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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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8.1》길돈무장폭동

 
분노한 폭동대오 지방군경과 격돌하고 악에 받친 지방군벌 피비린 탄압 강행
  
폭동의 획책
“1930년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제2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배하에 <혁명세력의 회복기>를 <혁명의 고조기>로 오인하고 전국적인 대폭동을 발동하여 <한개 성 또는 몇 개 성에서 먼저 혁명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전국혁명승리를 달성, 나아가서는 세계혁명의 승리를 추진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연변에서도 례외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0년 8월 1일, 돈화, 액목 지구의 조선족인민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 그 실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1930년의 “<8.1>길돈폭동(‘8.1’吉敦暴動)”의 력사적배경과 규모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중공중앙 “8.7”긴급회의의 “좌”경로선을 계속 집행하고있던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연변의 “붉은 5월 투쟁”을 거듭 긍정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벌릴 것을 지시하였다.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로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연변특별지부서기 왕경이 돌아왔다. 그는 “붉은 5월 투쟁”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연변의 대중운동을 한걸음 더 추진하기 위하여 “8.1”봉기를 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8.1>길돈폭동은 얼마전에 있었던 <5.30>폭동과 달랐습니다. <5.30>폭동에서 주요한 예봉을 일제에게 돌렸다면 이번 폭동에서는 그 예봉을 주요하게 중국지방군경에게 돌린것입니다. 폭동의 목적은 중국지방군경의 무기를 탈취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색유격대를 창건하며 지방쏘베트정권을 수립하기 위한것이였다.”
박창욱선생은 이번 폭동의 목적을 설명했다.
  
1930년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김(金), 왕(王)성씨를 가진 두 사람을 순시원으로 연변에 파견하였다. 순시원은 돈화에 간후 모아산(현재의 현유향 모아산)에서 간부련석회의를 열고 폭동에 해당된 문제들을 토의하고 폭동계획을 연구하였다. 회의에서는 이번 폭동의 총지휘를 중공길돈림시당부의 마천목(馬天穆)이 맡는다고 선포하였다. 조선족이며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마천목은 북벌전쟁이 실패한후 연변에 돌아와 혁명활동을 벌리고있었다.
  
총지휘산하에 행동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황세형(黃世亨)이 위원장을 맡고 조직부장을 강세일(姜世一), 선전부장을 한광우(韓光宇)가 맡았다. 총지휘부산하에 3개 폭동대대를 두었다.
  
제1대대는 액목대대로서 김명균(金明均)의 지휘하에 7개 파괴대와 2개 습격대로 편성, 총인원수는 200여명이였다. 파괴대는 신참-길림간의 2개 철교를 파괴하고 신참-교하, 교하-내자산, 교하-황송전, 교하-이갑자 구간의 전선을 끊고 습격대는 이갑자구와 관지의 주둔군 병영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제2대대는 동화대대로서 강세일, 리학경이 지휘했다. 총인원수는 400여명이였다. 이들은 남황니허의 현공안국 제3분주소, 신개도보위단 제1정대 제1분대의 병영, 마호주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여 적들의 무기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제3대대는 교하대대로서 지휘는 한일광이 맡았다. 이들은 교하북쪽에 있는 위구참의 보감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노한 파도마냥
1930년 7월 31일 밤, 각지의 폭동대원들은 예정한 지점에 집결하였다가 이튿날인 8월 1일 새벽 2시에 동시에 폭동을 일으킨다. 액목대대의 파괴대는 길림-교하-돈화-신참구간의 교통과 통신망을 단절시켜 폭동이 순조롭게 진척되도록 담보하였다.
  
8월 1일 새벽 돈화대대의 김익수가 지휘하는 40여명 폭동대는 양포, 칠성자권총, 자작폭탄 그리고 몽둥이 등을 지니고 신개도의 보위퇀 제1분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폭동대 대원들은 병영의 동쪽 담벽을 뛰여넘어 들어가서 병영안에 수류탄을 뿌리고 양포를 쏘았다. 16명의 사병은 7월28일에 모두 산에 들어가 약담배수색을 하게 되어 이날 병영에는 5명의 잡부들뿐이였는데 폭동대원들의 공격에 2명의 잡부가 경상을 입었다. 잡부들은 놀란나머지 사시나무떨 듯 와들와들 떨뿐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폭동대원들은 무기고에 돌격해들어가 16자루의 보총과 탄알 1000여발을 로획한후 병영에다 불을 지르고 철퇴하였다.
  
마호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력을 습격할 임무를 맡은 100여명의 폭동대원들은 지휘 한광우의 지령에 따라 먼저 3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어둠을 타서 병영동쪽의 흙담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마호는 돈화에서 따푸차이허, 화전등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이며 목단강상류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지대이다.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폭동대원들은 이미 개척한 통로를 담벽안으로 쳐들어갔으나 보초병에게 발견되여 반격을 받게 되었다. 약 2시간동안의 접전을 거쳐 적병 7명이 부상을 입고 폭동대원 조규선, 박팔암 등 3명이 희생되고 20여명이 체포되였다. 폭동대는 부득불 남산방향으로 철퇴하였다.
  
8월1일 새벽 2시, 홍일산(洪一山), 윤순찬(尹順燦), 리병호(李炳浩)가 거느린 20여명 퐁동대원은 남황니허에 있는 현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였다. 폭동대원들은 분주소의 서쪽 담벽을 뛰여넘어 돌아가 보초병을 까눕히고 병영을 향해 보총을 쏘고 작탄을 던지면서 맹공격을 들이대여 2명의 경찰을 부상입혔다. 그러나 경찰들이 미친 듯이 반격하는 바람에 폭동대원들은 할수 없이 철퇴하고말았다.
  
정철호(鄭哲浩), 리범룡(李範龍)이 이끄는 100여명의 액목습격대의 폭동대원들은 8월 1일 새벽 관지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8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습격대는 병영 서남쪽 널바지를 뚫고들어가 작탄으로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 한자루와 탄알 50발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맹사격을 퍼부었다. 폭탄소리에 놀라 깨여난 관병들은 즉시 총을 들고 반격하여 많은 폭동대원들이 체포되였고 3명의 폭동대원이 희생되였다. (그후 8월 15일 저녁 29명의 폭동대원이 재차 8중대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날 새벽 액목대대의 일부 습격대원들은 액목현세무분국에 쳐들어가 세무문서, 계약문서 등을 소각해버리고 피복류와 현금 등을 로획, 2명의 세무일군을 부상입혔다. 폭동대원들은 또한 지방정부의 량식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무상으로 한족농민들과 조선족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3대대인 교하대대도 한일광(원 서상파 공청회남만지구책임자)의 지휘하에 이리하, 의기구, 의기장자, 단산자와 교하남쪽 10킬로메터 지점에 있는 남대툰 등지 민중들을 동원하여 세갈래로 진격하여 교하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의 보갑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7월31일 정로인을 보내여 적정을 탐지한 후 이리하일대의 100여명 폭동대원은 검성중학교 출신인 림학선(林學善), 최무갑(崔武甲) 등의 인솔하에 도끼, 괭이, 몽둥이 등을 지니고 이리하 강물을 건너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위구참을 향해 떠났다. 마을의 부녀들도 폭동대원들이 먹을 밥과 삶은 옥수수 등을 이고 폭동대원들 따라나섰다. 남강자에서도 권태산(權泰山)등이 령솔하는 40여명 폭동대원이 소부태하를 건너 의기구에 도착하여 그곳의 폭동대와 합세하였다. 남강자와 의기구의 두 폭동대는 문성국(文成國)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위구참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남대툰의 20여명 폭동대원도 한일광이 지휘하에 5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을 향해 31일 대낮에 떠나 오림구쪽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곡괭이, 삽, 도끼 등을 들고 일하러 가는 농군처럼 가장하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림구를 거쳐 위구참으로 떠났다.
  
세갈래 폭동대오는 위구참부근에서 합세하여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예정된 계획대로 보갑소와 륙군보위단 병영을 포위하였다. 폭동대는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보초병의 고함소리에 놀란 관병들이 총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반격했다. 곡괭이, 삽, 도끼 등 원시적인 무기밖에 없는 폭동대원들은 마구 퍼붓는 총탄앞에서 더는 진공할수 없었다. 하여 뿔뿔이 헤쳐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탄압
민중들의 공격을 받은 지방군벌들은 악에 받쳐 폭동군중들을 참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길림에 “방공사무처”를 설립, 12월에는 “길림성비적사령부”를 신설하였으며 “길림성관민이 공산비적을 방지, 토벌할데 관한 장려 및 징벌규정”, “길림경찰, 보위단의 공산운동방지법”등 수십가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륙군보병 제7려단 제19련대와 제13려단 제7련대를 동원시켜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8.1”길돈폭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13려단 제7련대 련대장 왕수당은 300여명 전예부대를 거느리고 동화에 와 본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주둔하고있는 공안경찰과 보위단을 모조리 출동시켜 도처에서 혁명군중을 체포하였다. 지방군경들이 초보적통계에 의하면 돈화에 있는 제7련대 본부 창고에 70여명, 교하공안국에 78명 도합 277명이 체포구금되였다. 봉기에서 실패한 폭동대의 대부분은 이미 적들의 탄압을 피하여 부근 산중에 들어가 은페하여있었기에 구금된 대부분은 무고한 민중들이였다. 8월26일부터 27일까지 지방군경들이 체포한 사람들을 심문한 끝에 대부분 군중을 석방하고 협의가 있는 21명을 계속 감금하였다. 그중 리상수 등 15명은 돈화현성밖에서 군경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였다. 향수하자에서는 12월중순 2명이 희생되였으며 길돈림시당부의 책임자였던 마천목도 1930년 교하감옥에서 희생되였다. 이번 폭동의 지휘자들인 리형준, 한일광 등은 길림감옥에 압송되였으나 “9.18”사변후 전부 석방되여 연변에 나와 투쟁을 견지하였다.
  
이번 폭동의 실패원인과 의의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공산당의 제1차<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도하에 진행되였기에 모험적이고 맹목적이였다. 만주성위와 연변당조직이 나이가 어리고 투쟁경험이 결핍했다. 투쟁의 예봉을 일제침략자들한테 돌린 것이 아니라 지방군벌에게 돌렸다.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지방군벌세력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족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정신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폭동을 통하여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민족평등정책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며 투쟁방향을 명확히 할수 있었다. 이번 폭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은 길돈지구 조선족인민들속에 더욱 깊이 침투되였고 조선족인민들속에서 당조직과 혁명단체가 신속히 확대되여나갔다.”
 
32. 간도농민폭동

 

반년사이 680여차 폭동 일으켜 봉건세력 타격 토지혁명 단행
  
중공동만특위 건립
“<8.1>길돈폭동을 뒤이어 연변 각지에서는 련이어 폭동이 일어났는데 <5.30>폭동이 일어난 1930년 후반년에만 하여도 크고 작은 폭동이 선후로 680여차나 일어났습니다. 촌마다에 폭동위원회가 건립되였고 농민들은 <폭동! 폭동! 또 폭동!>의 구호를 부르면서 열광적인 기분으로 투쟁에 림했습니다. 이러한 폭동은 모두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일어났는데 목적은 토지혁명의 실현과 유격대와 유격근거지의 창건에 있었습니다. 력사상에서 이 폭동을 <간도농민폭동>이라고 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에서의 그번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제2차“좌”경로선의 영향하에서 범한 “좌”경모험주의였고 투쟁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중외반동세력에 대해 여지없이 타격했고 광범한 군중들속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심각히 심어주었으며 당의 기층조직은 물론 공청단, 농민협회, 반제동맹, 반일회 등 군중단체가 크게 확대되게 하였는바 튼튼한 군중기초와 간부기초를 닦아놓았다고 지적하였다.
  
1930년 9월 20일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료여원은 성당위에 “동만의 길돈철도연선 각 현을 순시한데 대한 사업보고”를 제기, 25일 료여원의 보고에 근거하여 만주성위에서는 “지시편지”를 발부하여 동만특위를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안도, 무송, 화전, 액목, 장백 등 10개 현을 동만특위에서 령도하기로 결정했다. “지시편지”는 동만의 금후 중심임무와 책략 및 조직건설, 선전 등 문제를 상세히 천명했다.
  
10월 10일, 료여원(蓼如院)과 양림(楊林)은 성당위의 “지시편지를”를 지니고 연변에 와 중공연화중심현위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지시편지”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건립했다. 특별위원회는 료여원, 양림, 왕경, 주건, 류지원, 리용, 리용국 등 7명으로 구성, 료여원이 서기를 맡았다. 조직부장을 왕경, 선전부장을 주건, 교통부장을 리용, 비서처장을 라일, 청년부장을 리용국, 부녀부장을 리인활이 맡았다. 성당위의 지시정신에 좇아 연변지구의 반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회의에서는 중곡동만특별위원회 군사위원회를 설립, 양림이 군사위원회서기로 되었다. 위원회는 양림, 류지원, 송국서 등 3인조로 구성되였다.
  
성세호대한 폭동
1930년 9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우경사상을 극복하고”, “토지혁명을 심입전개하며”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고” “지주의 일체 토지를 몰수할것”을 동만당조직에 지시하고 돈화와 연변의 유격대를 정돈하여 “홍군 제44군을 창건”하며 “각지에서 유격전쟁을 벌릴것”을 호소하였다. 동만의 당조직에서는 성당위의 지시와 호소를 관철하여 전 동만적으로 되는 “추수폭동”을 성세호대하게 벌렸다.
  
9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군중들은 당조직의 지도밑에 건립된 “폭동위원회”와 “행동위원회”의 조직하에 봉기를 일으키고 친일주구와 악질지주들을 청산, 그들의 가옥을 불살라버렸으며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적의 거점에 폭탄을 던지고 현금, 무기 등을 탈취하였으며 지주, 부농, 고리대업자들의 토지문서, 소작계약, 고리대문서 등을 불살라버렸다. 10월에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489명 군중이 유격전에 참가하여 일제주구 33명을 처단, 악질지주의 가옥 29채를 소각하였으며 반동문서들을 불사르고 지주의 곡식창고를 열어 빈고농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었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길철수)는 당시 “조선일보”1931년 4월 12일에 실린 간도농민폭동에 대한 기사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작년 1년동안에 조선인 공산당원이 길림내에서 폭동을 일으킨 피해조사가 성내 각 현정부로부터 길림성정부에 도달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1년동안에 공산당의 폭동사건의 피해 상황은 아래와 같다.
길림성 간도의 연변은 폭동의 중심지였는데 사건이 한번 발생(5.30폭동)하자 뒤이어 일어난 것은 실로 680회의 사방자 160여명으로 금후도 그 운동이 어데까지 미칠는지 예측할수 없다.
  
폭동사건 총계 684건
조선인피살자 116명
중국인피살자 47명
조선인부상자 47명
중국인부상자 27명
방화소각가옥 253채
방화소각학교 34소
전신, 전화시설 피해 41건

투쟁가운데서 각지에서는 쏘베트정부, 혁명위원회 등을 건립하고 적위대, 적색유격대를 창립하였다. 중공연화현위원회에서는 평강구에서 연화현혁명위원회를 내오고 농민협회를 조직하였다. 혁명위원회 산하에 토지부, 군사부를 두고 토지혁명과 유격대, 적위대건립을 지도하였다. 각지 당조직의 노력밑에 중공동만특위산하에 유격대, 연화현혁명위원회 산하에 적색유격대 그리고 라자구, 평강, 개산툰, 삼도구와 길돈 등 지구에 8개 무장대오가 조직되여 홍군의 창건을 위한 무장탈취, 군자금모집 등 투쟁을 벌렸다.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
기세드높은 대중폭동은 일제와 지방정부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이미 있는 400여명의 경찰외에 조선으로부터 106명 경찰을 보충받고 군벌정부와 야합하여 대 “토벌”을 감행했다. 중국군벌정부에서는 9월 25일에는 또 “길림성비적토벌사령부”를 새로 앉히고 일련의 반공조례와 “법규”에 관한 훈련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2개 퇀의 병력을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 배치하여 “폭동”을 탄압하게 하였다. 1930년 6월부터 6개월간 일제는 전후 34차에 걸쳐 880명의 조선족혁명군중을 체포하였고 19명의 한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족혁명간부와 농민들이였다. 이번 대탄압에서 일제간도총령사관에서 접수한 체포된 인원은 1200여명(군벌정부 군경이 체포한 중요인원도 인계받았음)이였다. 반동적이고 친일적이며 부패무능한 군벌정부는 체포한 조선족혁명가들을 일제의 요구대로 일본령사관에 넘겨주었다. 하여 일제는 연변의 내정을 공개적으로 간섭하여 1200여명의 “피고자”들을 재판하였다.
  
이번 탄압사건에서 1200여명은 일본령사관의 “령사재판권”에 의하여 “초심”을 거쳤는데 “초심”중 갖은 혹형을 자행하였기에 10명이 옥사하였다. 600명은 “무죄석방”되였으나 수개월 내지 1년을 옥고를 치렀고 갖은 혹형을 받았으며 석방이후에도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올라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나머지 430명은 서울에 압송되였다. 일제는 430명의 “수인”을 40여차에 걸쳐 압송하였고 공판에 수요되는 총포, 작탄, 칼, 석부, 석괴와 선전삐라, 문건 등 5000여건을 2대의 트럭에 꽉 박아싣고 서울에 송치하였다.
  
서울형무소에서는 그들을 “예심취조”하였는데 “예심취조”중 강렬모 등 20여명이 중병으로 하여 옥중에서 죽었거나 보석되여 집으로 돌아와 사망되고 그 외의 1명은 보석중이여서 “예심”에 참가 못하고 나머지 390명이 24가지 “죄명”으로 예심종결을 끝마쳤다. 그중 백규찬 등 118명이 “면소처분”을 받고 1932년 12월에 석방되였으니 실제상 2년의 옥고를 치른셈이였다. 결국 그 외의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였다. 그런데 공판에 회부된 이후 강경모 등 10명이 옥사하고 그 외 4명은 중병으로 재판장에 나올수 없어 결국 출정한이는 260명이였다.
  
일제는 “피고”들을 취조하는 한편 서울에다 7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재판소를 보수하느라고 3년동안 애를 썼다. 드디여 1933년 9월 25일 이들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였다. 이처럼 규모가 큰 “대사건”의 판결은 조선국네에서는 처음으로 있은 사건이였다. 이번 “간도폭동”공판은 대체로 18차에 걸쳐 진행되였는데 재판소는 이미 보수되였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재판소까지 “피고”들을 압송하는 것이 놈들에게는 “골치아픈 일”이였다.
  
1933년 9월 22일, 23일, 24일 동아일보에 련재된 보도에 의하면 상기 서대문형무소에서 정동골목을 빠져서 재판소에 이르는 로정에는 종로경찰서 경관 50명이 총동원되고 그것도 부족하여 서울시 각 경찰서에서 100명의 경찰을 더 동원하여 도합 150명의 경찰과 일본헌병대가 출동되여 이른아침부터 비상경계를 실시하여 물샐틈없이 경계망을 늘여놓고 “피고”들을 경전(京電)뻐스 한 대에 20명씩 7~8대의 버스에 실어 2차에 나누어 압송하였는데 공판이 18회나 되다보니 모두 36차를 래왕하였다 한다.
  
공판이라야 형식에 불과하여 “피고”측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있을수 없고 다만 검사들이 “죄상”을 공소하고 재판장이 “심문”하면 “피고”들이 답변할뿐이였다. 놈들은 폭동의 현상만을 렬거하여 이른바 “살인, 방화, 강도, 절도, 총기취체위반”등 24가지 달하는 “죄상”을 “피고”들에게 들씌웠다. 그러나 리동선, 주현갑, 고하경 등 혁명가들은 공판장을 일제침략자들의 침략죄행을 성토하는 장소로 삼고 떳떳이 항변하였다.
  
공판에서 사형받은이들로는 리동선, 최관옥, 로창호, 김광묵, 김동필, 류태순, 김응수, 고하경, 민창식, 지련호, 박금철, 김봉돌, 조동률, 리성철, 귄태산, 허완진, 박동필, 김룡운, 리종립, 김금난, 박익섭, 주현갑 등 22명이고 무기도형을 받은이들로는 김명원, 박봉현, 차병철, 안응손, 김준걸 등 5명이였다.
  
1936년 7월 20일과 21일, 22명의 혁명자들은 적기가를 부르면서 적들의 교형장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의 결말이다.
 
33. 추수춘황투쟁

 

추수춘황투쟁 -농민들 지주 낟가리 허물어 “감조감식”실현 기아속에서 지주들의 창고문 열어 봄식량 해결

“9.18”사변

1931년 9월18일 밤, 일본관동군은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하고 동북을 침략하는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9.18”사변이 발생한 이튼날 연길지수사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 길흥(吉興)은 한간이며 길림부사령관공서 참모장인 회흡의 지시에 좇아 대표를 파견하여 룡정총령사관에가 투항하고말았다. 하여 일제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연변을 삼켜버렸다. 이때로부터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전 동북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철제밑에서 가증스러운 식민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9.18”사변이 발생한 사흗날인 9월20일 중국공산당은 전국 여러 민족들이 정의의 요구를 대표하여 “동북3성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강점을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인민은 일떠나 항일구국할 것을 호소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도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에 대한 무장점령과 목전 당의 긴급임무에 대한 결의”를 지었다. 만주성위에서는 또한 “만주의 조선인 로동자, 농민, 학생 및 로고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의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있는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여러 민족 인민들과 일치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고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9월 28일, 중국동만특위에서도 긴급회의를 열고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전달했다. 동만특위에서는 “일제의 만주점령을 반대하는 긴급결의안”, “일본의 만주점령을 반대하여 대중들에게 알리는 글”, “농민운동 결의안”, “사병운동 결의안” 등 일련의 문건들을 련이어 발표하여 항일구국운동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하여 연변 각지에서는 각종 반일단체들이 조직되였고 여러 가지 형식의 반일운동이 전개되였다. 당의 령도밑에 있는 “반일회”, “반제동맹”, “농민협회”등 대중단체들이 분분히 일떠나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당시 연변각지에서 성세호대하게 벌어졌던 “추수투쟁”, “춘황투쟁”은 이러한 력사적환경에서 벌어졌다.

추수투쟁

1931년 봄, 동북군벌정부산하 길림성정부에서는 “3.7”, “4.6”감조법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지주들은 이 법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이 기회를 빌어 광범한 농민들에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3.7’, ‘4.6’제를 실시하자”는 투쟁구호를 내놓고 추수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9월, 연길현 로투구부근의 관도구와 대기동 등지의 800여명의 농민이 먼저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추수투쟁의 첫 불길을 지펴올렸다. 그들은 중공로투구구위의 령도하에 시위행진을 거행하였으며 지주 장원을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소작농들에게 분배해주었다.

투쟁의 불길은 재빨리 전연변을 휩쓸었다. 연길의 소영자, 화룡현의 자동, 삼동포, 천평, 후동, 왕청현의 배초구, 소왕청, 훈춘현의 경신, 밀강 등 곳들에서 련이어 투쟁이 일어났다. 이번 투쟁에 약 1만5000여명의 농민이 참가했는데 투쟁은 4개월동안이나 지속되였다.

동만 각지에서 일어난 “추수투쟁”가운데서 연길현의 “추수투쟁”이 가장 기세가 높았다. 1931년 10월 연길현위에서는 동만특위의 지시에 좇아 추수투쟁을 발동하기로 결정짓고 현위서기 김성도를 마반산지구에 파견, 직접 투쟁을 지도하게 했다. 11월 중공 해란구위와 연길구위는 합의를 본후 먼저 화련리, 계림촌, 하동, 온림동, 마반산, 부암, 광흥촌, 소영촌의 농민들을 발동하여 감조감식을 기본내용으로 한 추수투쟁을 벌리였다. 각 촌 농민대표회의에서 강태익 등 5명을 대표로 선출하여 11월 5일 소영촌 대지주 임보성과 감조감식에 대한 담판을 진행하기로 토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흥촌 서구공안분주소 순경들은 선손을 써서 종민대표 5명을 체포하여 분주소에 구금하였다.

이에 해란구위에서는 즉시 당, 단 지부, 반제동맹, 농민협회, 부녀회, 소선대, 적위대 등 몇백명을 동원하여 11월 6일 대표들을 구금하고있는 광흥촌 서구공안분주소를 겹겹이 포위하고 대표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군중들이 항의에 겁을 먹은 공안분주소 소장은 당장에서 대표 2명을 석방하고 3명은 국자가 연길현공안국에 압송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에 시위군중들은 공안분주소 소장을앞세우고 곧추 국자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연길구위의 선동으로 발동된 연길의 청년학생과 연길근교 농민 수백명이 달려나와 시위행렬에 가담하였는데 국자가에 닿았을 때 시위군중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현정부를 둘러싼 시위군중들은 현장을 나서라고 웨쳤다. 현장은 “민란”이 일어날가 두려워 구금된 농민대표 3명을 즉시 석방함과 동시에 감조감식에 대한 요구를 접수한다고 표했다.

농민시위군중들은 석방된 농민대표들을 데리고 소영촌 대지주 임보성네 집에 이르러 더 받아갔던 소작료를 도로 찾아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날 태양향, 팔도향을 포함한 팔구의 연집강, 와룡동, 소평, 광돌촌, 광석촌 일대의 농민군중 천여명도 국자가 동시장거리로 달려와 현정부를 포위하고있는 연길구, 해란구 농민시위대렬에 합세하였다. 임보성네 낟가리를 헤친구 그들은 그 길로 연길 서교에 있는 상발원대지주 장원으로 몰려갔다. 이 소식이 태평향에 전해지자 중편촌, 중흥촌, 횡도촌, 태흥촌, 회녕촌, 오합궁, 장승촌 등 여러 마을의 천여명 농민이 떨쳐나와 국자가에서 올라오는 시위대오에 합세했다.

상발원의 지주는 장사진을 이룬 시위대오를 보자 두눈이 뒤집혔다. 그는 황급히 국자가에 있는 민국군대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구원을 요청했다. 그자의 요청에 응해 민국군대 사령부에서는 기병 백여명을 파견하였다. 기병대는 농민시위대오를 앞질러와 해산하라고 으르댔다. 농민시위대오 지도자인 중공팔구 구위서기 리신준은 “골간 백명을 선발하여 핵심대오를 짓고 그 좌우에 군중대오를 정렬시켜 투쟁대렬을 편성할 것, 핵심대오는 어떠한 일이 있던지간에 헤쳐지지 말것”을 지시했다. 잠간사이에 투쟁대렬을 재편한 시위군중은백명의 핵심대원을 선두에 세우고 민국기병부대와 대결했다.

농민대표가 나서서 “우리는 성정부의 포고대로‘3.7’,‘4.6’제 실시를 요구할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하자 기병대지휘관이 “성정부의 포고대로 나눠주도록 우리가 보증할테니 해산하여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할수 없다. 우리는 오늘 직접 나눠가지겠다.” 농민대표의 단호한 대답이였다. 쌍방에서는 추호도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담판이 오래 끌게 되니 농민투쟁대오의 지휘부에서는 각 촌마다 투쟁에 참가한 농민들에게 밥을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어떤 촌에서는 소수레로 밥을 날라왔고 가까운 마을에서는 녀성들이 함지박에 음식을 담아이고 달려왔다. 민국기병대는 할수 없이 물러서면서 포고대로 곡식을 나눠가지라고 했다. 팔구농민투쟁대오는 계속하여 구수하방향으로 전진하면서 소평, 광동의 소지주들과 협상하여 순조롭게 감조감식을 실현하였다. 날이 저물자 이날 밤은 광동촌에서 묵었다. 이튿날 새벽 4시경부터 각촌에서 밥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시위농민들은 아침밥을 든든히 먹은후 광석촌의 지주 정전방의 집을 향해 떠나려고 서두르는데 팔도의 금광로동자 백여명이 달려와 핵심대렬에 가담했다. 하여 투쟁기세를 한결 더 높아졌다. 정전방은 성정부의 포고대로 “3.7”, “4.6”제를 인차 승인했다. 농민들은 낟가리를 헤치고 소작농들에게 곡식을 돌려주었다. 농민대오는 계속 전진하여 중흥촌 지주 수풍림과 온정풍네 집에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곱다란히 순종하였다. 대오는 승승장구로 횡도의 정영규지팡, 구제회지팡과 태흥의 심원지팡을 휩쓸었다. 지어 일본인 소유인 구제회 지팡에서는 농민투쟁대오를 친절히 맞이하고군 소리없이 감조를 접수했다.

회녕촌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고 사흘째 되던날 농민대오는 구수하일대에서 유명한 악질지주인 장전란과 맞다들게 되었다. 관청에서 허락해야 감조요구에 응하겠다면서 장전란은 토성대문을 걸어달고 뻗치였다. 투쟁지휘부에서는 대오를 두패로 나누었다. 핵심대렬에서 500명과 농민군중 2천여명을 뽑아 장가네 장원을 철통같이 포위한후 도망치거나 외계와 련계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고 또 핵심대원 500명과 농민군중 천여명으로 편성된 다른 한패의 투쟁대오는 곧추 횡도공안분주소로 향하였는데 이 두패 사이의 련락임무는 적위대와 소선대에서 맡았다. 농민들은 토지문제를 갑장을 찾아가 해결하라는 분주소 소장을 끌고 갑장을 찾아갔더니 갑장은 벌벌 떨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떼질썼다. 농민들은 갑장과 소장을 끌고 장가네 집으로 향했다. 이때 합세한 두 개 패의 농민투쟁대오는 4천여명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장전란, 갑장, 분주소 소장 등과 담판하는 사이에 팔도구보위퇀 퇀장이 병사 수십명을 데리고 달려왔다.

보위톼나 병사들이 총을 쏘겠다고 위협하면서 농민투쟁대오를 해산하라고 으르렁대자 지휘부에서는 미리 약정한 암호대로 령을 내리자 핵심투쟁대렬은 즉시 장사진으로 변하여 머리와 꼬리를 맞물려 보위퇀이며 순관이며 갑장이며 지주 장가놈을 에워쌌고 그 둘레에 수천면 군중이 포위하였다. 당황해난 퇀장은 상관하지 않겠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걸했고 소장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농민대표들은 지주 장전란이 협의서에 도장만 찍으면 다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양전란은 떨리는 손으로 협의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승리한 농민투쟁대오는 핵심대렬을 선두로 팔도향 장흥촌 지주 서다매태의 장원으로 향했다. 장전란이 굴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다메태는 순순히 협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투쟁대오가 팔도향 관할에 있는 정사빈지팡과 최석마지팡에 이르니 이 자들은 군말없이 감조요구를 접수하였다. 이밖에 각 촌 소지주들의 낟가리를 각 촌 농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사흘동안 진행된 팔구농민추수투쟁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춘황투쟁

추수투쟁에 이어 1932년 봄,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농민들의 봄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 및 그들의 봄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 및 그들의 주구를 타도하고 그들의 재산과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 “지주에게서 식량을‘꿔’기근을 넘기자!”는 등 구호를 제기하고 차량투쟁을 전개할 것을 농민들엑 호소하였다. 이 투쟁을 세칭 “춘황투쟁”이라고 한다.

1932년 2월, 연길현 의란구의 류채, 남양촌, 왕우구의 수백명 농민드이 당의 령도밑에서 “춘황투쟁”의 첫 포를 쏘았다. 농민투쟁대오는 구룡평에 있는 일본경찰분서를 포위, 습격하고 일제의 주구들을 청산하고 그들이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투쟁에서 체포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하여 농민대오는 구룡평 일본경찰분서를 향해 진격하였다. 일제는 경찰들과 괴뢰보안단을 출동시켜 군중들을 향해 총질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였다.

의란구의 “춘황투쟁”은 료원의 불길처럼 전 동만지구를 신속히 불태웠다. 로투구, 달라자, 개산툰, 대황구, 연통라자, 대감자의 농민들도 일어났다. 차량투쟁은 점차 주구청산투쟁, 무장탈취투쟁으로 넘어갔다. 많은 토호렬신, 친일지주들이 혼비백산해 뿔뿔히 도시로 도망쳐가는 바람에 대다수 농촌의 일급기층정권이 기본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완전히 당이 령도하는 혁명군중들의 통제하에 있었다.

기아에서 헤매이는 기민대중아
도시에서 농촌에서 일떠나서라
아사에로 농촌에서 착취제도를
망치로 곡괭이로 때려부시자...

농민들은 “기민투쟁가”를 높이 부르면서 투쟁에 떨쳐나섰다. 훈춘현 락타하자의 지주원대순과 벌린 “춘황투쟁”은 좋은 실례이다. 원대순은 왜놈의 충실한 주구이며 간악하기 그지없는 대주주였다. 원대순은 600여쌍의 토지와 수십필의 마소를 차지하고있었다. 1932년 봄, “춘황투쟁”의 불길은 훈춘에도 만연되여왔다. 중공훈춘현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대황구, 중강자, 연통라자 등지의 수천명 농민들은 “춘황투쟁”에 뛰여들었다.

3월초순의 어느날, 250여명의 남녀로소가 저마다 쌀주머니, 낫, 바오래기를 들고 락타하자에 있는 원대순에 집을 향하여 떠났다. 공청단황구구위 서기 남석우의 아버지 남덕향, 아동단 단장 전기옥이 대오의 맨앞장에 섰다.

“일본제국주의을 타도하자!”

“일제주구를 때려엎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천지를 진감하는 구호소리가 락타하자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 전해 추수투쟁에서 혼이 난 원대순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대문밖에까지 나와 영접하면서 무슨 사연인지 요구대로 처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앞장에 섰던 남령감이 “식량이 떨어져서 좀 ‘꾸’자고 왔다”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대순은 “맘대로 가져가십시오”하면서 머슴보고 식량창고문을열라고 하였다. 남령감이 소리치자 250여며으이 남녀로소가 환성을 울리며 식량창고로 몰려갔다.

교활한 원대순은 농민들이 식량을 담는 틈을 타서자기의 심복을 말에 태워 일본령사분관에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령사분관 경찰분주소의 찦차 두 대가 원대순네 집뜨락에 들어섰다. 교활하고 음험하기 그지없는 경찰분주소의 미하라놈이 차에서 내리더니 간사하게 웃으면서 능숙한 조선말로 누가 책임자인가를 물었다. 남령감이 나서서 자기가 책임자라고 대답했다.

어느새 왜놈들은 250여명의 남녀로소에게 겹겹이 둘러싸였다. 충천하는 기세에 짓눌린 미하라놈은 원대순의 귀에 대고 뭐하 수군거리더니 해해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조용하십시오. 난 여러분들의 이번 거사에 동정을 표하는바입니다. 방금 원대순선생께서도 자선심을 베풀어 오신분들에게 피낟과 콩을 한짐씩 선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표 두분을 일본령사분관에 보내면 소 20마리에 수수쌀도 보내드리겠습니다.”

미하라는 그럴듯하게 소개신까지 써주고는 농민들속을 비집고 빠져나와 꽁무니를 뺐다.

투쟁에서 승리한 청수동농민들은 원대순 놈의 집에서 점심밥까지 배불리 먹고 저마다 피낟과 콩을 한짐씩 지고 발걸음고 가볍게 귀로에 올랐다.

이번 춘황투쟁에 참가한 농민은 20만명에 달했다.
 
34. 항일무장대오 건립을 위하여

 
용감하고 지혜롭게 무장을 탈취 토배기병공기공장서 "연길폭탄" 제조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후 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였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당, 단 열성분자 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후인 9월 21일,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말았다.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동만 각 현의 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증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중 리광, 량성룡, 오중화, 오중성, 김철 등은 왕청현대표들이고 채수항, 김일환은 화룡현대표들이며 오빈, 리청산 등은 연길현대표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하는 점은 왕청현대표인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 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각급 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제, 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춘황투쟁을 준비할데 관한 문제, 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데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당, 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다.
  
무기탈취투쟁
추수춘황투쟁을 거친 연변인민들은 강대한 일본침략자와 싸우자면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무장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독립운동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로씨야로부터 얼마든지 무장을 살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로씨야가 이미 사회안정이 실현되여 한창 사회주의건설의 열이 오르고있는 때여서 무기를 아무데서나 구할수 있는 사회환경이 아니였다. 또 중국정부의 공산당반대의 리념차이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하여 무기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고 연변인민들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빈주먹밖에 없어 군자금을 헌납할 저그마한 힘도 없었다. 때문에 오직 두손으로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은 무기와 야장간같은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칼, 날창, 자작폭탄 같은 것이 유격대를 창건하는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대책을 강구했는데 생사를 불문하고 지혜롭게 적의 무장을 탈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치로 군경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놓고 무기를 빼앗기도 했으며 고춧가루를 놈의 눈에 쳐놓고 총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충진이라는 젊은 형제가 총을 빼앗은 이야기도 참 지혜롭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선생은 무기탈취를 위해 싸운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1931년 여름 어느날 연집강부근의 밭에서 김을 매던 충진의 형제는 순경 한놈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흔들먹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놈의 총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충진의 형제는 순경놈이 들으라고 우정 호미로 돌을 탕탕 치면서 인기척을 냈다. 강을 건너려고 주춤거리던 순경놈이 아니나다를가 충진의 형제를 불렀다. 충진의 형제는 내키지 않은척 하면서 느릿느릿 순경놈한테로 다가갔다. 그놈은 충진이더러 자기를 업어서 강을 건너라고 호령했다. 강심에 이르니 물이 넓적다리를 넘어섰다. 순경놈은 구두가 젖을가봐 몸을 솟구치며 두다리를 곤두세웠다. 순간 충진이는 순경놈을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는 대가리를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 대가리를 물속에 눌러놓고 다른 한손으로 제꺽 권총을 빼냈다. 그리고는 강에서 나와 산으로 올리달았다. 강에서 나온 순경놈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충진의 형제는 그 길로 유격대에 찾아가 총을 바치고 유격대원이 되었다.
  
녀성들도 지략으로 무장을 탈취하였다. 1932년 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적 보안단 졸개들은 늘 왕우구 토성촌에 와 행패를 부리군 하였다. 그날도 보안단 졸개 일곱놈이 마을북쪽의 한 초막에 기여들었다. “삼동서”로 분장한 부녀회 회원들은 더운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그놈들을 “열정”적으로 맞았다. 점심에 술까지 “대접”받고 거나해진 놈들은 저마끔 나자빠져 코를 골았다. 땅거미질 무렵 잠에서 깨여난 놈들은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삼동서”는 다시 주안상을 차려놓으면서 저녁을 먹고가라고 극구 말렸다. “삼동서”의 “뜨거운 열정”에 입이 헤벌쭉해난 일곱놈은 다시금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는 쓰러져 잤다. 이때 짬을 엿보던 저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어 놈들의 총을 빼앗은 다음 “연길폭탄”으로 일곱놈을 몽땅 죽여버렸다.
  
“베감투”이야기도 동만인민들속에서 오래동안 류전된 전설적인 이야기의 하나이다.
  
개산툰지구에서 활동하던 지하공산당원 리동일은 총을 탈취해가지고 유격대로 급히 오라는 상급당조직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동지들과 토의 끝에 선구촌에 자리잡고있는 공안분주소를 들이치려고 작전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난데없는 상두를 멘 장례행렬이 선구공안분주소에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쓴 청장년속에는 소년들도 섞여있었다. 상제, 복인, 조객들로 이루어진 이 장례행렬은 20여명 잘 되었는데 상주인듯한 중년사나이가 맨앞에 섰다. 사나이는 분주소에 들어서자 두손을 맞잡고 소장에게 인사하였다.
소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앉아 점도록 베감투를 눈빗질해보았다. 이놈은 출출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육상에 파묻혀 썰썰이병을 떼고야 돌아서는 놈이라 장례행렬을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베감투는 소장놈이 지금 엉뚱한 궁리를 하고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하면서 “도살세”를 바치러왔다고 굽석거렸다. 그때에는 관혼상제에 소나 돼지를 잡으려면 공안분주소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 소를 잡았습지요.”
“제길, 소는 무슨 놈의 소란 말이야. 돼지를 잡아도 될걸.”
  
한창 점심때라 소장놈은 긴 하품을 늘이며 심술배인 소리를 줴치다가 서랍을 들춰 도살세수고지를 끄집어냈다. 느적느적 필을 찾아쥐더니 수고를 떼느라고 머리를 테불상에 파묻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베감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소장놈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궁둥이에 찬 권총을 잡으려 했으나 총갑을 열기도전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밥을 짓던 화식원놈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식칼을 든채로 나타났다. 베감투는 집싸게 몸을 훡 돌리면서 그놈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화식원놈이 나동그라졌다.
  
항두를 지키고있던 장례군들은 불이 펄나게 향두를 헤친후 관덮개를 열어제치고 그속에 숨겨놓았던 몽둥이며 괭이며를 들고 쏜살같이 분주소로 쳐들어왔다. 한창 낮잠을 자던 순경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웬 영문인지 정신차리지 못하고있었다. 방안에 뛰여든 장례군들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벽에 걸려있는 총을 벗겨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장례행차로 가장하여 선구공안분주소를 쳐들어간 사람들은 다름아닌 개산툰학성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이였고 베감투를 눌러쓰고 상주로 변장한 사나이는 학성적위대 대장 리동일이였다. 그날 그들은 선구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보총 8자루, 권총 1자루를 로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연길폭탄"
동만유격근거지의 병기공장에서 만든 토배기무기가운데 유격대들의 환영을 각별히 받은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길폭탄”이다. 그러나 일본군경들은 “연길폭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했다.
  
1931년말, 중공화룡현 다라즈구위 서기 김일환은 구위확대회의를 열고 항일무장대오의 건립과 무기해결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회의에는 금곡촌당지부 서기 손원금, 적위대 대장 장원, 금곡촌의 박포수 등이 참가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는외에 자체로 병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는외에 차제로 병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여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하여 연길직업학교에서 로동자로 일한적이 있는 손원금과 무기를 잘 다루는 박포수가 무기제조과업을 맡게 되었다.
  
손원금과 박포수는 남포의 원리를 리용하여 폭탄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두사람은 금곡의 매바위산에 올라가서 자그마한 막을 짓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였다. 이때로부터 금곡촌에는 설비가 보잘 것 없는 병기공장이 생겨났다.
  
손원금은 공장의 전우들과 함께 폭발위력을 높이기 위한 방도를 여러모로 연구하였다. 그들은 창호지를 구입해다가 장약함을 만들어 마침내 폭탄을 제조해냈다. 폭탄을 시험폭발해보니 위력이 괜찮았다. 빈 집안에서 터지는 폭탄소리는 요란했으며 집주위는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그들은 소리가 유별나게 굉장한 이 폭탄을 “소리폭탄”이라고 이름지었다. 손원금은 본격적으로 “소리폭탄”을 생산하여 각 부락의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소리폭탄”은 위력을 보여주었다. 적들은 “소리폭탄”이 터지는 소리만 듣고도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도망쳤다. 그럴 때마다 적위대원들은 그 틈을 타서 놈들의 무기를 탈환하였다. 어느 하루 적위대원들은 반제거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한 적위대원이 불을 달아 던진 “소리폭탄”이 면바로 서장놈의 발밑에서 폭발하였다. “소리폭탄”은 이름 그대로 소리만 굉장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러나 경찰서 서장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결국 “소리폭탄”의 약점이 적들에게 탄로되고말았다. 이리하여 병기공장에 시급히 새로운 폭탄을 만들어낼 과업이 떨어졌다.
  
박포수가 “고추폭탄”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해왔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소리잡으러 산으로 갔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오소리굴을 발견하고 연기를 피워 넣었는데도 오소리가 나오지 않자 아버지가 이마를 찡그리면 궁리하더니 굴어구에다 고춧가루를 태우더라는것이였다. 그랬더니 오소리는 매운 냄새에 견디지 못하고 나오고말았다는것이였다. 박포수는 화약에 고춧가루를 섞어 폭탄을 만든다면 그럴듯한 “고추폭탄”이 될것이 아니겠는가고 했다. 결국 “고추폭탄”을 시험제조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들은 시험삼아 먼저 일정한 량의 화약에 고춧가루를 섞은 다음 불을 달아보았다. 화약에 불이 달리면서 고춧가루가 타기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지도록 매운 냄새가 풍기였다.
  
“고추폭탄”을 만들어낸 손원금네는 어느날 저녁 고석동 너럭바위골에서 새로운 폭탄시험을 하게 되었다. 벼락치듯한 폭발소리와 함께 독한 냄새가 확 퍼지자 모였던 사람들은 기침을 마구 하며 눈물코물범벅이 되어 쩔쩔맸다. 대성공이였다. 병기공장에서는 일손을 다그쳐 “고추폭탄”을 생산해냈다.
  
“고추폭탄”은 위력을 과시했다. 적위대원들은 선후로 내연평, 팔가자, 반제거우 경찰서놈들에게 “고추폭탄”벼락을 안기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1932년 봄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가 보편적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형세의 발전에 따라 “고추폭탄”도 자체의 사명을 다하게 되었다. “고추폭탄” 역시 살상력이 없었기때문이였다. 항일유격대에서는 살상력이 있는 폭탄을 요구하였다. 하여 “돌자갈폭탄”을 만들어 폭발시험을 했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돌자갈폭탄”은 가는곳마다에서 일본군경놈들을 호되게 족치였다. 이렇게 되자 바빠맞은 놈들은 새로운 폭탄출처를 알아내려고 미쳐날뛰였다.
  
손원금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고 병기공장을 매바위절벽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옮겼다. 후에 동굴이 놈들에게 발견되자 매바위에서 동남쪽으로 15리가량 떨어진 알미대에 옮겨가 무기생산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부단한 실천속에서 “돌자갈폭탄”의 원리를 응용하여 “쇠쪼각폭탄”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병기공장에서는 솥이나 화로 같은 쇠붙이를 깨여서 돌쪼각을 대신했다. 하여 폭탄의 위력을 높였다.
  
하지만 “쇠쪼각폭탄”도 때로는 불발사고가 일어나 유격전에 영향을 주었다. 손원금은 전우들과 함께 세심하고 반복적인 시험을 거쳐 폭탄이 습기를 막아낼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장약통을 양철로 만들고 밀페한 다음 화약을 재우고 양철통겉면에 쇠쪼각을 붙였다. 그런후 양철로 외피를 한 벌 더 씌우고 철사로 그물처럼 얽어놓았다. 그랬더니 폭탄은 습기를 막아낼수 있었고 불발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폭탄을 점차 자기의 위력을 발휘하여 전투원들의 사기를 고무하였고 일본놈들을 전율케하였다.
  
동만 각 현에서 항일유격대의 폭탄에 맞아 “철벽진”이라고 자랑하던 놈들의 포대와 성곽들이 요란한 “쇠쪼각폭탄”의 폭음과 함께 무너져내리고 수많은 병영들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수많은 일본군경들이 황천객이 되고말았다. 연길지방의 일본군경들은 이 폭탄에 어찌나 넋을 잃었던지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5. 옹성라자사건

 

애국사병 나라 주권 위해 일본인 사살/왕덕림 구국군 일으켜 대일작전 펼쳐
  
애국사병의 정당행위
“9.18”사변후 동북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전민항전의 호소와 전국인민들의 거세찬 항일물결의 추동밑에 자발적인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1931년 12월 7일, 안도현 명월구에 주둔하고있던 길림성방군 제677퇀 왕덕림 3영의 애국사병들은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드는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사원 오또 오반지 등을 쏴죽였다. 이 사건을 “옹성라자사건”이라고 한다. “옹성라자사건”을 연변을 들썽해놓았다.
  
당시 명월구복판에 있는 포대산우에는 “로3영”의 포대가 있었다. 그리고 포대산남쪽기슭에는 제9련의 병영이 있었다. 12월 7일, 일본 “만주철도”주식회사 돈화-도문선측량인원 7명이 9련 병사들이 거듭되는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들어 정찰활동을 감행했다.
  
포대산을 지키고있던 9련 2패의 서대성과 주덕재는 군사기지내에서 관찰할수 없으니 즉시 물러나가라고 거듭 경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사병들의 경고를 듣는둥마는둥 안하무인경으로 지형을 측량하기도 하고 이곳저곳 살피기도 하면서 제멋대로 놀았다. 일본인들의 무리한 태도에 격분한 애국사병들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고 군사요충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애국병사 서대성과 주덕재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되알진 총소리와 함께 일본인 2명이 당장에서 격사되였다. 나머지 일본인들은 겁을 먹고 부랴부랴 뺑소리쳤다.
  
애국사병들의 정당행위는 동만 각계 애국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2월 18일,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민중에게 고하는 글”과 “사병에게 고하는 글”을 련이어 발표하고 “중조 병사와 민중들은 일떠나 유격전을 벌리여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제기, 애국민중들은 시위투쟁과 파공,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애국사병들을 성원할 것을 호소했다.
  
사건이 발생한후 일본의 룡정주재특무기관은 국자가에 사람을 파견하여 연길경비사령관에게 위협적인 공갈을 했다. 이미 룡정령사관에 “투항”을 표한바 있는 한간 길흥(吉興)은 머리 숙여 사과함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뜻에 쫓아 인차 사람을 명월구에 파견하여 이른바 조사를 단행하게 했다. 아울러 한간 희흡(熙洽)과 비밀리에 상담한후 죽은 두 일본인에게 무휼금 3천원씩 배상하기로 했다.
  
길흥의 매국적행위는 애국관병의 분노를 자아냈다. 연변의 주재하고 있던 일본고문 등 사람들이 명월구에 와 “옹성라자사건”을 추궁하면서 주둔군을 향해 질문하자 3영 영장 왕덕림은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호매롭게 대답했다.
  
“포대산은 아군의 군사요충지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들어올수 없다. 두 일본인들이 억지로 포대산에 기여오르다가 맞아죽었다. 이것은 우리의 정당한 임무집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