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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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동부전선

 

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나뉘여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현의 서쪽으로 기타 부대는 훈춘현과 왕청현 동북부로 이동했습니다. 일제는 동부의 반일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반일부대도 유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토벌에 맞섰습니다.”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동서 두 전선에 배치되였던 반일부대의 정황을 설명했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란 주로 홍범도부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및 기타 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주력군을 말한다. 동부전선인 훈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훈춘한민회와 신민단군이 중로변경에서 활동하고있었으며 원 기지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잔류부대와 각 단체 간부들이 잠복하여 활동하였고 왕청현 라자구와 로흑산 일대에는 독립부, 광복단, 의군단, 라자구의사부 등에 소속된 약 850명 가량의 부대원이 있었다.
  
박창욱선생은 동부전선이 전략상에서 매우 중요한곳이라고 피력했다. 동부전선은 반일부대들의 원래의 근거지였기에 그곳 민중들은 반일정서가 높고 또 조직화되여있었다. 동부전선은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이므로 반일단체들의 왕래가 쉬웠다. 당시 반일단체의 지도자들은 로씨야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족반일무장대는 로씨야혁명파의 세력범위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수 있었으며 그들과 배합작전하면서 일본군 및 백파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일부대는 일본군토벌이 심할 때에는 능히 로령으로 이동할수 있었다. 동부전선은 또 반일부대들이 로령과 련계하여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후방기지였다. 그러므로 일본침략군은 반일부대의 주력이 서부지구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부전선에 수많은 부대를 투입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하고 반일부대와의 련계를 단절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의 대량 투병
1920년10월3일 훈춘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우선 온성에 주둔하고있는 73련대의 아베소좌가 지휘하는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를 훈춘에 침입시킨후 얼마후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와 박격포 2문을 배속시켜 다시 침입시켰다. 이어서 19사단 38려단장 이소바야시소장이 지휘하는 75련대 제1,3대대의 4개 중대, 2개 기관총소대, 특종포병대, 통신반, 위생반 그리고 제20사단 39려단 78련대 우에사까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통신반, 위생반을 침입시킨후 다시 기병 27련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련대의 2개 중대, 공병 19대대의 1개 중대 등을 련이어 훈춘에 파견하여 이소바야시지대를 편성하였다.
  
1920년10월20일에는 기무라대좌가 지휘하는 제76련대의 제1,3대대 4개 중대와 2개 기관총소대 특종병대, 기병 27련대의 1개 소대, 거기에다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양수천자로부터 직접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에 침입하였다. 얼마전인 10월14일에는 반일부대의 북만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북만파견군 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1개 기병소대를 해림일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또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일부대를 토벌하며 반일부대와 로씨야혁명파간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대좌가 지휘하는 58련대의 1개 대대, 기병 17련대의 주력 1개 산포병중대, 1개 공병중대를 동녕현 삼차구의 대안에 집결시켰다가 10월21일 국경을 넘어 로흑산 라자구방면으로 남하하게 하였으며 10월19일에는 제11사단의 히데시마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 기병 1개 소대, 공병 2개 소대를 로령의 바라바시로부터 훈춘현 토문자로 파견하여 훈춘과 왕청현 동북변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일제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 28려단 주력(4000명)을 보세트에 상륙시켜 연해주의 연추로부터 훈춘에 보내 양수천자, 국자가, 룡정, 회령 등지를 경과하는 <위협행군>을 진행하면서 토벌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0월18일 28려단 15련대의 제2대대는 훈춘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제3대대의 2개 중대는 룡정에서 경비를 3대대의 1개 중대는 회령의 19사단 사령부의 경비를 각기 담당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일제는 각 지대에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일본군의 토벌을 협조하게 하였고 따라서 경원수비대병력과 헌병, 경찰을 포함한 50여명을 출동시켜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동부전선에 1만여명의 침략군을 투입시켜 훈춘과 왕청을 사면으로 포위하고 토벌을 감행하였다.
  
동부전선에서의 반토벌전
동부전선에서 일본침략군은 만단의 준비를 갖춘후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10월14일부터 19일까지 이소바야시려단장의 지휘하에 아베, 마끼와 쥬지 등이 지휘하는 3개 토벌대는 훈춘현소재지의 동북쪽에 있는 훈춘하 상류, 서북쪽에 있는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밀강상류를 대거 토벌하였다.
10월22일부터 11월 초순까지 상기 3개 토벌대는 11사단의 히데시마지대와 함께 훈춘현과 왕청현변경으로 북상하고 양수천자에서 도강한 기무라지대는 직접 서대파, 십리평, 대감자 등지를 토벌한 기초우에서 배초구로부터 북상하는 이와바시대대와 함께 대왕청, 소왕청 등지를 토벌하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간의 련계를 차단, 동녕현 삼차구로부터 남하하는 13사단 하네이리지대와 호응하여 로흑산 라자구일대를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11월초순부터 1921년 봄까지 일본군은 훈춘과 왕청 등 현의 중요지점에 분산배치되여 부근 일대의 반일단체와 반일기지를 토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이미 기지를 떠나 다른곳으로 철퇴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로 반일기지의 파괴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을 일삼았다. 전투는 다만 반일부대의 이동과정에 진행, 잔류 소부대간의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인것이였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보다 력량이 박약한 동부전선의 각 부대들은 일본침략군의 토벌 제1단계 때 이미 왕청현 라자구, 동녕현 로흑산 또는 훈춘현 동북부로 대부분 철수하였다. 제2단계에 들어서서도 일본군이 라자구를 중점 토벌하자 반일부대는 동녕현 이북으로 철수하였거나 일본군의 후방에 분산 은페하여있다가 이들을 습격하였다.
  
10월23일 북로군정서 잔류부대는 십리평에서 일본군 이소바야시지대로부터 기무라지대에 편입된 아시다, 다까다 두 중위가 인솔하는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반일군철퇴를 막을 타산으로 금화골 산중에서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매복해있던 반일군은 적들이 가까이 오자 맹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제의 기록으로는 저들의 군대가 1명 죽고 2명 부상 입은 것으로 되어있다.
  
10월27일 라자구의사부군은 150여명 장병들은 로무주하골에서 다요기병소대, 아베대대의 1개 소대, 히데시마대대의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 등과 약 2시간가량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이날 오후 3시, 소바야시지대소속 아베대대의 다시로기병소위가 거느린 일본군 소부대 30여명은 로무주하골 어구부근에서 라자구의 사회의 최정국이 거느린 150여명의 반일전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아베대대주력은 라자구 태평구에서 토벌하고있었다. 아베는 부하가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1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금방 라자구에 도착한 일본군 제13사단이 하네이리지대 산하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가 전투에 참가하여 약 2시간동안이 격렬한 전투를 거쳐 소부대를 소멸하려던 반일부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북으로 철퇴하였다.
  
10월28일 일본군 76련대 이와오소소좌가 지휘하는 부대가 라자구에서 대황구로 돌아올 때 왕청현 장가구에서 반일소부대가 2차례 습격했다.
11월4일 훈춘한민회군 30여명이 훈춘현 삼도구 북쪽 39리 상거한 지점에서 일본군 제 78련대 우에사가대대를 습격, 전투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본군 이다소위 이하 5명을 살상하였다.
11월9일 훈춘한민회의 김운서가 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는 일본군 제75련대 쥬지중좌가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훈춘현 우두산 남쪽에서 습격, 1시간가량의 교전을 벌리였다.
12월5일 일본군 시마다소위가 지휘하는 30여명은 하마탕 서북쪽산곡에 있는 반일부대의 숙소를 포위공격함으로써 쌍방이 교전하였다.
  
“보시다싶이 10월5일 전투이외에는 모두다 분산은페하였다가 주동적으로 적을 공격한 전투였습니다. 반일부대는 기동령활한 전법으로 적을 타격하면서 토벌계획을 혼란시켰습니다. 일본군이 동부전선에서 비록 반일기지를 파괴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수많이 학살하였으나 반일부대를 소탕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아 한시도 안심할수 없어 항상 비상사태를 취했습니다. 동부전선의 의의는 아주 큰바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반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잠복을 엄호하였으며 서부전선 반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켜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동부전선의 소부대들의 빈번한 습격전 때문에 북상하는 반일부대들을 추격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동부전선이 갖고있는 의의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20. 경신년대학살사건

 

잔악한 일본강도 연변땅 피로 물들이고 조선족백성 혈육 잃고 삶의 터전 잃어
  
무고한 백성들을 "토벌"
“일본침략군은 중국땅에 들어온 그날부터 반일부대는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경신년대토벌”은 사실상 “경신년대학살사건”이라고 피력했다. 청산리전역후 반일부대가 안전하게 로령일대로 전이한후 일제는 약 8개월간 중국의 조선족사회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조선족학교와 교회당 심지어 식량, 가옥마저 무차별 소각하는 천인공노할 참변을 빚어냈다.
  
“일본군은 10월26일 간도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연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김춘선 “경신참변연구”)
  
중국지방관원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등이 1920년11월5일 외교총장에게 한 보고에서는 “간민들이 모여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조선족농민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 몇집 또는 몇십집씩 불살랐고 몇 명 또는 몇십명씩 죽여버렸는데 가는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 태반이 밭가는 종민들이였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 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고 없는 일이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피로 물든 연변땅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카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일제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연변 어디에도 없을것이라고 한다.
구룡평은 의란구의 중심지이고 고성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15.5킬로메터 떨어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류채촌은 구룡평에서 동북쪽 3.5킬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태양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5킬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고 남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련화촌은 구룡평에서 15.3킬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의란구에는 당시 간도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는데 방초령에다 국민회군의 사관훈련소까지 설치하고있었다. 의군부가 고성촌, 련화촌 등지에 자리잡고있어 의란구는 반일부대의 탄탄한 후방기지이기도 했다.
  
1920년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일대를 여러차례 “토벌”하였다. 1920년10월20일 일본군 제19사단 이시쯔가대대는 의란구토벌을 감행하여 리동근, 리종옹, 김득산, 윤남극, 강경성, 김해룡, 김순지, 김락세, 리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며칠후인 24일에는 일본군 74련대가 의란구를 토벌, 양만홍, 리태미, 리근치, 리렬 등 10여명을 살해하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소각해버렸다. 11월3일에는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부대의 군자금모집과 정보수송을 하였다는 리유로 일본군 76련대가 재차 의란구를 토벌하여 리국화, 리일재, 김렬, 리명초, 리진철, 리창옥, 김성운, 리종란, 리종눌, 리여익, 리여영, 리병재, 허익, 최병조 등 16명을 살해하였다. 11월3일, 5일 일본군 76련대는 불령선인가족이라는 리유로 북의란구에서 김창홍, 로우선, 김렬의 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불살라버렸으며 3일과 4일에는 태양촌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는 리유로 교원 리우선 등 2명과 농민 리주향, 리수악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11월5일 의군부 총무 리우익, 서무부장, 리을, 홍정필을 비롯한 1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여 현지조사를 한 “대한신보” 기자는 “독립신문”(1920년12월19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의란구 남쪽은 전부 30여호 되는 리성(李姓)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하여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였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중에 던져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 외에 수 3명 혹은 10여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당시 연변주재 림시정부 통신원이 “독립신문”(1920년12월8일)에 투고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26265명이 학살되고 71명이 강간당했으며 3208채의 민가, 39개의 학교, 15개소의 교회당, 53265섬의 곡식이 소각되였다. “독립신문”은 1920년12월19일자 보도에 상기 조사통계의 추가조사에서 연변지구에서 146명이 더 학살되고 민가 78채와 학교 2개소, 교회당 4개소가 더 소각되였다 했다.
  
침략자의 야수적만행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한 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 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협의로 12살나는 조선족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일때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족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강간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강간하였다. 간약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강간한 다음 학살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간도학살사건을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000명이나 죽고
수십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량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나라 잃고 기름진 복지를 떠나
삭북의 살길을 그 동지조차 잃어버렸구나
오늘 밤 강남도 추운데
장백의 모진 바람 오죽이나 추우랴
아, 생각키우는 간도의 동포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 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
 
21. 피로 물든 장암동

 

하루아침사이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하고 무고한 조선족백성 무참히 두벌주검 당해
  
평화로운 노루바위골
잡풀이 뒤덮인 산자락에 소수레길이 가리마처럼 뻗어있었다. 내려다보니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모습이 번득번득 눈에 비쳐오는데 어데선가 들려오는 뻐국새의 울음소리가 귀맛 당긴다. “통통통...” 마을에서 울여오는 뜨락또르의 동음에 섞여 개짖은 소리, 닭우는 소리가 작은 합창을 이룬다. 정오의 햇볕을 이고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 멀리서 동화처럼 읽혀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장암동의 풍경이다.
  
오면서 여러 마을에 들려 “장암동”이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사람마다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엔 우리 말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댔다고 하던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 생각나서 “노루바위골”이 어디인가고 물으니 사람마다 안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세전벌 동남쪽 뉘연한 한전밭 중간에 난 수레길을 따라 들어가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이였다. 다시 골연을 파면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노루바위골 즉 장암동이라고 했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노루는 보이지 않고 꿩우는 소리가 이 골 저 숲에서 다정스럽게 들려올뿐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가 바라보니 산자락에 큼직한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자연석으로 세운 장암동유적비였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산새들이 지저귀고 풀벌레가 울어대는 인적없는 산길을 얼마간 더 접어가니 길옆에 금방 본 유적비보다 작은 석비가 자리하고있었는데 쑥대에 묻혀 얼핏 알리지 않았다. 석비정면에는 “一九二0年十月三十日 日軍의 間獐巖慘殺事件犧牲者三十人追念碑”라고 새겨져있었다. 왼쪽면에는 “一九九四年七月”이라는 석비를 세운 년월일, 오른쪽면에는 “犧牲者遺家族代表 故 金京三의 子 金基柱建”이라는 세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니 묵은 뙈기밭 한자리가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밭에서 잡풀이 곡식을 대신하고있었다. 어찌보면 집앞뙈기밭으로 보이기도 하는 아담한 밭이였다. 아마 여기가 1909년에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원 장암동마을 옛터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개울과 나란히 뻗은 수레길을 따라가며 보니 마을이 들어앉았음직한 곳이 여러곳이 있었다.
  
1920년 참안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였으며 이들 다수가 반일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열성자들이였다고 한다. 린근에서 장암동마을을 예수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永信)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반일교육의 요람으로 소문난 명동학교가 있었다. “3,13”운동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1920년10월에는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여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였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량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련계를 갖고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악마들의 살인현장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선생은 일본국학자료원에서 출판한 두툼한 “현시대자료”집에서 장암동사건에 관련된 페지를 찾아 펼친후 그대로 번역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보병장교 스즈끼대위 이하 72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은 후방련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장암령부근의 불령단을 소탕할 임무를 맡고 30일 0시 룡정촌 병찬부에 집합하여 29일에 억류된 5명의 조선인을 안내자로 장암촌으로 향했는데 이들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도망을 기도했기에 죽여버린후 남양평을 향해 진군했다. 남양평에서 조선사람 1명을 안내자로 세우고 장암동에 도착하여 오전 6시30분부터 포위토벌을 시작했는데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적 30여명이 동산촌방향으로 종대를 지어 퇴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격을 명령했는데 11명의 살상을 냈다...”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불속에 던져넣군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룡정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 말틴은 자기의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룡정촌에서도 보였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인 젖먹이를 업은 녀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여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심여추는 “연변조사실록”에서 장암동참안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있는 장암동마을을 단꺼번에 불태워 페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같은 짐승도 한 마리 남지 않았다.”
가슴치며 통곡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가슴에서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고있는데 악마같은 일본군은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간악한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했다.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이 토벌에서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이며 반일련합부대의 군무청장인 량도헌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마을사람들은 누구의 시체인지 알수 없어 유골들을 한데 모아놓고 합장하였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집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고 제좋은 소리를 줴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장암동참살사건은 일본군이 감행한 <경신년대학살사건>가운데서 저지른 수많은 사건중 한토막의 만행에 불과합니다. 일본군 기무라대장은 자기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 <무릇 경유하는 부락마다에서 불령단같은자나 도망치치는자를 보기만 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총살하였다>고 썼습니다. 일본침략자는 가는곳마다에서 야만적인 파쑈 본질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마음대로 학살하여 연변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력사를 잊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박창욱교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22. 공산주의운동의 흥기

 

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1917년11월7일(로씨야력으로는 10월25일) 로씨야 무산계급은 레닌의 령도하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게린스끼의 자산계급림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쏘베트정권을 설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와 동방 약소국인민들에게 민족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려는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식민지예속국의 혁명운동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주었다.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반일무장투쟁을 벌려오던 무장단체들과 반일조직의 간부들은 일제의 야만적인 “경신년대토벌”로 연변을 떠나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쏘련 극동지방으로 넘어갔다. 진보적청년들은 빨찌산을 무어 쏘련 붉은군대와 배합하여 청소한 쏘베트정권보위전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폭풍우속에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세례를 겪게 되었다. 중국에서 구민주주의의 쓴맛을 볼대로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난시기 민족해방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되였으며 맑스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되였으며 맑스주의리론의 지도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17년4월 로씨야 연해지구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족농민들의 실태를 조사하던 리동휘는 게린스끼림시정부의 헌병구석성에게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리동휘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고 10월혁명을 인식하게 되었다. 감옥밖에서는 김립, 리한영, 김하구 등도 10월혁명을 지지하고 볼쉐비크에 의거하여 리동휘를 감옥에서 구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리동휘의 사상은 진일보 전변되여 로농혁명을 주도하는 볼쉐비크와 쏘베트정권을 옹호하게 되었다. 리동휘는 쏘련공산당 하바롭스크당부의 비서이며 원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인 조선인 녀혁명가 알렉싼드라 뻬뜨로브나 김의 도움으로 진일보 사회주의혁명에 전심하게 되었다.
  
1918년6월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시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시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시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국제공산당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한 박진순 등과 함께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창시자인 리대조, 진독수, 일본의 사회혁명가들을 만나 동방 각국에서의 공산주의사상의 전파를 토론했다. 아울러 리동휘는 관내에 있는 조선족청년들에게 10월사회주의혁명정황, 국제공산당에서 신민지 반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성원한 사례와 맑스주의와 로농혁명사상을 통속적으로 소개했다. 리동희 등의 영향하에 일부분 조선족선진분자들은 중국의 선진분자들과 함께 중한로농동맹련합회를 설립하여 두 나라 로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였고 어깨곁고 공동의 적과 투쟁하였다.
  
공산주의사상의 전파
리동희 등은 조선족청년선진분자들을 자신들의 주위에 굳게 뭉치게 한후 사회주의연구회, 조선인사회과학연구회 등 맑스주의연구소조를 설립하였다. 특히 북경의 조선족학생들은 맑스주의연구소조를 결성한후 맑스주의사상을 학습연구하는 한편 경상적으로 리대撚?중국공산당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21년, 상해에서 활동하던 리동휘 등은 국제공산당 원동부의 지원으로 조선문인쇄소를 세우고 “공산당선언”번역본을 비롯한 혁명적서적을 출판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은 사회주의기치하에 로농혁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선전하였다. 그해 1월 리동휘, 김립 등은 상해에서 한인사회당대표회의를 소집한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5월23일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회의에서 리동휘가 당위원장에 당선되고 김립이 비서장으로 선거되였다.
  
고려공산당중앙총감부는 상해에 있었는데 1921년 중앙위원 김하구가 돈화에 와 원 국민회의 구춘선, 강구우, 마진 등을 회견하고 국민회성원들을 고려공산당에 흡수하고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총감부를 건립하였다. 총감부에서는 안무와 최량을 쏘련에 보내여 국민회 전체 성원들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다는 것을 동양비서부에 회보하고 1922년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만주총감부는 돈화를 중심으로 간도, 열하 등지에 당조직을 확대하였다.
  
1920년7월 로씨야에 거주하고있던 김철훈 등 조선인 선진분자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부대표의 지지밑에 “전로한인공산당”을 창립하였다. 1922년11월에 이 조직에 가입한 인수는 4433명에 달하였으며 중앙본부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찌따, 하바롭스크, 니꼴라스크, 우라지워스또크, 대흑하, 할빈, 액목, 상해, 북경, 장춘, 평양 등지의 련락소를 통해 “붉은기”등 신문, 잡지를 발행하여 10월사회주의혁명의 경험을 소개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윤복송, 정치운, 리주화, 우룡선 등은 조선과 로씨야로부터 연변에 들어와 룡정과 화룡에서 김홍선, 로창률, 리영규, 류태순, 장시우 등과 련계하여 조기공산주의단체인 간도공산당을 설립하였다. 후에 그들은 이르쿠츠파와 련합하여 화요파로 형성되였다.
  
중로변경인 이만,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던 리중집, 남공선, 최경천 등은 당지에서 공산주의단체를 설립한후 림산, 동녕, 녕안과 훈춘에 공산주의기구와 청년회조직을 세우고 활동했다. 1921년 니고리스크와 녕고탑에 총리부를 세운 한족(韓族)공산당은 녕안, 돈화, 국자가, 투도구, 동녕, 훈춘, 대황구 등지에 많은 인원을 파견하여 당조직과 련락소를 세우고 혁명적간행물을 산포하고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연변에 들어온 맑스주의서적들
공산주의단체에서 산포한 서적과 간행물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과 동북의 여러곳들에 펴져나갔다.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 초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쏘련과 상해, 천진, 북경 등지에서 연변에로 전파되여온 신문, 서적과 간행물들은 매우 많았는바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몰수한 수자만 하더라도 아래와 같았다.
  
1922년 122종 4208건
1924년 164종 3450건
1925년 201종 4408건
1926년 259종 3606건
  
주요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자유보”, “새세계”, “로농세계”, “붉은별”, “붉은기”, “뭇별”, “로동신문”등이 있었으며 잡지들로는 “서광”, “새사회 이르면”, “공산”, “효종”, “선구”, “광명”등이 있었고 소책자로서는 “공산당선언”, “로동조합이야기”, “우리 무산계급이 나갈 길”, “칼 맑스”등 수십종에 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상해, 북경 등지에서 출판된 “신청년”이나 “매주평론”과 같은 한문으로 된 혁명적서적과 간행물들도 한족선진분자들의 손을 거쳐 길림, 연길 등지의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조선족학생들속에 퍼졌다.
  
리봉, 관준언 등 선진적인 한족지식인들은 연길에서 “신문서사”를 꾸려 학용품을 경영한다는 명의로 많은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런 간행물들과 서적들을 통해 맑스주의사상은 신속하게 연변조선족들에게 침투되였다. 이에 연변에 파견된 간도련락장교는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서 “적색의 거센 물결이 간단없이 간도를 적시고 있다. 심지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에 경향하고있다”고 아우성쳤다.
  
진보적 서적과 간행물을 통해 연변조선족들은 로씨야혁명길만이 살길이며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사회주의의 새 국가를 창건하여 전세계인민들과 함께 영원토록 자유과 평등,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족인민들은 서적과 간행물을 통하여 구미자본주의렬강들이 떠들어대는 “공리는 강권을 이긴다”, “정의, 인도”, “민족자결” 등의 허위성을 알게 되었다.
  
연변에 전파되여 온 로씨야에서의 새로운 제도탄생의 소식과 더불어 전 인류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준 맑스-레닌주의사상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야만적인 업압과 수탈로 허덕이던 연변조선족들에게는 해동을 약속하는 햇볕과 같았다. 맑스주의전파와 더불어 조선족인민들의 혁명투쟁도 구민주주의혁명시기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맑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삼게 된 조선족인민들은 조기공산주의단체의 령도밑에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23. 공산주의운동의 온상

 

학교마다 맑스주의연구소 세워지고 청년학생들 민중속에서 반일사상 선전

실오리같은 비가 차분히 내리는 7월11일, 룡정제1중학교 교정은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다들 대성중학교옛터를 참관하러 온 관광객들이였다. 회색벽돌로 건축한 교사는 원래의 교사는 원래의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하여 놓은것이라고 한다. 교사는 중간이 3층현관으로 돌출되여있는 2층건물이였다. 현관 1, 2층 사이에 “私立大成中學校”라는 글이 옥칠로 새겨져있었다.
교사는 동서의 길이가 36.5메터이고 남북 너비는 8메터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이 교사는 학교의 교무실로 사용되였댔는데 허물고 다시 지은후 지금은 학교력사전시실로 되어 많은 손님들을 끌고 있다. 전시실에는 룡정을 빛낸 력사인물들과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의 은진, 동흥, 영신 등 학교의 력사를 반영한 사진과 도편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관객들앞에서 예쁜 녀학생해설원이 한창 청아한 목소리로 해설하고있었다. 관객들은 녀학생의 해설사를 들으면서 력사의 현장을 재현한 도편과 사진앞에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군 했다.
  
비장한 력사의 시작을 실감하게 되니 떠나올 대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이 하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돈 맑스주의의 보급운동은 청년들속에서 세찬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룡정의 여러 학교는 혁명적청년을 양성하는 중심지로 되었는데 맑스주의연구소조등이 많은 학교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룡정의 대성, 동흥 등 학교들은 <공산주의온상>이라고 불리우기까지 했습니다.”
  
해설원 녀학생은 대성중학교는 혁명적청년세대를 양성하는 중심지가 되어 맑스주의 전파활동을 각지 조선족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고 자랑차게 말하고있었다.
  
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 의하여 1921년에 창립되였다. 교수는 공자의 사상으로 지도되였으며 “사서(四書)”, “오경(五經)”,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주요 학과목으로 삼았다. 공자의 봉건륜리도덕은 교수의 기본내용이였다. 교사 현관 웃쪽 지붕우에 덧얹은 다락층에는 “공자위패”를 걸어놓고 매달 초하루날 아침마다 전교 사생들이 모여 “존공의식”을 진행하였는데 향불을 피우고 “공자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성중학교에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가운데는 맑스주의 새사상을 접수한 진보적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 의해 많은 조선문으로 된 맑스주의간행물들이 학교에 전파되여 들어왔는데 맑스주의혁명사상은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전파되였다. 1922년 조기공산주의자들인 리주화(李周和), 리린구(李麟求)의 지도밑에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조직, 10명의 소조원이 포섭되였다. 소조원들은 저녁마다 리주화네 집에 모여 동흥중학교의 교원 정중섭(鄭重涉)에게서 과학적사회주의리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미구하여 동흥, 은진 등 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찾아와 광명회에 가담하게 되어 연구소조는 소조원이 30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광명회의 활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였는데 하학후와 일요일에 학교의 교실을 리용했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농촌마을에 내려가 “동학(冬學)”반이나, 야학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문화오락활동을 전개하는 기회에 맑스주의의 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열정적으로 선전했고 대중속에 반일투쟁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광명회의 많은 진보적인 학생들은 학습을 통하여 차츰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를 지지했고 중국의 “5.4”운동의 영향으로 반제반봉건적인 신문화운동을 제창해나섰다. 소조원들은 학교내에서 봉건미신을 타파하고 “공맹지도”를 페지하는 한편 민주와 과학을 제창할 것을 주장하면서 투쟁의 예봉을 공교회에 돌리였다.
  
1922년4월1일 아침, 학교의 규례대로 공자제를 지낼 때였다. 광명회의 진보적인 학생들은 선동을 받은 전교학생들은 누구도 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학교를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대표들은 만약 학교당국에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끝까지 동맹휴학을 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에 회답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교사지붕의 다락에 올라가 “공자위패”를 뜯어버리고 전교학생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학우회에서 학교를 인수, 관리한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은 공교회인사이며 보수적인 교무주임인 림봉규를 몰아내고 수학교원인 현기형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했다.
  
학우회에서는 교원들과 협상하여 학교운영방안과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사회과 교수를 위주로 하고 자연과와 외국어(영어, 일어), 한어를 적당히 교수하고 예능과에는 습자, 수공, 도화, 음악, 체조 등 과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종교의식을 무조건 페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동맹휴학인 4일만에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종교와 철저히 분리시키고 복학하였다.
  
1923년3월, 초기공산주의자인 김사국(金思國)이 로씨야 연해주에서 룡정으로 왔다. 그는 방한민(方漢民), 김정기(金正琪), 리명희(李明熙)등 인사들과 힘을 합쳐 대성중학교의 부설학교로 “동양학원(東洋學院)”을 꾸리고 교사 아래층 2칸을 내여 대성중학 제1회 졸업생들을 위주로 7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동양학원에서는 공산주위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리론을 기본교수내용으로 삼고 선진청년들을 양성하였다. 동양학원은 연변의 첫 무산계급민주주의 새 교육을 창시한 학교였다.
  
하여 동양학원은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었다.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동양학원을 큰 화근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고 꿍꿍이를 꾸몄다. 1923년8월 일제는 저들의 주구들을 사촉하여 야밤에 학교마당에다 작탄을 매설하여놓고는 령사관경찰들을 출동시켜 사출해낸후 50여명의 사생들을 체포하는 “작탄매설사건”을 조작, 끝내 동양학원을 페교해버렸다. 체포된 대부분 학생들은 인차 석방되였으나 김정기 등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갔다. 김사국과 리명희 등은 로씨야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여 혁명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대성중학교는 한때 혁명의 저조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흥중학교
룡문교를 건너 서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을 건 학교가 있다. 피혁공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두고있는 이 학교가 바로 동흥중학교 옛터이다. 얼마전까지도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댔는데 지금은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으로 바뀌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면서 학생들은 예쁜 우산들을 받쳐들고 재미있게 등교하고있는데 얼굴들에는 생기가 넘쳐나고있었다. 갖가기 화초로 교정은 잘 가꾸어져있었으나 옛날의 동흥중학교의 흔적이라든가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같은 것을 얼핏 찾을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보통 학교의 모습이였다.
  
“동흥중학교도 대성중학교처럼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 전파와 혁명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교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림민호와 같은 많은 우수한 혁명인재를 키워냈지요.”
동흥중학교에 대한 박창욱선생의 소개였다.
  
동흥중학교는 천도교 신도이며 한시기 연변의 반일투쟁에서 이름높던 간도국민회 사법부장을 맡고있다가 국민회군 안무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최익룡(崔翼龍)과 공산주의자 박재하, 김소연 등에 의하여 1921년10월1일 창립, 최익룡이 교장으로 추대되였다. 이 학교에서는 1925년12월부터 신학제를 채용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였고 사회주의에 배치되는 학과목을 페지하고 학교내에서 혁명가도 불렀다.
  
동흥중학교는 창립초기부터 맑스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진보적인 학생들은 맑스주의단체들에서 발간한 “새벽종”등 간행물과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는 출판물을 들여다 학습하였다. 1923년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온 공산주의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의 지도하에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등 맑스-레닌주의 연구단체가 결성되였고 같은해 상해로부터 온 림호(林虎)등이 학교내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투쟁을 발동하였다. 이미 선진적인 사상을 접수한 교직원과 학생들은 종교미신과 봉건가부장제사상을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를 제창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교육종교분리”를 주장, 학교가 종교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리였다.
  
1925년4월에는 진보적교원 김성호의 지도밑에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인 “독서회”가 산생되였다.
동흥중학교 사생들도 대성중학교 사생들과 마찬가지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후 대중속에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리였다. 학생들은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농촌에 내려가 야학을 꾸리고 어린이들과 실학청년 및 녀성과 장년들에게 조선글을 가르쳤고 혁명가곡을 배워주었으며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림민호, 김세광 등은 고향인 장흥동(화룡시 동성향 태흥촌)에서 “동구청년회(東求靑年會)”를 조직하고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대중들을 혁명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체활동을 벌리는 형식으로 청년들에게 새 사상을 선전하면서 투쟁의 불길을 지폈다. 로창률(盧昌律)은 소오도구(화룡시 동성향 흥영촌)에 내려가서 “청년회관”을 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6년10월, 룡정에서 설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산하에 4개 지부를 두었는데 지부성원 거의다 룡정의 각 중학교 교원들이였다. 그들중 박재하, 김소연 등은 동흥중학교 교원들이였다.
 
24.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

 

동만구역국 주요한 간부들 일거에 체포되고 혁명적청년학생들 일제와 맞서 용감히 시위
  
동만구역국 설립
1925년4월2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가 비밀리에 거행되였다. 이튿날인 4월1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회도 창건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있는 조선민족인민들의 혁명투쟁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해외부, 만주부, 일본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의 조봉암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만주총국의 설립사업을 하게 하였다.
  
1926년5월16일 조선공산당 화요파대표 조봉암, 최원택, 상해파대표 윤자영, 김하구, 이르크쯔파대표 김철훈 등은 흑룡강성 주하현(상지현) 일면파의 하동에 있는 김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총국기관을 흑룡강성 녕안현 녕교탑에 두고 그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구역국을 내오기로 결정지었다. 고려공청회에서도 만주총국을 세웠다.
  
만주총국에서는 동만구역을 설립하기 위하여 한응갑과 전룡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1926년10월28일 밤 룡정시교 삼리촌에서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채세진, 박두환, 리순, 김인국, 림민호 등과 만나 협의한 끝에 룡정촌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구역국산하에 비서, 선전, 조직, 검열 등 부를 설치하고 집행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집행위원으로는 전룡락, 김인국, 리순, 리주화, 림민호, 채세진, 김소연, 림계학과 후에 총국에서 한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여 도?9명이였다. 전룡락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인국이 조직부장, 리순이 선전부장, 표면부원에 김소연, 검열부원에 채세진, 고려공산청년회책임자에 림민호가 선거되였다. 동만구역국이 조직된후 그들은 연변의 여러 계렬의 조직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룡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명월구, 왕청, 라자구, 훈춘 등 지역에 17개의 세포조직을 내왔다. 1927년의 통계에 의하면 동만에는 19개 기층당조직과 116개 외각단체가 있었는데 혁명단체의 성원은 9766명에 달했다.
  
“만주총국은 설립된 그날부터 조선공산당의 방침, 로선에 근거하여 사업을 벌려나갔는데 사실은 연변의 실정과 조선의 실정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선연장론>은 연변실정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조선공산당정강을 연변에 결부시키려 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지요. 그러나 맑스주의 전파, 일제에 대한 타격, 혁명군중조직의 단합, 당기층조직의 확대, 허다한 우수한 당간부양성 등 면에서 걸출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의 설립은 금후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피력, 방면 여러 공산주의단체들간의 파쟁이 심했기에 단결에 막대한 영향을 기쳤다고 했다.
  
연변에서 공산당 4개파
“연변에는 <화요파>, <서울파>, <엠엘파>, <상해파>등 4개파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초에 쏘련이 이르꾸쯔크파와 리동휘가 조직한 고려공산당 <상해파>간의 모순을 조절하기 위하여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두 파는 극동조직국을 세워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계속 존재하고 악화되여 극동조직이 실패하자 극동조직국에서는 비밀리에 정재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진주에서 강영달과 련합하여 1923년7월에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북풍회>파와 련합하여 1924년11월 <화요회>를 건립하였습니다. <화요파>란 공산주의자들이 화요일날 한번씩 회의를 하기에 그렇게 부른것이였고 또 맑스의 탄생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 조직을 <화요파>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단체로는 <서울파>입니다. 당시 조선경내의 청년운동은 매우 활약적이였는데 그 지휘권은 장덕수, 리광수 등 자선계급우파들이 장악했습니다. <서울파>단체내부에는 <좌>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인물이 김사국이였습니다. 후에 투쟁을 거쳐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을 물리치고 령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세력들이 1925년4월 <고려공산주의동맹>과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건립했습니다. 력사에서 이들을 <서울파>라 합니다.
  
세 번째단체로는 <엠엘파>입니다. 1920년 대초에 <엠엘파>는 <상해파>와 많은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청단성원들이 박윤서, 김월선, 한빈 등 청년들이 <우리는 파벌투쟁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원 <엠얼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엠엘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1924년 룡정에 들어와 고려공산주의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또 남만의 반석현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는데 이들은 력사에서 <엠엘파>라 합니다.
  
네 번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