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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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

 

공산당 자파(自派)중심 만주총국 편성하고 일제의 야만적탄압으로 동만청년동맹 해체
  
당내파벌투쟁
조선공산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던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립되던 그날부터 만주총국을 화요파중심으로 조직하려고 했으나 세력이 막강한 상해파와 청년운동에서 우세를 차지하고있는 엠엘파가 있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 김찬 등은 상해파의 윤장영, 김하구, 엠엘파의 김응섭, 이르쿠쯔파의 김철훈 등을 흡수하여 표면상에서 각파로 조성되여 보이는 통일총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실제상 화요파가 의연히 책임비서, 조직부장, 선전부장(상해파의 윤자영이 병을 구실로 선전부장자리를 내놓아 후임으로 화요파의 김동명이 부임), 위원 등을 차지하게 되어 령도권이 화요파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후에 엠엘파의 박윤서를 군사부장으로 보충선거하였으나 결과는 화요파와 엠엘파간의 모습을 격화시켰을뿐이였다.
  
1926년5월 만주총국에서는 김동명(화요파)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엠엘파에서는 이미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를 조직하고 실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있으면서도 김동명은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와 아무런 상론도 없이 김해일, 강우, 홍원석, 한진, 전승우, 최동욱, 리주화, 김훈, 김동명 등 9명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구성하였다. 이에 엠엘파의 박윤서는 자신이 만주총국에 들어가지 못한데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김동명에게 “개별행동을 취하여 별개의 공청을 조직했蔑굅?항의해 나섰다. 상해파에서도 화요파의 이런 처사에 대해 의견이 있었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한때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27년8월 김동명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선전부장으로 부임된후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의 책임비서를 엠엘파의 리종희가 맡아보게 되었다. 리종희는 김동명이 제의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명단을 무시하고 리윤수, 박사, 강진, 한익국, 김광근, 한사빈, 박병희 등을 위원으로 제기했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최원택은 리종희에게 원래의 결정을 집행할 것을 명령했으나 리종희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내에 파벌투쟁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최원택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리하여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서울, 상해파)사이의 내부모순은 격화되였다.
  
1927년10월2일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주도하던 최원택을 비롯한 주요한 간부들이 일거에 검거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아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습니다. 거기에다 창립당시부터 잠재해있던 여러 파들 사이의 모순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여 각파에서는 <자파중심>으로 혁명세력을 편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당내 여러 파들이 령도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였던 첨예했던 모순을 피력했다.
  
1927년10월9일 만주총국의 간부들인 감하구, 주건, 리신, 정창순, 김완, 정을산 등은 녕안현 장하(章河)의 서병택네 집에 모여 금후의 사업방안을 토의했다. 회의에선 우선 리순, 정창순, 김한호 등 3명을 연변에 파견하여 검거된 당원들을 위문하고 기층조직을 재건하면서 일제와 지방정부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조직부장에 전룡락, 선전부장에 김봉만을 림시로 보충선거했다. 동만구역국의 사업은 남아있는 당원들은 잠시 책임지기로 했다. 만주총국과 동만도(1928년1월 구역국을 도로 고쳤음) 가부사이의 련계는 림민호, 전룡락, 김기철(김만선)등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3개의 만주총국
림민호, 김기철 등은 연길현 옹성라자에 와서 리순(엠엘파)등과 토의한후 금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동만도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엠엘파) 가운데서 유력자를 선발하여 등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엠엘파의 본위주의의 경향이였다. 그와 반대로 상해파의 리환수, 주건, 김희창 등은 상해파의 가운데서 만주총국과 동만도의 간부를 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주총국과 교섭했다. “10.2”사건 즉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에서 별로 손실을 입지 않은 엠엘파와 서상파는 령도권을 놓고 점차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는데 모순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화요파는 비록 “10.2”사건에서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김찬의 지도밑에서 만주총국을 회복하였다. 후보위원으로 있던 리동산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성득(백파)이 조직부장을, 김홍선(김홍한)이 선전부장을, 최충호, 진허, 리우영 등이 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화요파일색의 만주총국이였다.
  
이에 박윤서는 조선공산당중앙에 화요파의 “전형행위”를 소송하고 엠엘파로 구성된 만주총국명단을 제기하였다. 당시 엠엘파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책임비서 안광천(엠엘파)등은 1928년3월 화요파의 만주총국을 부정하고 엠엘파가 제기한 만주총국간부명단(책임비서 리경호, 위원 박기석, 박윤서, 김영식, 리순)을 비준했다. 동만도의 간부로는 김기석, 최종학, 김진탁, 리순, 동만도 공청회 간부로는 리정만을 선임하였다. 이러한 간부임명에 대해 화요파는 승인하지 않으면서 원래의 만주총국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구에서 엠엘파총국과 화요파총국이 동시에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1927년 8-9월 서울파와 상해파는 련합하여 “재만조선공산주의동맹”을 결성, 리동환, 윤자영, 리운혁, 장도정, 최동욱, 김철수, 김영만 등으로 지도소조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북풍파의 일부 성원들은 비록 “10.2”사건에서 체포되고 수령인 김봉익도 울라지보스또크로 피신간 정황이였으나 한상묵, 류운섭, 최화봉, 황욱(황금달)등은 다시 일어나 조직을 회복하였다. 11월 중순 그들은 한상묵을 책임비서로 하는 북풍파당조직을 성립하고 울라지보스또크에 피신해있는 김봉익과 련계를 달아 임무를 접수하였다. 북풍파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련계가 없이 자체로 조직을 확대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민성보”에 문장을 발표하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죄악을 폭로하고 조선족군중을 선동하여 사회주의혁명에로 궐기시켰다. 1928년에는 “5.1”절을 계기로 반일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들의 활동을 감시해오던 일본경찰들은 5월10일 밤 8시30분에 수색망을 늘여 북풍파성원들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북풍파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 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금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맑스-레닌주의의 전파와 조선공산당조직이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연변에서의 청년운동도 생기발랄히 발전하였다. 연변지구에서의 청년운동의 비약적발전은 통일된 청년조직의 발족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1926년1월25일,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룡정의 시천교강당에 모여서 동만청년총련맹의 창립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동만청년련맹의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합리한 사회생활의 지적교육과 실지훈련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대동단결에 힘쓴다.
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신문화의 향상에 힘쓴다.
  
총련맹의 간부진영은 다음과 같다.
림시의장 박재하
서기 김소연
규약기초위원 리주화, 김소연, 김소광
선언 및 강력기초위원 리린구, 김봉익, 주채희
집행위원 리주하 이하 15명

동만청년련맹은 창립된후 약 반년동안 독자적인 청년운동을 벌리다가 1926년10월 동만지역국과 고려공산청년회 구역국이 설치된후 직접 그 령도를 접수하게 되었다. 동만청년련맹은 연변지구청년운동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조직확대와 회원흡수에 모를 박았다. 1928년1월1일에 정기대회에서 동만청년총련맹을 “동만청년총동맹”으로 개칭, 단일동맹수는 24개로 급속히 늘어났고 5000여명 회원이 있었다. 1928년8월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진영을 보면 중앙집행위원장, 중앙집행위원 22명가운데서 공산당원과 공청원이 13명이고 무소속은 9명뿐이였다. 이렇듯 동만청년총동맹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령도하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산하의 표면단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조직에서는 1928년9월2일이 “국제청년일”인것을 기회로 산하의 가장 유력한 합법단체인 동만조선청년동맹을 동원하여 기념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일본총령사관에 탐지되여 대규모 검거체포되였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책임비서 리정만을 비롯한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간부와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 간부 51명, 동만청년총동맹 소속 및 기타 21명 총 72명이 검거투옥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하여 연변지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을 뒤이어 또 한차례의 준엄한 시련에 부딪쳤다.
  
동만청년총동맹도 문화부장 윤용준을 비롯한 12명의 간부를 잃는 비윤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1928년10월 연변의 여러 지역에서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들을 검거투옥하기 위하여 지방치안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들씌워 공개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리하여 동만청년총동맹은 1928년10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그치게 되었다.
 
26.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

 

혁명적학생들 무장한 일제경찰과 적수공권으로 박투 폭동위원회 민중단체 동원에 무기와 자금 장만
  
연변을 휩쓴 반일학생시위
1929년1월, 조선 광주에서 대규모적인 학생반일투쟁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들이 지펴올린 반일의 봉화는 료원의 불길마냥 서울, 대구, 부산, 평양 등지에서 세차게 타올랐으며 연변에도 파급되여왔다. 연변 각지 조선족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서 광주학생들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을 단행했다.
  
11월26일(1929년), 화룡사립약수동학교의 학생들은 사립룡평학교, 투도구의 사립신흥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단행, 투도구거리에 떨쳐나섰다.
  
1930년1월, 대립자의 현립1교와 사립명동학교의 학생들은 대립자현소재지(당지 화룡현소재지는 대립자에 있었음)의 거리를 메우며 지나갔다.
  
1930년1월23일, 룡정의 각 중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을 단행, 거리로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적인 지휘밑에 살을 에일듯한 풍설을 무릅쓰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학생들은 태극기와 수기를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광주학생사건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멸시를 반대한다!", "노예교육을 반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시위행렬이 일본령사관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들이 총칼을 휘드르면서 적수공권인 학생들에게 덮쳐들었다. 대성, 동흥, 은진 등 중학교의 학우회간부들인 리영식, 김창준 등 50여명 학생들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 1000여명이 은진중학교운동장에 다시 모여 성세호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은진중학교는 영국조계지안에 있었으므로 일제경찰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동흥중학교, 명신녀자중학교,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의 학생들은 앞다투어 일제의 야만적만행을 규탄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리였다. 일제기마병 10여명이 조계지철조망밖에 다달아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시위대오를 해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보는체만체하면서 계속하여 구호를 웨치면서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기마병들이 계속하여 호각을 불면서 야단치자 학생들은 철조망을 사이두고 경찰들과 향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철조망을 뛰쳐나가 기마병에게 덮쳐들어 박투를 벌리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엎드려놓고 반주검이 되도록 두들겨팼으며 놈들의 군도를 빼앗아 끊어놓고 옷과 모자를 찢어놓았다. 이것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무장한 일본경찰들과 맞다들어 박투한 반일행동이였다.
  
1월28일, 룡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선녀자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수기를 들고 다시 영국조계지에 모여 반일성토대회를 가지였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거리에 몰려나가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는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자각적으로 이 시위대오에 가담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투쟁은 2월달에도 계속 일어났으며 뒤이어 전 연변에 파급되였다.
  
대규모적인 민중시위
얼마전부터 조선공산당조직과 련계를 가지게 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도 반제투쟁에 결부시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기 위해 조선의 "3.1폭동" 11주년을 계기로 각지 당조직의 지도밑에 집회 또는 시위운동을 거행하여 민중들의 항일운동을 제고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에서는 1930년1월에 "3.1폭동" 11주년을 계기로 농민, 학생과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민중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만과 북만에 "<3.1폭동> 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각기 조직하여 시위운동을 령도하기로 결정, 선전부장 장주련(장시우)을 연변에 파견했다. 장시우는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현재 화룡시 동성향 명풍촌)에 있는 조선공산당 평강구역국 책임비서인 유태순(후에는 중공 연화현 평강구위 조직부장)의 집에서 동만도(화요파)책임비서 윤복송, 조직부장, 강석준, 선전부장 한별 그리고 연변학생련합회의 간부인 리동선 등과 함께 동만도간부회를 소집하고 동만의 각 군중대표들로 "<3.1폭동> 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연변학생련합회, 동만조선인총년총동맹 등 대표 5명을 구성, 리동선이 총책임을 지고 표면지도를 하기로 하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각지의 민중들을 조직동원하는 한편 시위하는 당날 살포할 선전삐라와 수기 등을 만드느라 바빴다. 군중선동에 사용할 견문은 주로 장시우와 윤복송이 기안한 것을 선전부장 강시준의 책임아래 3월1일 전야까지 몇십종 약 30만장을 인쇄하였는데 장시우, 강석준, 윤복송, 한별 등은 유태순과 강만홍(박봉남 후에는 제1대 중공 밀산현위 서기)네 집에 기숙하면서 낮이면 움속에서, 밤이면 뒤방에서 등사기와 씨름했다. 유태순과 강홍만의 가족들은 붉은천과 흰천으로 수기를 만드느라 바삐돌아쳤다. 그들이 작성한 선전문가운데 중요한 것을 봄녀 "나가자 만세시위장으로!", "선언", "전 조선학생혁명자의 혁명적투쟁에 대하여 피압박대중에게 다시 고함" 등 이였다.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0여만장의 삐라와 수천폭의 수기를 동만 각지의 당, 단 세포에 배포하는 한편 직접 구두를 통하여 민중을 선동, 조직하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1930년2월28일 소오도구, 개척리, 대동구, 수평동, 이도구, 장인강 등지의 농민들은 투고구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워군중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 만세!"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검은 글씨로 쓴 붉은색, 흰색의 작은 기를 흔들면서 성세호대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룡정, 두도구를 비롯한 전 간도는 마치 무장폭동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투고구일본령사분관 경찰들은 룡정총령사관의 군경들의 도움밑에 민중시위를 해산, 탄압하려고 미쳐날뛰였다. 3월1일 일제경찰들은 시위군중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하여 투도구령사관마당에는 체포된 농민과 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체포된 시위군중가운데 문두찬이라는 장인강에서 온 15살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일제경찰놈들은 소녀를 얕잡아보고 주모자가 누구냐고 따졌으나 입을 꾹 다물고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성난 일본경찰은 소녀의 머리태를 거머쥐고 흔들면서 위협공갈했지요. 이에 문두찬소녀는 <새벽닭은 누가 시켜 우나요? 우리들도 때가 되니 일떠섰어요!>라고 야무지게 대답하여 일본경찰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고>를 받고 석방되여 나온 문두찬소녀는 놈들이 감아쥐였던 자기 머리태를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가위로 뭉청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만들었습니다. 소녀는 계속 혁명의 앞장에 서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한 소녀의 생동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시 군중들의 혁명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시위에 동원된 군중들이 많고 기세가 대단한 것을 관찰한 "<3.1운동> 11주연기념준비위원회"에서는 보다 규모가 큰 민중폭동을 계획하였다. 3월5일 강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유태순, 리동선 등은 래풍동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이번 시위투쟁을 총화하였다. 결과 민중들을 궐기시켜 무장폭동을 일으킬수 있다고 결정하고 준비위원회를 "전동만폭동위원회"로 성격전환하였다.
  
폭동위원회에서는 조직, 선전, 규찰대, 경리, 출판 등 부서를 설치하고 조직책임에 리동선, 선전책임에 리철한, 규찰대책임에 김상근, 경리책임에 리병식, 출판부책임에 안평을 각기 임명하고 행동에 돌입하였다.
폭동위원회의 활약부서기가운데 규찰대가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였다. 규찰대는 중앙대, 지방에는 지방대, 구역에는 구역대, 각 촌에는 부대를 설치하고 중앙대로부터 촌부대의 책임자는 모두 해당당조직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지고 령도하기로 하였다. 규찰대성원들은 민중단체의 골간분자들로 구성하고 각 촌분대성원들로 하여금 각지의 지하조직과의 통신련락을 담당하는 동시에 반동분자, 일제경찰과 그들의 앞잡이들의 행동을 정찰, 감시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폭동위원회는 민중혁명단체를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하고 5월1일에 폭동에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심간부들인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만폭동"계획은 3월하순 일제의 간동총령사관에 포착되여 검거되기 시작하여 5월중순까지 130여명이 체포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3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체포된 사람중 49명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1931년2월5일부터 서울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의 "죄명"으로 공판을 받았는데 장시우는 10년, 윤복송은 9년, 강석준은 6년, 리병식은 8년6개월...언동 받았다. 리동선, 한별은 검거선풍에 걸리지 않았으나 훗날 "5.30폭동", "추수폭동"에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한별은 혹형으로 사망하고 리동선은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서 피살되였다.
"한마다로 그번 폭동준비는 <좌>경모험주의의 그릇된 견해에 의해 지도된 행동이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관내토지혁명전쟁의 경험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맹동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
 
27. 중공 연변특별지부 탄생

 

조선공산주의자들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반제반봉건투쟁에 궐기

연변에서 중국공산당 초기 활동
1921년7월,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탄생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의 로동인민은 자기의 정당을 갖게 되었다. 당에서는 선후로 당원간부를 동북에 파견하여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조선족의 첫 중국공산당원 한락연(韓樂然)도 있었다. 한락연은 1924년 봄에 동북에 파견되여 봉천, 할빈 등지에서 사업하면서 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10월24일, 할빈 도리구(道里區)에서 동북 제1차중국공산당대표대회가 열리였으며 중공만주성위가 탄생, 성당위기관을 봉천에 두었다. 이로부터 동북지구에 통일적인 당기관이 있게 되었다. 1928년초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민중토대와 혁명운동의 토대가 좋은 연변에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파견하여 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게 하였다. 하여 1928년2월 연변에서의 첫 중공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은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 기회에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여서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진지로 되었다. 중扁姸ㅓ訣幟寬?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당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들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1928년7월에 각지에는 기층단지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는데 류건장과 조지강은 다 향산자유원의 졸업생이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1928년10월 중공동만구위가 재조직되였는데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리별천, 선전위원을 손좌민이 맡았다.
  
중공동만구위와 그 산하의 당조직에서는 학교를 기본진지로 청년학생들에게 혁명적도리를 선전하고 애국주의를 선양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러나 당시의 당사업은 단지 지식계층에만 국한되고 광범한 로농대중속에 심입하지 못하였다. 1929년1월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룡정에서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제공산당 "12월테제"
1928년12월,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 각파가 신청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테제의 주요내용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반드시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나 로농민중을 튼튼한 기반으로 한 볼쉐위크화한 당을 재건설”하라고 촉구하는것이였다.
“12월테제”의 정신을 접수한 조선공산당 각파는 파쟁을 극복하고 볼쉐위크화한 당을 재건한다는 명의하에 각기 재건설위원회를 내왔다.
  
각파 재건위원회를 중국공산당조직과 접촉하면서 동북조선족인민들의 실제에 근거하여 혁명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의 력차의 투쟁은 모험주의 경향과 각파 사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엄중한 손실을 보았다. 이러한 결점들을 보아낸 혁명적인민들은 각파 재건위원회에 점차 실망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능히 통일단결되여 민중운동을 정확하게 령도할수 있는 령고력량을 찾기에 고심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의하여 동북에 있는 조선공산주의단체들을 쟁취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족들은 중국관내에서부터 중국공산당에 먼저 가입하기 시작했다. 1927년9월 상해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근거하여 집체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강소성위원회의 소속인 “법남(法南)구한인직부”를 조직하였으며 이어서 북경의 조선족공산주의자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북경지부를 설립하였다.
  
1930년1월과 3월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2차에 걸쳐 조선공산당 각파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고 리춘산, 한빈 등을 상해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3월 할빈에서 각파 대표들의 협의회가 있었는데 화요파의 김찬 등 소수인들이 중공당가입을 동의하지 않고 조공당재건을 주장한외에 대부분 대표는 중국공산당가입을 찬성하였다. 회의후 엠엘파는 “선언”을 발표하여 엠엘파만주총국의 해산을 선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표시했다. 화요파의 동만도간부들은 총국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서상파는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동맹”을 설립하였으나 공산주의자동맹은 결국 “조선혁명연장론”이며 “일국일당”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동년 8월에 해산되고말았다. 하여 동북에서의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해체되고말았다.
  
한편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원, 리춘산, 한빈, 장시우, 김재춘, 김기철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을 선전하고 그들의 입당수속을 도와주고 각지에 중공만주성위의 소속으로 지방당부를 내오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만주총국은 해산되였지만 력사적 의의는 위대합니다. 10년동안 비록 <조선연장론>, 파벌싸움, 맹동주의의 착오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금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상당한 리익을 주기도 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시상을 광범위하게 전파했으며 많은 혁명군중단체를 건립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도시공작으로부터 농촌공작에 들어갈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은것이였습니다. 1931년전에는 동북에 186명 당원뿐이였으나 1931년에는 1700여명으로 되었습니다. 연변에만 636명 당원이 있게 되었으며 조선족 중국공산당 당원은 정체당원의 90%를 차지하고있었습니다. 많은 공산주의인재들이 양성되였는데 녕안, 밀산, 몽릉, 탄원, 반석, 청원, 류하 등지의 제1대의 현위서기는 다 조선족당원간부들이였습니다. 10년동안 수천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이 양성되였는데 리철부(조공당중앙위원)는 중공하북성위 서기로 사업하기까지 했습니다. <8.18>사변후 우선 조선족지구에서 유격근거지가 창설된것도 조공당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활동은 중국공산당의 동북에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역할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높이 평가했다.
  
중공연변특별지부 탄생
중공동만구위가 파괴된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족 공산당원 왕경(王耿 원명 문갑송)을 연변에 파견하여 당조직을 재건하게 하였다.
왕경은 먼저 팔도하자(지금은 덕신향 숭민촌)에 와서 교편을 잡고 피신해있는 조지강을 찾아 성위의 지시를 전달하고 당조직재건사업을 연구하였다. 왕경은 처음에는 팔도하자, 달라자 일대에서 사업했다. 그러나 이 일대가 일제침략자들이 룡정으로부터 조선으로 통하는 교통요로이기에 관방의 경계가 삼엄하므로 당사업을 전개하기 불편하여 이동이 필요되였다. 조지강은 화룡현교육국 국장 관준언의 방조를 얻어 왕경을 화룡현제2소학교(지금은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소학교)교원에 취임시켰다. 왕경은 교원신분으로 당시 화룡현소재지였던 달라자에서 건립된 중공연변특별지부는 2월20일 왕경이 교편을 잡고있는 상천편(개산툰)으로 옮겼다. 왕경이 서기를 맡고 조지강, 이복해, 요일평이 위원을 담임하였다. 왕경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특별지부는 15명 당원으로 발전되였으며 석건평, 남양평, 달라자, 동량사에 기층 당지부를 두게 되었다. 얼마 안되여 왕청현 대감자에도 지부를 건립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가 건립된후 적극적으로 당조직을 회복하는 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연변의 실제와 결부하여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고리대를 반대하며 조세납부를 반대하고 국민당정부에서 교육권을 회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 구호를 제출했다.
  
1930년4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족공산당원 박윤서, 마준을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붉은 5월 투쟁”을 발동하게 하고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고찰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끔 하였다. “붉은 5월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밑에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고찰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하여 당의 조직건설이 비교적 빠른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투쟁가운데서 일부 간부와 조직이 폭로되여 특별지부성원인 조지강 등이 부득불 연변을 떠나게 되어 특별지부에는 왕경 한사람만 남게 되었다. 5월중순 왕경(이미 리왈룡으로 개명), 리창일, 주건, 리용 등은 연변특별지부를 재조직하였다. 서기는 그냥 왕경이 맡았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족들이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대중을 령도하여 들끊는 “붉은 50월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그러나 일제군경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하여 많은 당원간부들이 체포되고 희생되였다. 왕경도 부득불 연변을 떠나 봉천으로 중공만주성위를 찾아 사업하러 갔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조선족공산주의자들과 광범한 조선족대중들을 과거의 협애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여러 민족 인민들과 어깨겯고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반동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이끌었으며 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파벌관념을 버리고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중국혁명에 헌신하도록 이끌었다.
 
28. 《붉은5월 투쟁》

 
거세찬 폭동 료원의 불길마냥 타오르고 간담 서늘해난 일제 피비린 탄압 감행
  
5월투쟁행동위원회
1929년 하반년부터 1930년 상반년사이 전국의 혁명정세는 매우 호전되였다. 홍색정권과 홍군의 력량은 크게 장대해져 국민당통치구역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조직사업과 대중사업도 상당한 정도로 회복되였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한 중국공산당은 전면적인 무장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도방침으로 하였다.
  
1930년4월5일,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만주성위에서는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채택하여 각지 당조직들에서 “5.1”절을 계기로 폭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할 것을 요구하였다. 4월24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5.1>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반동군벌정부를 타도하자!”, “고리대착취를 반대하자!”,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각 민족 빈곤농민들에게 분배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권을 세우자!”등 투쟁구호를 제기하였다.
  
폭동지휘부 겸 련락처로 아지트를 건립하라는 瑩뗍汰?지시에 따라 오원세(주덕해의 숙부)는 교통이 편리하고 적들의 이목이 잘 미치지 않는 승지촌에다 자기 친척의 이름으로 세집 한 채를 맡고 투도구방면의 폭동지휘 최형익과 차정숙(친척사이)을 가짜부부로 살림을 차려주어 사람들의 이목을 흐려놓게 하였다. 집은 승지촌에서 좀 떨어진 독립가옥이여서 지하활동으로 쓰기가 편리했다. 이리하여 이곳은 당시 연변특별지부와 “붉은 5월투쟁”지휘부 성원들의 비밀거점으로 되었다.
  
1930년4월24일, 승지촌 오원세네 집에서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집행하러 연변에 파견되여온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와 마준,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 왕경(일명 리완룡), 위원 이복해(伊福海), 조선공산당(엠엘파)동만도책임자 김근, 원 조선공산당 당원 김철, 엠엘파계렬의 고려청년회 동만도책임간부 등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붉은 5월투쟁”행동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고들었다. 우선 이번 “<5.1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연변당부와 본 특파원은 4월24일 <5.1행동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책임이 김한봉(金漢峰, 전임 엠엘계 연변책임), 위원에 박XX, 만(萬)XX(전임 엠엘계 Y책임), 김평철(金平鐵, 폭파총지휘)외 2명의 중국동지(이름 미상)들로 구성되였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회의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부를 세우자!”등 구호들을 제출하여 투쟁방향을 똑똑히 했으며 투쟁력략을 제정하고 각자 인민들은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밑에 일떠나 파업, 동맹휴학, 농민폭동 등 형식으로 “붉은 5월투쟁”속으로 뛰여들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5.1"투쟁
1930년5월, 중공연변특별지부와 “5.1투쟁행동위원회”의 령도밑에 연변 각지의 농민, 로동자, 학생들은 반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파업, 동맹휴학, 시위행진 등을 성세호대하게 단행했다.
  
“5.1”투쟁은 륙도구(룡정)로동자와 학생들의 파업, 동맹휴학을 선두로 일어났다. 당시 륙도구에는 200여명의 로동자들이 한결같이 참가했다. 이들 로동자들은 철도로동자 30여명외에 양말, 인쇄, 목상(木商), 목공, 철공 등 로동자들이였는데 대부분이 조선족들이였다.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중앙학교(원 보통학교)를 제외한 20여개 학교에서도 모두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당시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는 성당위에 보내는 보고서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4월27일부터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성적은 다음과 같다. “5.1”삐라를 도합 1만7000부를 찍었으며 연변의 한인 각파에 “5.1”투쟁에 참가할 것을 호소한 선언을 도합 3000부를 찍었다. 륙도구에서 기념파업과 동맹휴학을 실시하고(200여명 로동자들이 참가) 평강 석문자(石門子)등지에서 기념대회를 열었으며 반제대동맹을 조직하고 쏘베트대표회대표의 로자를 모금하였다. 그리고 백색테로를 방비하여 농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5월5일 약수동에서 농민들을 조직하여 시위하였는데 참가한 농민이 도합 600여명이다. 5월21일 화룡현가에서 현립제1학교를 중심으로 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국민당의 당화교육을 반대하는 구호와 식민지교육을 반대하며 사립학교봉쇄를 반대하는 구호를 높이 부르며 각자는 손에 작은 붉은기를 들고 연변당부에서 내보낸 삐라를 산발하였다. 5월23일 화룡현 사립명동소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들과 농민군중들은 련합하여 현립제1학교에서 단행한 같은 성격의 군중대시위를 거행하면서(참가군중 약 600명) 일찍 명동학교사건으로 체포되였던 3명을 구출해왔다.
  
“붉은5월투쟁”은 룡정과 투도구일대에서만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개산툰 자동, 북하마탕, 연길현 팔도구, 돈화, 액목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5월27일 약수동과 부근의 군중들은 집회를 가지고 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포하였다.
  
"5.30"폭동
“붉은5월투쟁”이 심입됨에 따라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5.30”참안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모든 행동은 계획대로 진척되였다. 하여 1930년5월29일 밤 삼도구충신장(지금의 화룡시소재지)에서 친일지주 로명화, 김주황의 집을 소각하는 것으로 폭동의 봉화가 지펴지였다. 폭동대오는 이날 저녁 평양려관에다도 불을 놓았다. 청파호부근에 파견된 폭동대오는 부근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전선대를 찍어넘겼다. 삼도구지대의 폭동을 서막으로 투도구, 룡정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폭동이 료원의 불길마냥 타오르기 시작했다.
30일 밤에 룡정에서 대폭동에 들어갔는데 그때 상황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때는 왔다. 5월30일 밤 자정! 대륙의 도시 龍井村의 여름밤은 깊었고 만뢰(萬籟)는 고요한중에 순경의 칼날과 눈총을 피하여 가며 하나, 둘, 열, 백, 천으로 모이는 군중은 약속과 같이 東山大陸고무간판밑에 잠복하였다. 이때이다. 新興학교의 뒷산인 北山정상에서 폭동책임자 金喆은 회중전등으로 개전의 암호를 하였으니, 응원대의 합성에 응하여 직접행동대는 령사관, 정차장, 기관차, 전기공사, 철도 등을 차례로 방화하고 살상의 시가전이 연출되였다. 화광은 충천하고 총성은 은은하여 함성과 비명이 소란한 주에 령사관에서는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많은 군중이 쓰러졌으며 31일 아침까지에 電燈公司는 5000圓가량의 손해를 입었고 海蘭河철교는 무너지고 東拓會社에는 폭탄이 투척되였다. 이같이 룡정촌에서뿐만아니라 폭동의 계획은 전부 실현되였으니 同日 同時에 和龍, 延吉. 頭道溝등 간도일대는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투도구의 주요한 폭동공격목표는 투도구일본령사분관, 조선인거류민회, 보통학교, 상부국, 중국군병영, 공안국 및 친일지주 자택이였다. 폭동준비를 위하여 폭동지휘부에서는 소성규률 평강지역에 파견하였다. 소성규는 구지대의 폭동지휘를 책임진 김윤봉을 찾아가 세린하 와룡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중평리, 약수동, 세린하, 강겅, 룡수평, 소오도구 등지에서 온 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구체적인 폭동방안을 연구하였다. 와룡동회의에서는 폭동시간과 공격목표를 정한후 폭동대를 파괴, 방화, 응원 등 3개 대로 나누고 해란강을 계선으로 수남, 수북 두갈래로 각기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5월30일 밤, 해란강이남의 70여명 폭동대는 홍혜순, 오창길, 김응수 등의 지휘밑에 투도구남쪽 해란강다리목 버들방천에 와 매복하였다. 해란강이북의 폭동대들도 박세진, 박상활, 리경천 등의 지휘밑에 투도구 북산언덕에 이르렀다. 약수동, 장인강, 세린하 등 일대의 군중들로 구성된 수북폭동대오는 렵총 18자루와 석유, 솜 등 물건들을 가지고 폭동신호를 기다렸다.
  
밤 11시, 투도구시내의 민회사무실이 불에 타는 것을 신호로 수남, 수북의 폭동대는 사전의 계획대로 행동을 시작하였다. 응원대는 렵총을 쏘고 폭죽에 불을 달아 석유통에 넣어 기관총소리처럼 울리게 하였다. 총소리, 폭죽소리에 놀란 일본령사관의 경찰들과 중국상부국경관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보통소학교가 소각되고 친일주구의 자택도 불에 탔으며 일본령사관의 담벽은 폭동대의 사격에 의해 탄알자리가 어수선하였다. 수남폭동대는 철수하면서 사도구(룡호촌)의 일본보조서당을 소각해버렸다.
  
룡정폭동대의 주요한 공격목표는 대륙고무공장, 전기회사, 동척회사, 해란강철교, 기관고, 신흥학교뒤산 정상 등이였다. 5월30일 밤 대흥전기회사를 파괴할 임무를 맡은 폭동대는 도끼, 몽둥이, 석유 등을 가지고 전기회사에 가 보초놈을 까눕히고 전기회사뜨락으로 쳐들어갔다. 폭동대원들은 송전용전선대를 도끼로 찍어넘기고 송전실에 들어가 새로 가설한 배전판의 저항기, 전류계 등을 파괴해버렸다. 이리하여 룡정과 투도구 시내는 삽시에 암흑세계로 변하였다.
  
연변인민들의 혁명투쟁에 간담이 서늘해난 일제는 피비린 탄압을 감행했다. 일제경찰은 김근 등 67명의 혁명자를 체포하고 39명을 서대문형무소에 압송하였다. 폭동책임자인 김근은 사형에 언도되고 소성규는 무기형, 황진영은 10년형에 언도되였다. 이것이 “제4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29. 약수동 쏘베트정부

 

유서깊은 약수동
투도진을 떠난 취재차는 누른색을 띠게 시작한 룡문벌을 누비면서 달렸다. 아동저수지에 채 닿기전인 나지막한 언덕우로 뻗은 오른쪽 길로 가면 약수동이라 한다. 언덕길에 올라서니 생각밖에도 꽤 널직한 산벌이 펼쳐졌다. 농한기여서인지 밭에도 마을에도 사람그림자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길가에 나타난 짙은 농부차림의 사람과 약수동쏘베트유적지가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쏘베트>라는 것이 뭠두?”하고 눈이 둥그래진다. 구구히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지라 기념비같은 것을 세운곳이 어디 없는가고 물으니 손가락질로 마을밖을 가리킨다. 바라보니 좀 멀리 눈에 확 띄우는 버드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그 주위에 하얀 비석으로 보이는 물체가 알렸다. 거기까지 풀이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올퉁불퉁한 수레길이 뻗어있었다.
  
농부가 가리킨쪽으로 간신히 차를 몰아가니 아닌게 아니라 약수동쏘베트유적지였다. 기념비는 두곳에 세워져있었다.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 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 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년6월1일”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금방 뒤에 세워진 목비는 이미 거묵하게 썩기 시작하고있었는데 손톱으로 뜯어보니 나무보풀이 쉽게 떨어졌다. 앞면에는 조한문으로 “약수동항일기념지”라고 씌여져있는데 짙은 옥색만은 색바래지 않고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역시 조한문으로 씌여져있었다.
  
1930년5월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6월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7월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 조직부장은 리주헌, 선전부장은 황룡문, 비서는 윤준걸, 유일환이였다. 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 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8월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 조직부장은 정만준, 선전부장은 한별, 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목비 왼면에는 “一九八六年九月三日”이라고 씌여져있고 오른쪽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조한글자)”라고 씌여져있었다. 글자가 희미하고 어떤 것은 지워져있어서 조한글자를 대조해보면서 겨우 이만큼 맞출수가 있었다. 기념비뒤에는 한그루의 오얏나무가 휘여지게 자라고있었는데 색고운 오얏들이 얼핏얼핏 눈에 띄였다. 그뒤로는 해바라기밭이 펼쳐져있는데 둥실한 해바라기꽃들이 환히 웃고있었다. 해바라기밭은 살구나무과원과 잡목으로 우거진 산자락을 배경하고있어 한결 우아해보였다.
  
금방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있었는데 개울물소리가 가을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한결 정다왔다. 한길가량 되어보이는 얕은 골짜기를 건너뛰여 이번엔 새롭게 세운 기념석비를 가보았다.
화강암으로 다듬은 2메터남짓 되어보이는 기념석비정면에는 “약수동항일기념비(조한문)”, “순난렬사만세!(조한문)”라는 짙은 붉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5월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 약수동, 투도구, 달라자, 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또 지주, 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5월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이는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의 탄생이였다. 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 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었다. 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농민, 무권리 농민들에게 권리가 차례졌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에 있으랴. 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 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 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 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 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같은해 8월말 중공평강구위에서는 약수동의 농민들을 령도하여 재차 토지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약수동 웃마을의 약수동쏘베트가 창립되던곳에서 또다시 쏘베트대표대회를 열고 “쏘베트건립대회결의안”을 채택하고 평강구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고했다. 대회에서는 리봉삼(李鳳三)이 구쏘베트정부 주석으로 당선되고 정부내에는 선전, 행정, 경제, 군사 등 부서를 두었다. 같은해 10월 중공평강구위는 투쟁의 수요에 따라 약수동을 떠나 장인강쪽으로 이동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잠시 취소하고 농민협회가 쏘베트정부의 사업을 대체하게 하였다.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위대한 사변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 “좌”경로선의 산물이였다. 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족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 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약수동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의 교훈은 <좌>경이였습니다. 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회의장소는 쏘베트정부가 있던 마을(지금의 약수동마을 서북쪽 1.5킬로메터되는 산기슭)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던 70여평방메터되는 조선식초가집이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집터자리가 약간 남아있을뿐이다.
  
1930년7월,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 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 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족농민투쟁과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인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 약수동은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했다.
  
1930년8월13일, 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 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 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 마준, 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 한별, 리용국의 전(全, 양말제조로동자), 최(건축로동자), 리(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 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족), 조직부장 마준(조선족), 선전부장 한별(조선족),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족),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족), 녀성부장 김여신(녀, 조선족)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당의 최고기관이였다. 중심현위가 건립된후 그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으로 발전하였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적위대, 유격대 등 물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 당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혁명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
 
30. 약수동의 두 항일투사

 

두다리를 잃은 박상활 기여서 적을 유인 비밀 고수하기 위해 김순희 혀를 물어끊어
  
약수동의 버드나무
새롭게 세운 약수동항일기념비의 오른쪽에는 보기만 해도 름름한 천지만엽의 울창한 버드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얼싸안아보니 두아름도 더 되었다. 멀리서 보이던 그 버드나무였다. 버드나무주위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깨끗이 정비되여있었다. 버드나무 그늘밑에는 자그마한 하얀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는데 비석주위를 붉은 벽돌로 다져놓아 아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비석과 버드나무는 나지막한 나무바자에 둘어져있는데 바자에다 자그마한 문까지 달아놓아 드나들 때 그 문을 여닫아야 했다. 비석앞면에는 이런 글자가 진붉게 새겨져있었다.
  
抗日烈士朴相活永垂不朽
中共龍門鄕委員會
龍門鄕人民政府
  
자그마한 바자문을 열고 들어가 비석 뒷면을 살펴보니 박상활동지의 혁명간력이 이렇게 새겨져있었다.
  
朴相活同志革命歷史簡介
一九0四年吉林省和龍縣龍水鄕石國村農民家庭中生, 一九二四年十一月參加抗日工作, 一九三一年九月安圖縣倒木溝赤韋對責任人之一, 一九三六年迷昏鎭東北人民革命軍第一軍二師任軍需部長, 一九三七年十二月四一和龍縣龍門鄕藥水洞抗日戰鬪中光榮犧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