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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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동만항일유격대2

 

혁명적군중 간고한 환경서 항일유격대 지원 장대해진 유격대 유격근거지건설에 박차를
  
훈춘현유격대
1932년 1월,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의 김한구(김혁), 방철산, 리국진 등 15명의 우수한 청년들은 대황구 서대마구 두도령 심산속에 밀영을 세우고 별동대를 건립하였다. 대장은 강석환이 맡았다.
  
1932년 2월에는 연통라즈 서구에서 10여명의 대원으로 돌격대를 건립, 강일무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돌격대는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는외 과거 반일민족주의무장단체에서 파묻어두었던 총 20여자루와 많은 탄약을 파내여 대오를 무장하였다.
  
별동대와 돌격대는 영용하고도 기민하게 적의 손에서 무장을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였다. 1932년 봄 연구의 돌격대원 오일파, 리해봉 등은 연구 뚱아라경찰분대의 집수리에 동원된 당지농민들속에 섞여 경찰분대 뜨락에 들어갔다. 그들은 일하면서 동태를 살펴보다가 물마시러 들어가는척하고 집안에 들어가 총을 닦고있는 경찰들을 때려엎었다. 리해봉은 손에 닿는대로 삽 한자루를 들고 대문으로 달려가 보초놈을 찍어넘겼다. 그들은 보총 두자루를 빼앗아들고 대문을 빠져나와 그 길로 산길을 질러 연통라즈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리해봉은 “삽자루”란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
  
1932년 6월초, 현위서기 서광은 10여명 연구돌격대를 련솔하여 하남 남진맹동척회사무장자위대를 야습하여 보총 10자루를 탈취했다. 그리고 별동대원 3명은 경신향 회룡봉해관장의 숙사를 야습하여 권총 1자루를 얻었다.
  
여러차례 전투에서 무기를 마련한 그들은 현유격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6월 훈춘현휘는 동만특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흥구 청수동에서 당, 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훈춘현유격대의 건립을 결정하고 연통라즈 서구에 연구유격대(령남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일무가 대장으로, 리청(한족)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처음에는 1개 중대밖에 없었는데 김태준이 중대장을 맡았다. 7월에는 대오가 2개중대로 늘어나자 구선일이 제2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겨울에 이르러 대원이 130여명으로 늘어나고 총 100자루가 되자 유격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였다.
  
훈춘현위에서는 구국군 왕옥진부대에 당원과 공청단윈들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게 하였다. 그 결과 구국군 13퇀에서는 보총 14자루를 지원했다. 이 무장을 토대로 대황구에서 황구유격대(령북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석혼이 대장으로, 박두남(후에 변절함)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후 구국군 왕옥명을 데리고 유격대에 넘어오자 그를 대장으로, 윤석원을 정위로 임명했다.
  
1933년 1월, 유격대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현위에서는 연구유격대와 황구유격대를 합병하여 훈춘현유격총대를 편성, 공헌신을 총대장으로, 박태익을 정위로 임명하였다. 총대밑에 2개 대대를 두고 제1대대장에 공헌신, 정위에 박태익, 제2대대장에 심랑동, 정위에 박두남을 임명하였다. 유격총대는 130여명으로 늘어나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왕청현 라자구일대의 밀림속에서 활약하면서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유격대가 건립된지 얼마 안되여 일제군은 연통라즈 “토벌”을 감행하였다. 1932년 7월 소선대 대장 황정해가 연구에서 비밀련락을 가다가 야침봉부근에서 100여명의 “토벌대”를 발견하고 즉시 연구에 되돌아가 알렸다. 유격대는 연구에서 3리가량 떨어진곳에서 매복전을 벌려 적 10여명을 격사, 경상하고 “토벌대”를 격퇴시켰다. 같은 시기에 연구유격대의 몇몇 대원들은 반석향 장류구에 있는 일인축산회사의 목장을 습격하여 소 160여마리를 빼앗아 연구유격구로 몰고왔다.
  
1933년 초봄, 훈춘의 토호들과 악질지주 및 친일상인들은 동흥진의 상인들과 자금을 합쳐 동흥진에 군수품상점을 세우기로 하고 25대의 마차에 상품들을 가득 싣고 훈춘을 떠났다. 이 소식을 입수한 연구당위에서는 장수림더러 20여명의 유격대원과 적위대원을 거느리고 매복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로룡구의 뒤산에 매복하여있다가 친일상인들의 짐실은 마차가 매복권안으로 들어오자 맹사격을 퍼부었다. 호송대로 따라온 왜군병사 대여섯놈과 위만군 몇놈이 격사되자 그 외의 놈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유격대는 마차 25대에 실은 피복, 신, 밀가루, 소금 등 많은 물자를 탈취했다.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소대장 최진과 박창준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소륙도구 다리목에서 일본군들이 호송하는 20여대의 마차를 습격하여 일본군 9명을 격사하고 총 9자루, 밀가루 40여마대를 빼앗았다.
  
1934년 4월 6일, 40여명의 유격대원들은 탑자구집단부락의 자위단을 야습하여 부단장 신연택을 격사하고 12자루의 보총과 천여발의 탄약을 얻었다. 유격대원들은 당장에서 자위단의 소굴을 불살라버리고 축산조합의 소 3마리를 빼앗았다. 그해 5월 12일 유격대원들은 반일병사들과 손잡고 오도구집단부락을 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괴뢰군 4명을 격사하고 2명을 격상시켰으며 13명을 생포하고 총 17자루와 많은 군수품들을 로획하였다.
훈춘현의 근거지인민들은 간고한 환경속에서 항일유격대의 항일투쟁을 열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유격대는 가는곳마다에서 인민들의 지성어린 위문을 받았다. 인민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격대에 식량을 날라다주었으며 생활용품을 공급해주었다. 연구의 녀성들이 조선에 건너가 피륙, 신, 양말 등을 사 경신구에 가지고 오면 그곳 청장년들은 물품을 지고 산을 넘어 유격구에 날라갔다. 유격대의 물자구입과 수송을 위하여 경신구 회령봉의 지하공작원 김규성 등 몇몇 동지들은 헌식적으로 사업하였다. 녀성들은 유격대에 옷을 만들어 보냈다. 연구의 7명의 녀성은 왜군들의 “토벌”이 우심했으나 4개의 재봉침으로 밤낮 악전고투하여 유격대원들의 옷을 지어 저때에 공급하였다. 녀성들은 일본놈들이 쳐들어오면 재봉기, 옷감 등을 산속과 땅속에 감추어두었다가 적들이 돌아가면 다시 파내여 옷을 만들었다.
  
대황구의 “3.1”학교에서는 아동들을 조직하여 보초, 련락, 정보수집 등과 같은 아동들의 힘에 알맞은 일을 하였다. 학교에서는 혁명가곡을 불렀고 매주 토요일이면 강연대회를 열었고 선전대를 조직하여 유격대의 전사들과 병원의 부상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였다.
  
1934년 3월말, 훈춘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으로 편입되여 새로운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
1932년 봄, 중공연길현위는 당, 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상급의 지시정신에 따라 항일유격대를 건립하며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라고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의란구, 로투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서 돌격대, 적위대를 조직하여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1932년 봄, 의란구소년선봉대 대장 박동무가 지주에게서 권총 두자루를 탈취하였다. 연길 북산촌 김홍규는 국자가 동쪽거리에서 보초를 서고있는 괴뢰만주국경찰의 총 1자루를 빼앗았다. 대마록구에서는 공청단 단지부서기 림춘익 등 5명이 룡정, 조양천 부근에서 지주집을 습격하여 보총 2자루, 권총 2자루, 렵총 몇자루를 빼앗았다. 7월에 공청단원 김충진은 연집강 연성촌에서 괴뢰만주국경찰을 강물에 처박고 권총을 탈취하였다. 8월에 최현 등 3명은 소동구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총 5자루를 탈취하였다.
  
이렇게 로획한 무기를 토대로 하여 1932년 초여름, 연길현 의란구와 로투구에서 유격대가 건립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대원 30여명이였으며 대장 박춘이였고 로투구유격대는 대원 20여명이였으며 대장은 박주철이였다. 유격대는 1932년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무려 20여차의 전투를 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소연집강 보안퇀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11자루를 탈취한후 7월 어느날에는 소배초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저격하였으며 뒤이어 화전자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몇자루를 로획하였다. 8월에는 팔도구경찰서를 습격하고 일본인광산자본가와 앞잡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9월에는 유란환, 김동규 등 유격대원들은 의란구 춘홍가부근에서 “연길폭탄”으로 일본군 군용트럭 3대를 습격하여 적 2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1932년 10월, 의란구유격대와 로투구유격대는 련합하여 연길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1932년 11월,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군대를 집결하여 동만유격대에 대한 제1차“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와 적위대는 적들의 “토벌”에 맞서 영용히 싸웠다. 유격대는 삼도만 대동구에서 400여명의 “토벌대”와 이틀동안 싸워 적 90여명을 소멸하였으며 왕우구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괴뢰군을 저격하여 많은 살상자를 냈다.
연길현유격대는 “자기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놈들을 소멸하고 몰아낼수 있는 전략적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왕우구, 석인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한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간지대에 선후로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였다. 유격근거지를 창설한 유격대는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하며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점차 장대해진 연길현유격대는 유격대대로 확대되였다. 대대장에 박동근, 정치위원에 박길이 임명되였다. 대원은 130여명이였다. 그들은 보총 60여자루, 권총 15자루, 기타 원시적무기와 “연길폭탄”으로 무장하였다. 대대아래에 4개 중대를 두었는데 제1중대는 삼도만 능지영에, 제2중대는 부암에, 제3, 4중대는 왕우구, 북동에 주둔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연집강, 팔도구, 의란구, 삼도만 등지를 넘나들면서 유격활동을 활발히 벌려 적들을 타격하였다.
  
1932년 3월말, 연길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편성되였다.
 
38. 동만항일유격근거지

 

쏘베트정부 정치 경제 문화 로농병 위해 복무 동만항일유격전쟁의 튼튼한 전략적기지로 건설
  
산악지대에 근거지 건립
일본제국주의의 파쑈통치가 극대화되고 유격대를 그 맹아시기에 소멸하려는 일본군의 군사적“토벌”이 미친 듯이 감행됨에 따라 각지의 유격대와 대중들은 자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적을 타격하고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기지-항일유격근거지가 적발히 수요되였다.“성세호대하게 진행된 ‘추수’, ‘춘황’투쟁이후 동만지구는 기본상에서 광범한 혁명군중에게 통제된 상태였습니다. 의란구거나 배초구같은곳은 혁명군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있었는데 배초구일본령사분과 관원과 경찰들은 언녕 도망쳐버리고 없었습니다. 이것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기초가 형성되였음을 증명해줍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토대와 당의 지도력 및 객관적인 유리한 조건 등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동만의 중국공산당조직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한 경험이 풍부했다. 1928년 제일 처음으로 룡정지부를 성립한 그때로부터 연변의 공산당조직은 “붉은5월투쟁”, “8.1”길돈폭동 등 대규모적인 혁명운동을 이끌면서 그 지도력을 과시했다. 또 이미 500여명의 유격대원을 가진 4갈래의 유격대가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군중성적인 무장조직인 돌격대, 적위대, 소선대 등이 있었다. 지형조건으로 보아도 장백산일대는 고산준령으로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퍽 유리했다.
  
“중공동만 각급 당조직들에서는 이 유리한 조건을 틀어쥐고 적들의 통치가 빈약한 산간지대와 농촌들에 항일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에 기재된 1932년(소화 7년) 11월에 분석한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간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쏘베트구역’”은 아래와 같다.
훈춘현 투도구로부터 오지 초모정자에 이르는 지대.
훈춘현 동포대로부터 로만국경 동남쪽 지대.
훈춘현 황구로부터 가야하동북지대를 지나 왕청현 서대파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의란구 왕우구 류채구로부터 석인구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삼도만으로부터 동불사 북쪽 위자구 차일령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화련리 북심미동으로부터 왕청현 경계 사수평에 이르는 지대.
삼도구 수침동으로부터 이도구 어랑촌에 이르는 지대.
화룡현 득미동으로부터 하광포 평정산을 지나 우심산, 류동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장인구로부터 안도현 대황구에 이르는 지대.

중공동만 당, 단 특위의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적색유격구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왕청현: 황구구, 소왕청구, 대황구구, 가야하구.
연길현: 만구구, 팔도구구, 삼도만구, 로투구구, 의란국구.
훈춘현: 황구구, 연통라자구, 하남구, 반가요구.
화룡현: 이도구구.

이러한 지대는 모두다 중국공산당과 그 령도밑에 있는 항일조직들이 통제하고 있는 곳들이 였다. 다시말하면 일본침략군의 “토벌”로 하여 허다한 지방의 대중들은 부득불 산골인 상술한 지대에 집결되였으며 중공동만특위를 비롯한 각급 당조직들도 부득불 이러한 산간지대에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의 침략통치구역과 멀리 떨어진 상술한 지역들은 자연히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지역으로 되었다. 동만의 각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러한 정세와 토대우에서 창설되였다.
  
1932년말까지 동만에는 연길현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길유격구, 왕청현 남부와 중부 및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왕청유격구, 화룡현 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화룡유격구, 훈춘현 서북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훈춘유격구 등 네 개 유격구가 형성되였다. 유격구내에서 각현의 당조직에서는 유격대와 반일군중들을 이끌고 유격전을 벌리는 한편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군중투쟁이 활약적이며 진공, 방어에 유리한 지대를 골라 10여개의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왕우구, 석인구, 위자구, 능지영, 소왕청, 마촌, 가야하, 사수평, 영창동, 대황구, 연통라자, 어랑촌, 우복동 등 유격근거지가 그것이다. 유격근거지들은 둘레 60~70리, 지어 100리까지 되었으며 인구는 적어서 500~600명, 많으면 2000명도 더 되었다. 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의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아래에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왕우구항일근거지는 룡정북부의 연길, 왕청경계에 자리잡고있었다. 근거지는 왕우구, 북동, 송림동, 봉서동, 의란구 남구, 북동, 남양촌 등 몇 개의 비교적 큰 자연툰을 포섭하고있었는데 1000여호의 조선족농호가 있었다. 근거지가 건립된후 중공동만특위서기 동장영을 위수로 하는 중공동만특위기관과 중공연길현기관은 조양천으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의 고성툰으로 옮겨왔다. 이때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는 동만항일투쟁의 지도중심으로 되었다.
  
훈춘대황구유격근거지는 영안, 밀강의 북부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중강자, 삼안(하중구), 상중구, 청수동, 황구, 동구, 북구, 대빈랑구, 소빈랑구, 서대마구, 양목교자등 자연툰을 포섭, 1000여호의 주민이 있었으며 둘레는 1000여평방키로메터였다.
  
항일유격근거지들이 건립된 지역으로 보면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악지대, 어랑촌을 중심으로 한 봉밀구일대의 산악지대, 가야하, 소왕청, 요영구를 중심으로 한 가야하량안의 산악지대,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황구령이북의 령북산악지대와 연통라자를 중심으로 한 훈춘강 이남의 산악지대들이다.
  
근거지의 쏘베트정부
박창욱교수는 근거지내에서의 쏘베트정부의 건립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1932년 6월, 당중앙은 상해에서 북방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위기의 증장과 북방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결의는 실제상 제3차‘좌’경모험주의책략을 북방지구 당의 사업가운데 시달한것입니다. 이때 중공만주서위에서는 조직부장 하성상을 이 회의에 참가시켰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만주는 특수한 상황인데 그것은 첫째로는 만주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크지 못하고 민중이 잘 발동되지 않고 있으며 둘째로는 이미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만주의 혁명을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동북의 특수성을 말살하고 만주성위가 제출한 ‘동북당의 중심임무는 무장으로 일제침략에 반항하는것이다’는 주장에 대해 ‘만주특수론’이라고 비판하였으며 동북도 관내와 마찬가지로 홍군과 쏘베트정권을 건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만특위는 할수 없이 중앙 ‘북방회의’정심에 따라 유격근거지에 홍색정권에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11월에는 연길현 이란구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1932년 12월에는 왕청현 5구 가야하유격근거지, 훈춘황구대황구와 연통라자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1월에는 왕청현 2구 소왕청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2월에는 연길현 팔도구 석인구유격근거지에서 선후로 로농병대표대회를 소집, 중화쏘베트공화국의 헌법, 강령, 법령에 근거하여 쏘베트구역시정강령을 제정하고 구쏘베트정부와 일부 촌쏘베트정부를 선거하였다. 연길현 옹성라지구의 삼도만, 이란구의 남양촌, 연길현의 화련지구, 삼도구구의 우복동 등 지역에서는 선후로 혁명위원회를 건립하고 쏘베트정권의 직능을 대행했다.
  
쏘베트정부는 낡은 정권의 법령과 민족불평등제도르 페지했고 적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였다. 16세이상의 로동자, 농민 및 혁명군인들에게는 민주,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주었지만 부농에게는 이러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경제상에서는 봉건착취제도를 배척하며서 지주와 일제의 주구, 반혁명분자의 토지, 집, 농기구 등 자산을 몰수하여 고농, 빈농, 중농 및 유격전사들에게 분배해주었다. 8시간 로동제도를 선포하고 가렴잡세를 취소했으며 누진세를 실행했다. 쏘베트정부에서는 조선인민회금융부를 철소하고 고리대착취를 취소했으며 무리식대부의 농민신용사를 세웠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농민들을 조직동원하여 농업생산을 추진하는 한편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꾸리기도 하였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또 유격근거지에 소학교를 세우고 학령어린이들에 대한 “소학교의무교육법”를 공포, 실시하였다. 각 근거지에서는 투쟁실제와 군민의 수요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학교를 건립했는데 학교에서는 교육이 로동인민과 항일전쟁을 위해 복무하며 생산로동과 결합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항일전쟁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 각 근거지에는 30여개 학교가 있었다. 학교들에서는 본민족 언어문자로 수업하였다. 성인사회교육에 중시를 돌려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식자반, 야학교 등을 꾸려 문맹을 퇴치하고 사람마다 글을 읽을수 있게 하였다.
  
유격근거지내에서는 각종 문예오락활동도 활발히 벌리였다. “혈해지창”, “전투적인 밀림”, “경축대회”등 연극을 창작공연하였으며 수많은 항일가곡을 창작하였다. “투쟁”, “두갈래로선”, “전투일보”등 간행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군사상에서는 유격대외에 적위대, 소선대 등 반군사성조직을 건립하기도 했다.
동만유격근거지에는 1234명의 공산당원과 830명의 공청단원, 1600여명의 아동단원과 적위대원이 있었다. 유격근거지에는 2만여명의 항일군중이 있었는데 각급 당조직과 유격근거지의 쏘베트정부에서는 군중운동을 활발히 벌리여 반일회, 호제회, 아동단, 소선대, 부녀회 등 반일단체는 유격근거지의 생산, 건설, 전선지원, 상병간호, 보초, 한간방지, 정찰, 통신, 선전 등에 적극 참가하며서 유격대의 작전과 활동에 배합, 근거지의 든든한 후군이 되었다.
  
유격근거지에서는 소형의 병기공장, 피복공장, 인쇄공장을 꾸려 무기를 수리하고 탄약, 수류탄, 토배기작탄, 군용칼, 단발권총, 군복 등을 만들어 유격대에 보냈으며 문화선전품과 교과서, 신문간행물을 인쇄하기도 했다. 동만근거지내에는 병기공장 4개, 피복공장 4개, 인쇄공장 3개가 있었다.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원인으로 하여 유격근거지는 비록 분산적이며 규모가 작고 밀접히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급 당조직의 령도아래 근거지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유격근거지를 동만항일유격전쟁의 전략적기지로 건설하였다.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동북에서 제일 구전하고 제일 오래 지속된 항일유격근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동만당조직이 왕명이 ‘좌’경모험주의를 집행하고 타격면을 넓혔기 때문에 유격대와 반일부대의 관계가 악화되였고 동시에 유격근거지에 쏘베트정권을 건립하여 홍색구역과 적통치구를 대립시키고 적통치구군중을 쟁취하는 사업을 틀어쥐지 않은 탓으로 홍색구역이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에 불만을 가진 부농, 부유중농등 단결할수 있는 항일력량을 포섭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확대하며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39. 제1차 반《토벌》투쟁

 

일제는 가는곳마다에서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고 유격대는 군중과 함께 피어린 투쟁을 벌려 근거지 보위

일제의 야만적인 "삼광정책"
“항일유격근거지가 건립되고 유격대가 점점 장대해지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식민지통치에 거대한 위협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유격대와 유격근거지를 없애버리려고 련속하여 군살적<대토벌>을 감행했는데 1932년 봄부터 1935년까지 세 차례의 대규모적인 군사<토벌>을 감행했습니다. 제1차 <토벌>은 1932년 봄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진행되였는데 유격구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의 반<토벌>투쟁은 참으로 간고했지만 끝내 일제의 <토벌>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군의 제1차 군사“토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1932년 4월 동만에 침입한 일본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이께다대좌가 지휘하는 “간도파견대”는 서쪽의 장춘에서 출동한 관동군 제10사단의 히라가부대, 북쪽의 녕안에서 증원 온 쯔루미부대와 함께 주요한 주민지역들을 무장점령함과 동시에 간도일본총령사관소속 경찰 및 위만군까지 총동원하여 항일혁명력량에 대하여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4월 3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만군경들은 동만항일군민과 10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였고 비행기를 380차례나 출동시켰다. 년말까지 “토벌대”는 “검거소탕”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1200여명을 살해하고 150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모두 381차의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일본총령사관소속의 경찰들은 322차의 작전(그중 일본군과의 련합작전 196차, 경찰부대 단독작전 126차)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2766명을 살상하고 2485명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경들은 항일혁명지역에 대한 “대토벌”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삼광정책을 실시하였다. 1932년 4월부터 5월까지 적들은 왕청현 덕원리, 동일촌일대를 “소탕”하였는데 토벌가운데서 지하공작원 리재봉(김상화)과 한영호를 체포한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작두로 목을 자른후 보안대문앞의 높은 나무에 달아놓고 효시했다. 일만군“토벌”대는 화룡현 평강구, 개산툰구, 달라자구, 삼도구에서도 야만적인 “삼광정책”을 진행했다. 반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놈들은 개산툰의 자동을 47차나 토벌했으며 무고한 군중 43명을 살해했다.

4월 27일, 적들은 연길구 실현촌에서 동만특위 선전부장 조기석 등 28명의 항일지사들을 체포한후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5월, 훈춘현 연통라즈에 대한 토벌에서 그 일대 20여개 부락, 1천여 주택을 전부 소각하였으며 무고한 백성을 수없이 학살했다. 해란구 화련리에서는 세인을 놀래운 “해란강대학살사건”을 빚어내기도 했다. 놈들은 연길현의 이란구, 팔도구, 봉림동, 화련리일대의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놓았다.
  
해란강대학살사건
일제는 일찍부터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유격구를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해란유격구인민들은 중공해란구위원회의 지도밑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벌렸으며 반동적인 지주, 매주적 주구를 처단하기도 했다.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강유격구에서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화련리의 하늘땅을 뒤엎겠다”고 고아대면서 해란구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일본“토벌”대는 연길현 소영자자위단 단장 최남수, 리철우, 하동자위단 고문 박희선, 박명호, 박승준, 허남철, 자위단 참모 김동후, 형사고문 황병연, 보안대원 서봉묵, 자위단 후보대원 윤승화, 박병승 등을 앞세우고 해란강반의 마반산, 하동, 화련리, 소영자, 화첨자 등지를 끊임없이 포위토벌하였다. 일제는 공산당 1명을 죽이면 15원 장려하며 산사람을 잡으면 총 한자루를 장려한다고 하면서 한간, 주구들을 부축켰다.
  
1932년 음력 3월 28일, 일본수비대 50여명은 괴뢰만주국자위단과 함께 남화련리 중지방, 류정촌, 석건평 등지의 무고한 인민들을 마구 체포하여 학살했다. 놈들은 남화련리에서 청년 김룡수를, 중지방에서 의사 김도제를, 류정촌에서 리동근을, 학교촌에서 리씨 등을 체표하였으며 석건평으로 가는 길목에서 18명의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자 학살하였다.
  
일제와 자위단놈들의 탄압에 해란구인민들은 구위의 령도밑에서 대담하고도 지혜롭게 일본군과 악질지주,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기를 무장하는 한편 류정촌동골, 중지방, 상지방 등 세곳에 철공장을 세우고 비밀리에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해 7월 항일유격소대를 건립하고 벽수, 화첨자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였고 집사대로 위장한 다음 화첨자경찰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들의 무기와 의복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는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1명의 공산당원이나 공청단원을 잡을수 있다”고 하면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놈들은 또 혁명대오 내에 변절자를 박아 넣어 내부로부터 혁명대오를 와해하려고 하였다. 1932년 음력 8월초 해란구 등 3개 구의 항일유격소대는 중공연길현위의 지시에 좇아 류정촌에 거주하는 해란구 서기 리상근의 집에 모여 계림촌에 주둔하고있는 40여명의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려는 전투계획을 토론하였으나 현위에서 파견한 백창헌은 우정 습격날자를 질질 끌었다. 백창헌은 혁명을 배반하고 연길일본령사분관의 끄나불이된 농이였다. 이자는 이번의 무장탈취계획을 처삼촌 리성포에게 알려주었고 리성포는 주구 조혜천을 시켜 일본령사분관에 밀고하게 하였다. 밀고를 받은 일본령사분관에서는 주구 리진우가 인솔하는 “토벌대”와 벽수자위단 도합 70여명을 출동시켜 음력 8월 7일 이른새벽에 기관총 3정과 대포까지 걸러놓고 불의에 류정촌을 습격하였다.
  
하여 세집에 나누어 류숙하고있던 항일유격대원 60여명은 불의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5,6시간이나 반격을 견지하였다. 놈들은 마을에 기여들어 민가에 불을 질렀다. 놈들은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2살난 어린이와 72살의 할머니를 날창으로 찔러 불속에 집어넣었다. 이번 불의의 습격에서 중공해란구위의 리상근, 장상순, 김정길, 오용묵 등 22명의 유격대원이 희생되고 30여명의 군중이 학살되였다. 이것이 전 동만을 진동시킨 “8.7”참안이다.
  
1932년 음력 12월 12일, 일제는 연길일본수비대, 경찰, 하동자위단으로 “토벌대”를 무어가지고 다시 해란구에 쳐들어갔다. 대부분 군중들은 피신했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군중들은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김학선은 북화련리의 허궁다리에서 자위단과 격전하다가 희생되였도 그의 식구 일곱명 가운데서 며느리와 딸이 겨우 사경에서 벗어났을뿐 나머지 다섯식구는 불잡혀 화형을 당했다. 태명금은 소영자자위단에 체포되였다가 소영촌 구하동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놈들은 토굴속에서 장질부사로 앓고있는 5명의 혁명자를 체포하여 나무가리우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토벌대”놈들은 김귀송을 붙잡아 칼탕을 쳐죽인후 불에 태워버렸으며 박원섭을 체포하여 그의 사지를 각을 떼서 끓는 가마에 삶았으며 21살나는 유일남을 석마에 갈아 죽였고 김고농을 석마에 달아매 놓고 피를 받아죽였으며 김규식을 눈알을 뺀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이렇게 일본군경과 자위단은 연길현 해란구 화련일대의 12개 자연촌과 200여호의 주민들에 대하여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소 94차례의 “토벌”을 진행하고 중공당원과 항일군중 1700여명을 학살하였다.

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일제의 동만에 대한 제1차“대토벌”에 대하여 중공동만특위와 각 현위에서는 유격대와 적위대, 혁명군중을 령도하여 적극적인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3년 2월 11일 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항일근거지 어랑촌에서 “군민련합경축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이틀전 화룡유격대가 일군으로 가장하고 지주 장보림의 무기를 빼앗은 전과를 경축하기 위해 펼친 대회였다. 대회후 현위서기 최상동은 김병수, 안학선, 김정한, 김동해, 문관우 등 구위 간부들과 함께 앞으로 할 일들을 토의하느라고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했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본군은 정탐을 파견하여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와 유격대실정을 빤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차 자기들의 코밑에서 “황군”으로 가장한 화룡유격대가 장보림의 무기를 몽땅 털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미쳐날뛰였다. 일제군은 두도구, 이도구, 삼도구와 룡정 등지로부터 일본경찰, 수비대, 무장자위단 등 도합 360여명을 긁어모아 “련합토벌대”를 무어가지고 사면팔방으로 어랑촌을 포위해왔다.
  
군민련합경축대회가 있은 이튿날 새벽에 적들은 어랑촌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총창을 꼬나든 “토벌대”놈들이 마을로 기여들 때 왕지평쪽에서 총소리가 세 방 울렸다. 그것은 임무를 맡고 나갔던 제2소대 대원들이 마을에 다가든 적들을 발견하고 적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을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제1소대 유격대원 채동식은 총소리를 듣자 즉시 유격대실로 달려가 중대장 김세에게 알리였다. 채동식에게서 보초를 교대받은 유격대원 천국선도 겹겹이 포위하고 다가드는 적들을 발견했다.
“적이다!”
천국선은 높이 웨치면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마을사람들은 문을 차고 뛰여나왔다.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마을을 포위한 적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놈들은 기관총과 박격포사격을 들이댔다. 삽시에 마을은 포화에 잠겨버렸다.
  
사태는 몹시 위급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어랑촌에 있는 모든 당정간부, 유격대, 적위대 그리고 군중들은 적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수 없게 된다. 중대장 김세는 우선 현위기관과 군중들을 안전하게 전이시키기로 하고 중대를 세 개 전투소조로 나눈후 적들과 생사박투를 벌리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공산당원 리구희, 공청단원 류택규와 유격대원 유만길은 유격대실을 진지로 삼고 진군해오는 적들을 정면반격했다. 유격대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접근할수 없게 되자 적들은 유격대실에 불을 질러놓았다. 불길이 타번지는 집속에서 세 용사는 끄덕않고 적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불에 타던 집이 물앉는 순간 그들은 뛰쳐나와 포위를 돌파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현위서기 최상동은 군중을 엄호하며 전이시키다가 적탄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총을 꼬나들고 달려드는 일본놈의 대갈통을 돌을 들어 까부신후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대장 김세, 정위 ‘김아주머니“(김병호) 등 대원들은 서쪽 주택과 담장에 가 음페하여 적들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시키면서 현위기관과 군중들의 안전한 전이를 위해 박투하다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는 여섯시간이나 지속되였다. 대부분 군중과 간부들은 산속에 옮겨갔다. “토벌대”는 세대의 자동차에 18구의 저들의 시체와 20여명의 부상자를 싣고 어랑촌을 물러갔다. 그 속에는 “간도파견군”군관의 시체도 있었다. 어랑촌을 일거에 삼켜버리려던 일본군은 유격대의 영용한 반격을 받고 물러갔다.
  
이날 유격대에서는 현위서기 최상동, 중대장 김세, 정치위원 “김아주머니”(김병호), 1소대장 리구희, 유격대원들인 안흥원, 류택규, 유만길, 정두호, 김국진, 리길원, 적위대 대장 류억만, 적위대원 리명배, 소년선봉대 대장 차정숙 등이 희생되였다.
  
1933년초, 일본침략군은 3000여명의 병력에 비행기, 대포의 엄호와 배합하에 소왕청과 연길현 의란구, 석인구, 삼도만,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등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규모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1933년 3월, 적들은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중점 “토벌”하기 위하여 2000여명 병력을 3개 갈래로 나누어 소왕청근거지를 행해 진군했다. 동만특위의 지휘하에 왕청유격대와 리광이 지휘하는 별동대는 항일구국군과 배합하여 유격근거지 주위의 산마루에 매복권을 펼쳐놓고 쳐들어오는 적들을 기다렸다.
  
3월 30일 이른아침, 대두천에서 쳐들어온 한갈래의 적들은 마촌에서 2키로메터가량 떨어진 뾰족산일대의 포위권에 들게 되었다. 아군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을 행해 맹렬히 사격했다. 2시간가량 격전을 통해 아군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여러차례 물리쳤다. 우세한 병력을 믿고 적들은 아군의 방선을 넘으려고 악을 썼지만 끝내 방선을 뚫지 못했다. 이때 유격대는 주동적으로 철퇴하여 적들이 배후에 가 진공했다. 등뒤로 공격받게 된 적들은 어찌된 갈래판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황망히 도망쳤다. 도망치던 적들은 저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병력을 발견하고 유격대인줄 알고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면서 저들끼리 죽일내기를 벌렸다. 이렇게 첫날전투는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 이튿날과 사흗날에도 적들은 각 방면으로부터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의 기동령활한 배합작전으로 실패하고말았다.
  
소왕청 반“토벌”전에서 유격대는 일본군 300여명을 소멸하고 총 259자루, 박격포 4문, 기타 군용품을 수두룩이 로획했다.
  
1933년 훈춘유격대는 당의 령도하에 각지에서 주동적으로 일만군의 “토벌”대를 습격하여 항일유격근거지를 승리적으로 보위했다.
9월, 훈춘유격대는 주동적으로 흑룡강성 동녕현에 진격하여 적들을 진공했다. 10월 7일 훈춘에 돌아온후 대황구부근에서 “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몇시간의 치렬한 전투를 거쳐 박진흥, 오빈 등 13명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연길현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군민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군 “토벌”대를 습격하여 몇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각급 당조직의 령도아래 항일근거지군민들은 단결하여 적들과 용감히 싸워 알심들여 획책한 적들의 제1차“토벌”을 끝내 물리치고 금방 건립된 유격근거지를 보위해냈다.
 
40. 반《민생단》투쟁1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조선족항일전사들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꼬박 3년 4개월동안 동만의 공산당과 공청단 및 혁명대오내에서는 조선인 당원간부와 혁명전사들만을 타격한 억울한 사건이 빚어졌다. 일제와 총칼을 맞대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조선인전사들, 혁명사업을 위해 목숨을 내건 조선인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삼단같이 쓰러졌다. 이 사건을 세칭 “반투쟁”이라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 저명한 반일명장 주보중(周保中)은 “동만지구 당조직내에 적더도 50%의 민생분자가 있다고 하여 2000여명을 죽이였다. 동만 각 지방의 조직은 당, 단 특위, 현위로부터 아동단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적극분자들이 모두 살해되였고 사람마다 자기를 지키기에 인심이 황황하였다.”고 한바 있다. 반“민생단”투쟁은 확실히 혁명대오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반투쟁의 피해자는 1000여명에 달한다. 그중 이름을 밝힐수 있는 피해자로는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 왕청현위원회 서기 리용국, 화룡현위원회 서기 김일환, 연길현위원회 군사부장 박동근 등을 비롯하여 560명이나 되고 피살자는 430명이나 되었다.
그럼 민생단이란 어떠한 조직이며 반“민생단”투쟁이란 어떤 투쟁이였을가?
  
"송노톨사건"
민생단이란 일제에게 투항한 조선민족개량주의들인 조병상, 박석윤이 룡정에 기여들어 공개적으로 조직한 친일반공적인 반동적사회단체로서 1932년 2월 15일에 결성되여 그해 7월 14일에 해체되였다. 민생단은 창립된 그날부터 혁명적군중들의 호된 타격을 받아오다가 일제의 제한과 동만혁명적군중들의 강렬한 반대로 만 5개월만에 자연 해산되였다.
  
중공연길현로두구위원회의 비서 “송노톨”은 30세초반의 중년이지만 수염을 더부룩하게 많이 기른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를 “노톨”이라고 불러왔는데 1932년 8월경 그는 로두구 일본헌병분견대에 체포되였다. 일주일 남짓이 지난후 항일유격구로 찾아온 그는 일본헌병대구류소를 “탈출”하여 왔다고 하였다. 구당위 조직에서는 그의 체포 및 탈옥과정에 대해 의심되는바가 있었기에 원래의 구당위 비서직무를 취소하고 연길현농민협회에서 꾸리는 “농민투쟁보”사에 보내여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조직적인 감시와 조사를 진행했다.
  
10월 16일, 세린하일대에서 활동하던 연길현항일유격대는 매봉산에 지형정찰을 나온 로두구분주소의 일본헌병 상등병 고노와 통역관 주모등 3명을 발견하였다. 연길현유격대 장총대 분대장 최현은 분대원 4명을 데리고가 상등병 고노 등 2명을 격살하고 주모라는 통역관을 생포하였으며 권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통역관은 "토벌"하기 위한 군사략도를 그리러 왔다고 자백하면서 “송령감”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심문한즉 그놈은 송노톨은 헌병대유치장에 갇혀있을 때 헌병대에 매수되여 “민생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사람이라고 하였다.
  
특위간부들이 송노톨을 체포하여 심문하니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생사람을 잡는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헌병대 통역놈을 대면시키니 송노톨은 더 말을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렇게 되어 “누가 민생단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이 뒤따르고 송노톨은 빈사상태에서 묻는대로 20여명의 조선족 간부와 열성분자들을 “민생단동료”라고 불어댔다. 이리하여 7월 14일 민생단이 실제적인 자연해소후 항일유격근거지 내부에서 새롭게 반“민생단”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겨우 25세밖에 안되는 연길현위서기 한인권은 송노톨이 고문핍박에 의해 공술한 모든 말을 그대로 믿고 매우 당황하여 전 현 범위내의 중공 당조직과 공청단조직 그리고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등 모든 항일군중단체 내부에서 민생단숙청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 전개하였다. 송노톨은 변절자, 주구밀정으로 인정되여 처형된 것은 두말할 것 없지만 그의 공술에서 지명된 20여명 사람도 즉시로 체포되여 심문받게 되었다. 잔혹한 육체고문과 지독한 공술핍박으로 하여 억지로 적발되여나오는 소위의 민생단원은 날로 많아졌다. 핍박공술에서 적발된 많은 사람들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체포, 감금당하고 심문받았으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격화
그해 겨울에 이르러 위자구에서 소위 당내민생단조직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몇 명의 당원이 팔도구 일본경찰분서에 가 귀순한후 유격구에 돌아와 가족을 데려가려 할 때 체포된 것이였다. 계속되는 일민군경의 피비린 토벌과 극도로 곤난해지는 유격구의 생활 거기에다 내부의 긴장한 반“민생단”투쟁이 날로 험악해가는 상황에서 동요하고 투항변절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었던것이다. 하지만 유격구공산당조직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내부에 잠입한 민생단의 작용으로 보고 반“민생단”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것이다. 이리하여 당내에서 동요, 변절하는자가 더욱 많아지고 반“민생단”투쟁은 더욱더 격렬하게 전개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였다.
  
“송노톨사건”을 도화선으로 연길현항일유격구에서 살벌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반“민생단”투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룡현으로 번져갔다. 1933년 3월 중공동만특위는 조직부장 김성도(金聖道)를 화룡현위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일천, 리동규, 김락천(화룡유격대 정치위원) 등 5명으로 “청산위원회”를 조직하고 화룡현에서의 반“민생단”투쟁을 조직, 지도하였다.
  
이들은 먼저 평강농민협회 책임자 리화춘을 체포한후 자세한 심사도 하지 않고 군중대회에서 민생단이라 선포하고 즉시로 총살하였다. 이로부터 화룡현항일유격구에서도 반“민생단”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김성도는 화룡현에 가 순시하는 2, 3개월동안 혁명대오내에서 소위 민생단원을 수십명이나 살해하였다.
  
1933년 6월초, 중공만주성위의 대표단으로 반경우(潘慶友)와 양파(楊波)가 동만특위소재지인 왕청유격근거지에 오게 되면서 반“민생단”투쟁은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6월 4일부터 소집된 중공왕청현위 제1차확대회의에서 왕청현위가 지난날 “우경기회주의로선 밑에서 혁명적 현재단계를 뛰여넘어 쏘베트를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실행하려 하였으며 우경기회주의적 실질을 감추고 만주의 위대한 반일민족혁명운동을 보지 못했다. 그 착오의 내용은 한국민족주의자와 파쟁주의잔여와 립삼로선의 간여를 포괄하고있었다”고 결론짓고 현위서기 리용국(李用國)과 군사부장 김명균(金明均) 등의 령도직무를 취소하였다.
  
면직당한 김명균은 불만을 품고 부인을 데리고 가만히 유격구를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이튿날 도중에서 유격대에 발견되여 체포되였다. 유격구에 감금되여 조직심사를 받던 김명균은 깊은 밤중에 기회를 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하던 리건수는 민생단으로 지목되여 총살당했다.
  
이 사건은 동만특위를 긴장시켰다. 이들은 원 왕청현위 서기 리용국, 조직부장 석초 등 20여명의 당정군 간부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새로 임명된 현위서기 김권일(金權一)도 체포한후 모두 소왕청유격구에 감금하였다.
만주성위대표단은 왕청에서의 문제해결을 마친후 양파는 연길현으로 가고 반경우는 특위서기 동장영의 안내하에 훈춘현 대황구유격근거지에 이르러 훈춘현 당과 공청단 확대회의를 7일간 소집하였다. 반경우와 동장영은 중공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을 전달하고 훈춘현위가 “좌”경로선을 집행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이 지구에 쏘베트를 건설한 것은 좌경로선이고 민생단의 책동이다”고 질책하였다. 이들은 5월달에 이미 희생된 원 훈춘현위서기 서광(徐光)를 지명비판하고 현위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령북유격대 정치위원 박두남을 파쟁분자라 비판하고 그의 중공당 당적과 정치위원 직무를 취소한다고 선포하였으며 권총까지 회수하였다.
  
7월 20일 반경우는 김남규네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집 뜨락에서는 한 개 분대의 유격대원들이 한창 식사준비를 하면서 새로 로획한 일제 3.8식보총을 돌려가며 구경하고있었다. 박두남도 그 총을 구경하겠다고 넘겨받은후 인차 총알을 재워넣고 문앞에 달려가 반경우를 겨누며서 소리쳤다.
“애매한 박두남을 죽이려 하는 네놈이 먼저 죽어야 한다!”
박두남의 웨침소리에 뒤이어 총소리가 울리고 반경우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 명사수인 박두남은 쓰러진 반경우의 몸에서 재빨리 권총을 빼들고 유격대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에게 덤벼들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나서 산림속으로 도망쳐버렸다.
  
반경우의 피살은 동만특위에 있어서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동만특위에서는 선전부장 리상묵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을 직접 령도하게 하였다. 리상묵은 훈춘 당조직, 혁명정부,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무단적으로 선포하고 현위위원 오일파등 구급이상의 주요간부 60여명을 체포하여 령북, 령남의 3개 구류소에 감금, 반년 남짓한 기간내에 갖은 흉악한 고문을 거쳐 6차에 나누어 60여명 간부중 한창혁 한사람을 제외한 전부를 총살하거나 타살하였다. 그리고 지주, 부농 가정출신인자, 문장이나 쓸수 있는 지식인, 로간부, 과거 조선독립군과 조선공산당 당파에 참가했던자, 사업중에 참오가 있었던자, 사업표현에 이상이 있다고 보이는자, 유격구의 생활곤난에 불평표현이 있었던자, 심지어 식사중에 밥알을 흘린 사람까지도 모두 민생단원이라고 몰아치면서 그중 100여명이나 체포, 학살하여 전체 유격근거지가 내부공포에 떨게 하였다.
  
1934년 1월 공청단만주성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 8월 1개월간 동만에서 민생단을 크게 파괴하였는데 항일유격구와 유격대내에서 민생단 200여명을 발견하고 그 수령 12명을 선택하여 총살하였다.
 
41. 반《민생단》투쟁2

 

무한히 확대되는 억울한 사건에 련류되여 원 조선공산당원 항일로간부 등 전부 숙청
  
파쟁주의자도 민생단으로 몰려
1933년 9월, 동만특위는 제1차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반“민생단”투쟁을 새로운 고조에로 불어일으켰다. 확대회의의 결의문은 “조선국 파쟁주의자와 민생단분자들이 하나로 되어 당내에서 일본간세계통을 건립하고 당의 령도기관을 차지함으로써 중앙에서 온 편지(“1.26편지”)에서 제출한 당면의 임무를 완전히 집행할수 없게 하였으며 당과 혁명운동이 매우 큰 손실을 받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하여 과거 조선공산당 각파와 그 산하 반일혁명조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민생단과 동일시되여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령도기구도 개편되였는데 특위조직부장 김성도를 “파쟁령수”로 지목하고 그의 직무를 해임, 총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반년전만 하여도 동만특위순시원의 신분으로 화룡현에서 수십명의 조선인혁명동지들을 민생단으로 몰라 억울하게 죽게 한 김성도자신도 결국은 마촌 남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1933년 12월 7일,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 만주성위는 련합으로 “일본강도의 간세인 민생단 및 파쟁을 반대할데 관하여 한국민중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문장에서는 “파쟁분자들은 그 무슨 에멜파, 화요파, 상해파, 서상파, 고려공산청년단파 등으로 나뉘여져있다. 이런 민족주의의 주구, 간세들로서 사람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중국공산당, 반일유격대와 반일회 등 국중단체속에 섞여들어와 일본의 간세작용을 일으키고 중한민중련합반일의 민족혁명을 파괴하고자 한다. 일체민족주의의 파쟁령수와 민생단은 모두 일본강도 제국주의의 간세이고 반혁명분자들이며 당신들 민족의 계급적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흘후인 12월 11일에는 동만당, 단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당과 단의 계급성분과 민족성분을 전변시키며 기층간부까지의 모든 당, 단조직과 반일회, 농민협회, 농민위원회, 인민혁명정부, 유격대 등 일체 군중단체의 령도기관을 개조하여 파쟁분자들을 모조리 몰아내는 조직상의 철저한 전변”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지시정신하에서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은 더욱 치렬하게 전개되는수밖에 없었다. 특위서기 동장영은 원래 신체가 허약한 편이였는데 민생단을 신문하느라 며칠간 각혈까지 하였다고 한다.
  
민생단에 대한 적발, 체포와 고문은 계속되였는데 간부뿐만아니라 일반군중과 군대속에서도 살벌하게 진행되였다. 무슨 공작상의 착오가 있으면 민생단작용이 아닌가고 감시하였기에 일반은 공포에 떨었다. 이에 따라 군대의 전투력도 저하되였다. 체포될가봐 두려워 도주한자도 있었다. 어떤 민생단사건으로 검거당한자는 자수해야 산다는 호소밑에서 체포된 첫날부터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백이라고 확인될가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고심초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과거착오를 민생단의 작용이였다고 밝히고 자기와 같이 공작한 동지들을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공술하였다. 과거의 민족주의자, 파쟁분자는 모두 민생단이라고 규정되였다. 민족주의자, 피쟁자와 민생단은 삼위일체라고 인정되고 한몸에 새개의 머리가 그려진 그림에 민족주의, 파쟁분자, 민생단이라고 글을 쓴 만화가 일시 성행되였다.
  
무한히 확대된 반"민생단"투쟁
1934년 3월, 동만특위는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에서 각 현 유격대책임자들이 참가한 련석회의를 소집하고 동만4개현의 유격대를 합편하여 통일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정, 원 연길현 유격대 대대장 주진(朱鎭)과 정치위원 왕덕태를 사장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독립사 산하에 4개 퇀과 하나의 유격대대를 두었는데 무장대오는 900여명에 달하였고 군중무장으로는 청년의용군이 200여명, 반일자위대가 천여명이였다. 혁명대오내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민생단”투쟁이 매우 첨예하게 진행되였지만 독립사 퇀급간부가운데는 대다수가 조선인이였다.
  
1934년 11월초순, 공청단만주성위 순시원 종모모가 동만에 온후 반“민생단”투쟁은 두 번째 고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만특위 “특별회의”는 2, 3일간 열리였는데 만주성위의 “10.1일 서한”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만당내의 반“민생단”투쟁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하였다. 최후로 주진, 리상묵과 훈춘현위서기 최학철을 “민생단”의 두목이라고 토론결정하였다.
  
주진, 리상묵 등을 체포하게 된 주요원인은 간도현병대의 특무외각조직인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가 1935년 1월 3일에 음모, 조작한 “사방대사건(일명 한영호사건)”이다.
1935년 1월 3일, 간도협조회공작원들이 공산당지하공작원으로 가장하고 연길현 사방대유격근거지를 찾아왔는데 이들은 제1보초선에서 보초병과 한담하면서 유격구량식운수대장 한영호를 잘 알고있는 듯이 백초구일대에 공작하려 나간 “한영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보초병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갑자기 총을 빼앗아가지고 적구로 달아나버렸다. 불의의 습격에 무장까지 빼앗긴 보초병은 유격구령도에게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게 되었고 령도기관에서는 한영호가 적들과 내통하는 민생단원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적구에서 임무를 완성하고 사방유격구로 돌아온 한영호는 인차 체포되였는데 심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여 자신이 민생단원임을 승인함과 동시에 독립사 사장 주진과 제1퇀 제3련장 박춘도 민생단원이라고 공술하였다. 주진, 박춘도 인차 체포되였는데 주진은 탈출하고 박춘은 고문 끝에 특위조직부장 리상묵도 민생단이라고 공술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은 민생단특위서기로, 독립사 사장 주진은 민생단특위 군사부장으로, 훈춘현위 서기 최학철은 민생단특위 선전부장으로 인정되고말았다.
  
리상묵이 도주하고 주진이 체포되였다가 탈출한 사실은 항일혁명대오에 일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선 주진의 부하로 있던 인민혁명군내의 조선족간부 40여명이 민생단원으로 체포, 총살되였다. 그리고 주진, 리상묵 등 주요한 간부들의 도망과 변절로 하여 동만특위도 연길현 삼도만에서 왕청현 대황구로 전이하게 되었다.
  
조공단출신 항일로간부 전부 숙청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의 엄중성을 고려하여 만주성위 신임대리서기 양광화는 중공할빈시위 서기 위증민을 전권대표로 동만에 파견하였다.
  
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동만특위는 만주성위 전권대표 위증민의 조직하에 왕청현 남하마탕 대황외에서 동만당단특위 제1차련석확대회(대황외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동만특위를 철소하고 위증민을 서기로 한 새로운 특위를 조직하였으며 각 현의 현위를 특별지부로 개편하고 안도와 라자구에 두 개의 특구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대황외회의는 반“민생단”투쟁이 “네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살면 네가 죽는 생사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숙반위원회를 조직하여 인민혁명군과 유격구내에서 전문적으로 민생단과 반혁명군과 유격구내에서 전문적으로 민생단과 반혁명분자를 진압한다고 하였다. 이미 500명 이상의 민생단을 체포하였지만 아직도 “볼만한 성적을 얻지 못하였고” “지금 민생단이 매우 많다”고 인정하면서 “민생단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또 적지 않은 새로운 발전이 있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새로 조직된 숙반위원회는 동만특위 상무위원 3명(서기 위증민, 조직부장 리학충, 선전부장 리송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