중국군대가 토벌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도 참가할수 있게 할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길림성당국은 일본군의 출병은 주권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로 인정하고 단연히 거절하였으며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일제는 근본적인 토벌을 가하려면 일본군을 주체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직접출병의 계기를 마련하는 음모를 꾸미였다.
  
피로 물든 훈춘성
1920년9월12일 아침 5시경,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고요한 훈춘성의 정적을 깨뜨렸다.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지대에 둥지를 틀고 있던 진동, 만순을 두목으로 하는 훈춘현성에 쳐들어왔다. 마적두목 만순은 친일 비적 코산의 영향밑에서 활동하고있으면서 코산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는자였다. 만순은 코산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었다. 코산은 일본군 간첩인 야마모도 가꾸꼬를 애첩으로 Ⅸ??살고있었다.
이날 동북쪽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경찰서를 진공했고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륙군병영과 헌병병영을 진공, 현공서를 포격했다. 소규모의 마적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민간에 덮쳐들어 살인, 방화, 략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마적들은 가는곳마다에 불을 놓아 훈춘시가지는 삽시에 화광이 충천하고 자지러진 총소리로 아비귀환이 되고말았다. 당시 훈춘시내에는 관병 270여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지라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졸히 응전할뿐이였다. 길림륙군 공병영 영장 정기창령사관과 외국인상점을 보호했고 륙군 제2려 제2퇀 제2영 영장 오은성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어 서쪽성문과 북쪽성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진격했지만 마적들의 맹렬한 사격으로 후퇴하고말았다.
  
전투가 2시간 남짓 진행된 다음 마침내 마적들은 대오를 거두어가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길장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일본경찰서, 령사관은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랍치된자는 화인 80여명, 한인(韓人)6명이며 200여간의 가옥이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다.
  
“일제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훈춘습격이 아니였습니다. 출병구실을 만들자는것이였지요. 그런데 마적들은 일본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일본놈들은 안달아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제1차 ‘훈춘사건’이 일어난지 20일밖에 안되는 10월2일 새벽4시경 만순을 괴수로 하는 마적무리들은 진동패거리와 합세하여 4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훈춘을 대거 진공했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2차“훈춘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가지고있는 마적들은 동서 두 갈래로 나뉘여 성문에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면서 성안을 마구 포격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온 토비들은 시킨 듯이 곧바로 일본령사관에 달려들었다. 비록 중국경찰들이 령사관을 호위하고있었지만 마적들의 기관총과 양총의 화력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장을 폭파한 마적들은 물밀 듯 쓸어들어 령사관에 불을 질렀다.
  
동대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관병들의 방선을 돌파하고 상부지에 돌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이고 닥치는대로 빼앗고 불을 질렀다. 4시간 남짓 발광하다가 100여명의 사람을 랍치하여가지고 호록산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날 마적들은 일본령사관 경찰서장과 조선인 순사1명, 재향군인 1명을 죽인 외에 일본인 남녀 10여명을 살해했다.
  
"경신년대학살"의 도화선
“제1차 ‘훈춘사건’이 있은지 20여일만에 제2차 ‘훈춘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또 제2차‘훈춘사건’에서 아무런 ‘경제적’의의도 없는 일본령사관을 들이쳤다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음모라는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심영숙“훈춘사건”)
일제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비적들속에 로씨야홍군, 중국군대, 불령선인들이 있었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여러 면으로 출병구실을 조작하였다.
  
“훈춘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조선 라남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명령을 내려 온성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아베대대를 경원군 훈융에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베가 거느린 보병 한 개 중대와 기관총 한 개 소대가 제일 먼저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려단장 이소바야시가 령솔하는 이소바야시지대, 보병 제76련대장 가무라가 령솔한 가무라지대, 제37려단장 아즈마가 령솔하는 아즈마지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 왕청, 룡정으로 진격하였다.
  
10월9일, 일본 륙군대신은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관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훈춘사건”은 마침내 “경신년대토벌”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군은 반일단체들이 북만에로의 탈출을 견제하기 위해 할빈에 주둔하고있는 관동군 제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거느리는 야스니시지대를 파견하여 해림을 중심으로 한중동철도연선에서 북을 철퇴하는 반일부대들을 막게 하였다. 일본군은 또 로씨야 씨비리에 출병하였던 제11사단의 보명 한 개 대대, 기관총대, 기병1개 소대, 공병 반개 중대의 병력으로 투문자지대를 구성하고 훈춘동부의 중로변계에서 반일무장부대가 로씨야 연해주일대로 이동하는 것을 제지할 임무를 맡기고 10월 19일 국경을 넘어 훈춘 춘화지구의 초모정자, 토문자 등지에 진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제13사단은 하네이리대좌의 지휘밑에 보병1개 대대, 기병1개 련대, 포병 1개 중대로 하네이리지대를 구성한후 10월 19일과 20일에 국경을 통과한후 로흑산부근으로 진격했다. 이밖에 연해주에서 철퇴하는 제14사단 제28려단 4000여명 일본군은 로씨야 포세이트에 등륙, 빈해성을 거쳐 훈춘에 침입하여 제15련대를 훈춘과 룡정에 남겨 “토벌”대를 강화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자가, 룡정과 조선 회령을 거쳐 나람으로 돌아갔다. 10월 13일 제19사단 제73련대의 2개 중대가 두만간을 건너 반일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외 진감시킨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였다.
 
16. 청산리대첩1

 
독안에 든 침략군 삼단처럼 쓰러지고 반일부대 백운평서 첫 승리 맞아
  
결전전야
화룡시 부흥향 청산리마을에서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커다란 베개마냥 뭇산의 두령으로 덩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마을어구의 작은 산언덕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으로 다듬어 세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앞면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일제와 격전을 벌리고있는 반일무장전사들의 군상이 새겨져있다.
  
청산리마을에서 해란강상류를 향해 4~5리쯤 올라가면 유명한 백운평 참안지가 나타난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기초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지금은 황페한 쑥밭으로 되어버렸고 벌목공들이 거처하는 귀틀집이 있을뿐이지만 당년에는 몇십호가 오붓하게 모여살던 조선족마을이였다.
  
가리마처럼 뻗은 산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오르노라면 청고운 개울물소리가 더욱 청쾌한 것 같다. 이렇게 6-7리 더 올라가면 발밑 낭떠리지 아래에 맑은 개울이 여울치며 흐르는 작은 소를 발견할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흐르던 개울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었다고 하여 직소택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소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혼쌀이 난 일제 륙군소좌 야스가와가 지휘하는 73련대 선봉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에 의해 전멸되다싶이 한곳이여서 더 이름을 떨친곳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던 반일무장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에 대비하여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의 반일무장부대의 이동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봉오동 전투후 명월구(묘구)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홍범도가 지휘하는 반일부대는 안도현 백두산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21일경에는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이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있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은 8월31일 안도현방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말경에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군부는 초모정자와 탁반구를 거쳐 9월말경 왕청현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였다. 10월 2일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10월 14일 간도침략을 선언하고 16일에는 연길도윤에게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반일부대 “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통고하였다.
  
룡정, 국자가, 투도구 방면의 “토벌”을 책임진 아즈마지대는 10월 17일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어랑촌, 청산리부근에 주둔하고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18일에 부대를 나누어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와룡구 어랑촌부근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토벌”할 목적으로 부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되어 일본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청산리전역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둔 10월19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 수뇌자들은 묘령에서 일본침략군의 <토벌>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주전파와 피전파간에 론쟁이 붙었는데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이 력량을 보존하려면 절대 일본주력부대와 결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피전책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여 북로군정서군은 왕팔어구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저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쪽으로 철퇴하게 되었습니다. 부대는 이튿날 백운평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0월17일 아즈마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야마다련대는 좌우종대로 나뉘여 좌종대는 야먀다대좌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종대는 나까무라대대장이 인솔하고 이도구를 거쳐 봉밑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하고 좌우종대와 책응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백운평전투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 리범석은 김좌진장군의 지령에 좇아 직소부근에 부대를 배치,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적을 제어하면서 본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려 했다. 하여 교성대 200여명을 직소택량면에 매복시키고 리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게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이 포치한 매복진은 좌우 량켠에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끼인 골짜기는 20-30메터 되나마나하고 넓은곳이라야 40-50메터밖에 안되는, 매복전에 더없이 리상적인 장소였다.
  
때는 상강절기를 앞둔 마가을,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은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 추위속에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긴장한 마음을 도사려야 했다. 드디여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금빛해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창살마냥 비끼여들었다. 몸에 락엽을 뒤집어쓰고 지루한 밤을 보낸 전사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협곡 량켠 산기슭에 반일부대 용사들이 매복해있으리라고 생각도못한 침략군은 흔들먹기리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야스가와소좌가 이번에도 선발부대 한 개중대 90여명을 거느리고 죽음의 포위망속으로 기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서쪽2킬로메터 지점인 공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밤에 숙영했던 곳과 60여개의 불무지흔적을 발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줄로 쭉 늘어서서 북로군정서군의 행정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땅!”
연성대장 리범석의공격을 알리는 첫 총소리가 산곡간을 찢으면서 맵짜게 울렸다. 앞뒤 산마루에 매복해있던 200여개의 총구에서 삽시에 불벼락이 터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들은 사면으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갈팡질팡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적들은 대응사격으로 발악도 해보았지만 반일부대의 매복지점을 판단할수 없어 헛총질만 할뿐이였다. 코앞에다 적을 둔 반일부대는 복수의 총탄을 여지없이 내뿜었다. 전투는 속결전으로 끝났는데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적군 90여명이 거의 소멸되다 싶이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이 제1제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제2제대에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할 것과 다음날 새벽2시전에 봉밀구 갑산촌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좇아 제2제대는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안도 로령으로 철퇴하는것처럼 하다가 급전환하여 밀림을 헤치고 북상하여 밤도와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청산리대참안
백운평전투에서 참패를 본 일본침략군 야마다련대는 반일부대가 안도현쪽으로 후퇴할 줄 알고 추격하다가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자 오후 2시에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와서 그 분풀이로 무고한 백운평백성들에게 “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은 모든 집을 불살라버렸고 보이는 사람마다 죽이였으며 지어 어린애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죽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 날 외지로 친척방문 갔던 두 사람이 살아남고는 다 살해 되였다고 한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 60,세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 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라면 그 당시 백운평에서 사흘동안 연기가 피여올랐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적들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해 수많은 조선족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죽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에 차 하는 말이다.
 
17. 청산리대첩2

 

신기한 전술에 속은 침략군 저들끼리 싸우고 홍범도 김좌진 배합작전해 우세한 적 물리쳐
  
완류구전투
어랑촌부근에 집결되여있던 홍범도련합부대는 천리봉을 중심으로 각 곳에 배치되여있으면서 군사훈련, 군인모집, 량식, 복장준비 등을 다그쳤다. 당시 홍범도부대 전사들은 누른색군복을 입고 붉은 줄을 뛰운 두리모자를 썼는데 완류구골짜기에서 일본놈모형을 만들어놓고 “쏴총”구령을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사격훈련을 했다.
  
홍범도부대가 어랑촌부근에 있다는 정보를 수집한 아즈마지대는 이도구로부터 곧추 어랑촌에 추격해온후 어랑촌부근에다 본부를 설치했다.
  
“아즈마는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21일 진공을 발동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천리봉에 은페시켰습니다. 홍범도장군의 일지에 의하면 21일에는 전투가 없었습니다. 22일 아즈마는 부대를 이끌고 남완류구로 들어갔고 천보산에 있던 이이노부대는 우회하여 홍범도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량쪽으로 협공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천보산을 떠난후 길을 잃은 이이노부대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22일 새벽에야 북완류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남북 두갈래로 덮쳐드는 일본군<토벌대>를 주동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완류구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홍범도장군은 앞뒤로 포위하려는 적들의 시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부대를 남완류구와 북완류구간의 량쪽 등마루에 배치하고 기다렸다. 이런줄도 모르고 일본군 아즈마지대의 예비대는 남완류구를 따라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찾아 골짜기로 올라왔다. 같은 시각 이이노부대는 남양촌숙영지를 떠나 이른 아침에 강을 건너 북완류구를 따라 들어왔다.
  
적들이 다가오자 홍범도장군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령마루 량측 산허리에 매복해있던 련합부대의 장병들은 두갈래로 덮쳐드는 적들을 향해 동시에 불벼락을 안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반격했다. 이렇게 아침 7시20분에 시작된 전투는 11시까지 4시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싸움이 한창 격렬해질 때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교묘하게 진지에서 살짝 빠져나와 아즈마지대 예비대의 측면에 피해서게 했다. 고지에 먼저 오른 적 예비대는 돌연히 북완류구쪽으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부대인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는 이이노부대를 도리여 홍범도부대인줄로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했다. 이리하여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어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쏘아댔다.
  
저들끼리 한창 싸우는 것을 구경하던 홍범도부대는 적 예비대의 뒤통수를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적 예비대는 홍범도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속에서 거의 전멸되여버리고 말았다. 홍범도부대는 적들이 미처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을 때 전투에서 물러나 봉밀구방향으로 철퇴했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련합부대는 7명이상의 손실을 보았고 적들은 400여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최홍빈) 400여명의 적을 소멸한 홍범도부대는 천수평방향으로 퇴각하다가 김좌진부대가 싸우는곳에 이르게 된다. 한편 완류구에서 적들끼리 물로뜯고 하던 일본군은 드디여 홍범도부대를 추격하다가 12시30분에 어랑촌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어랑촌전투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을 이끌고 밤도와 강행군하여 원 계획대로 10월22일 새벽 2시30분에 와룡구 갑산촌에 도착,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었다. 여기에서 김좌진장군은 일본군 한 개 기병소대 40여명(리범석의 회억에는 한 개 중대 116명이라고함)이 천수평에 주둔하고있다는 정보를 당지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은후 인차 천수평전투를 조직했다.
  
북로군정서군 려행단(제2제대) 80여명은 갑산촌에서 떠나 산발을 타고 천수동 남산에 이른후 적의 동정을 살폈다. 때는 아침 5시경, 적들은 반일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 것을 조금도 모른채 깊은 잠에 곤드라져있었다. 부대가 적을 포위하고 습격하려고 할 때 아군의 후방에서 누군가 부주의로 오발을 하였다. 총성은 적들을 깊은 잠에서 깨여나게 했다. 지체할수 없었던 려행단 전사들을 맹호마냥 마을을 습격했다.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들은 하나, 둘 반일부대전사들의 총탄에 맞아 나뒹굴었다. 이번 습격전에서 적 4명이 본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도망친외에 전부 소멸되였다.
  
도망쳐간 적 4명이 본부에 가 보고하면 대부대가 인차 공격해올것이라고 예측한 김좌진장군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된다고 판단하고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남짓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우선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고 주력부대는 야계골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아니나다를가 얼마후 적군 제27기병련대주력과 일부 보병들은 산포까지 동원해가지고 가노대좌의 지휘하에 천수동골짜기어귀에 나타났다. 반일부대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대량 섬멸했다. 그러나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 듯이 반일부대의 고지를 향해 진공했다.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하는 한편 본부가 있는 아계골로 퇴각하였다. 9시부터 진행된 전투는 반일부대와 일본군과의 고지쟁탈전이였다. 먼저 874고지를 차지한 반일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공격을 한체례 또 한차례 물리쳤다.
  
몇차례의 진공에서 실패한 적들은 일부 기병대로 반일군의 진지를 우회하여 반일부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려행대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고말았다. 전투는 계속되였고 점차 가렬한 백병전으로 번져나갔다. 아즈마소장은 기병 제27련대와 야포병 제25련대 제1대대의 병력까지 출동시켜 보병부대와 배합하여 작전하면서 발광했다. 전투는 점차 수량상, 장비상 절대적으로 적들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반일부대는 비전투원까지 동원되여 최후의 결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전투는 오전 11시를 이어 계속되였다.
  
12시30분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따라 추격하던 이이노부대가 이 전투를 당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전투에 투입한 일본군은 기병대 약 250명, 예비대 약 600명, 이이노부대 약 100명 합계로 1000명좌우였다.”(최홍빈) 반일부대전사들은 목숨을 내걸도 결사적으로 항격했으나 어쩔수 없이 점점 밀리우게 되었고 희생자도 늘어났다.
  
바로 이때 우측 산마루로부터 콩볶듯한 총소리가 울려왔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적들이 갑자기 쑥대넘어지듯 마구 쓰러졌다. 순식간에 적아간의 격전사태가 급변했다.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이 바라보니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련합부대 장병들이 적들을 향해 사격하고있었다. 완류구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동적으로 철퇴한 련합부대는 봉밀구방향으로 이동하던중 북로군정서군이 전투하는 야계골로 들어섰던 것이다. 홍범도부대는 완류구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지 않았기에 원래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홍범도부대는 야계골에 들어서자 김좌진부대가 차지한 고지 옆 그보다 좀 더 높은 산고지를 점령하고 김좌진장군을 향해 진공하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던 것이다. 북로군정서군의 장병들은 눈물겹도록 반가와 환성을 올리면서 적들을 무찔렀다.
  
홍범도부대의 참전은 김좌진부대에 대한 적들의 진공에 막대한 곤난을 주었다. 적들은 방법없이 부대를 분산하여 홍범도와 김좌진부대를 진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투는 저녁 7시 반까지 계속되였다. 전투장에 어둠이 깃들자 적들이 진공이 즘즘해졌다. 이 기회를 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의 련합군이 점령한 고지에 옮겨간후 어둠을 타 부대를 나누어 감쪽같이 퇴각했다.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가장 큰 전투입니다. 백운평전투를 서부전선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면 어랑촌전투는 대회전입니다. 보시다싶이 홍범도, 김좌진 등 반일부대의 주력과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들간의 대접전이였으니깐요. 그뒤를 이어 천보산전투, 만기구전투, 맹가골서고전투, 고동하전투 등 여러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이 모든 전투는 다 아군이 철퇴중의 전투였습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18. 청산리대첩3

 

고동하강반에서 일본군 또다시 녹아나고 반일부대 “반토벌”전서 대승리 거둬
  
백성들의 일편단성
“청산리전역을 비롯한 모든 반일무장투쟁은 연변인민들의 생사존망을 위한 일이였습니다. 일제가 연변에 침입하여 <토벌>을 감행한 것은 반일무장부대만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족에 대해 탄압하고 조선족들을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한것이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은 사명감을 안고 저들의 아들들을 반일무장부대에 보냈으며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각적인 행위였습니다.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 것은 또 조선족만의 리익을 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한족들도 청산리전역때 생명을 무릅쓰고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운선생은 청산리전역시 한족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이 반일무장부대를 위해 군자금과 식량공급을 부담했으며 정보도 제공하고 길안내도 나서주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조선족녀성들이 어랑촌전투때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총알이 귀전을 스치는 최전연진지에까지 음식을 날라다 준 사적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그녀들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음식먹을 시간여유가 없는 투사들의 입에 밥을 떠넣어주면서 격려했지요. 실로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사연입니다”고 하면서 격동을 금치못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형을 당시의 “독립신문”은 “녀자의 일편단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이 지방에 있는 부인들은 애국하는 일편의 적성(赤誠)으로써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위험을 모(冒)하고 탄우가 분분(紛紛)한 전선에 용진(勇進)하야 전투에 피로한 군인들을 공상(供償)하며 위로하였다.
어떤 군인들은 분전망식(奔戰亡食)하야 진작 응식(應食치)않은 시(時)에는 부인들이 울며 권하기를 제씨(諸氏)가 만일 차(此)를 식(食)치 않으면 우리는 사(死)로써 귀(歸)치 않게했노라 하야 기어이 취식(就食)하도록 하야 일반군인으로 하여금 큰 위안을 받게 하였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리범석도 부녀들의 이런 헌신적인 지원에 대해 자신의 회상기 “우등불”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계속되였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비발치는 총알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덩이 두덩이 동지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린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그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이 목숨 다 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 것을 잊은채 뛰고 달렸다.”
  
고동하전투
어랑촌전투를 끝낸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련합부대는 50명씩 소부대를 지어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맹개골시거우전투, 천보산전투 등을 벌리면서 비록 소규모였지만 모두 승전을 올리여 수많은 일본군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천보산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있던 일본수비대 한 개 중대는 북로군정서군에게 련속 2차례나 공격받았고 홍번도련합부대에게 1차례의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 되기도 했다. 하여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긴급증원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투중에서도 공동하전투가 가장 치렬했고 규모가 큰 전투였지요. 그리고 고동하전투는 전반 청산리전역이 마지막 전투입니다. 1920년10월25일 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진행된 이 전투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 이이노추격대의 야습을 다시 반격한 반야습전인데 많은 일본군을 섬멸했습니다. 이번 전투는 토벌군의 총사령인 일본군 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줴친 <홍범도, 김좌진 등 불령선인담을 근절>하겠다고 한 호언장담이 무너지고 토벌계획이 파탄되는 최후는 전투였습니다.”
  
고동하전투는 간고한 전투였지만 적을 통쾌히 무찌른 전투였다고 박창욱교수가 말한다.
홍범도, 김좌진 부대를 단숨에 섬멸하려했지만 처처마다에서 골탕을 먹은 일본군은 고동하방면으로 퇴각한 반일부대의 뒤를 미친 개마냥 쫓아왔다. 그러나 봉밀골안을 50시간동안이나 헤매이면서 골골마다 샅샅이 들췄지만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이에 악이난 일본군은 혈안이 되어 고동하기슭을 훑기시작했다.
  
고동하는 로령동남측에서 발원하여 화룡경내의 와룡을 거쳐 안도경내로 흘러들어가는데 송화강수계에 속한다. 고동하가 화룡경내로 흐르는 길이는 53.5킬로메터, 만족어로 물결이 사품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홍범도부대를 찾아 헤매던 일본군 아이노소좌가 인솔하는 추격대는 10월25일 밤 10시에 고동하곡(오동양차 남쪽, 지금의 고동하림장남쪽) 10키로메터 부근에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숙영하고있는 홍범도부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홍범도부대(북로군정서부대의 50여명을 포함) 350여명은 고동하기슭에서 일본군이 포위하여 오는줄도 모르고 고즈넉하게 숙영하고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모여 휴식하고있는 반일전사들의 모습이 우등불화강으로 하여 어두운곳에서는 너무 뚜렷이 알렸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인차 부대를 전투대세로 정돈하여가지고 2개 소대를 돌격대로 홍범도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하였다.
  
10시30분,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환한 화강속에서 아무런 준비 없었던 홍범도부대는 적들의 맹공격에 엄중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대원들을 재빨리 고동하기슭에 솟아있는 절벽가로 철퇴하라고 명령했다. 전사들은 비호마냥 날래게 절벽을 타고 올랐다. 반일부대가 차지한 절벽은 량쪽으로 고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