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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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반일통일전선 무어

 

유격대와 구국군 어깨겯고 싸워 각지에서 일본군 위만군 무찔러
  
대도회와 구국군
제1차 반“토벌”전에서 연변의 각 현 항일유격대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대오를 한층 성숙시켰을뿐만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쌓아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낼 견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가 약하고 적이 강한 참혹한 조건하에서 전 민족적인 항전만이 승리를 취득할수 있다고 인식, 마땅히 구국군을 비롯한 반일부대와 단결하여 공동전선을 무어야 한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구국군과 한족반일군중冗?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인 대도회는 반일항전에 적극 나서면서 동만의 일본침략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32년 3월 20일, 왕덕림의 구국군 250여명과 대도회 50여명은 로투구를 습격했다. 3월 30일에는 천보산광산을 습격하고 이튿날인 31일에는 왕덕림의 구국군 1500여명이 배초구를 공격했다.
  
4월 2일, 400여명 대도회무력은 삼도구를 습격하여 4월 8일까지 점령하고있었고 4월 8일에는 이도구(서성)를 습격, 중공공안분서 40여명 장병과 50여명 보위대원들이 봉기하여 대도회와 합류하여 일본경찰서를 습격하였다.
  
5월 9일에는 구국군과 대도회가 련합작전하여 달라자를 습격하고 이튿날인 5월 10일에는 구국군 220여명이 삼도만을 습격하였다. 6월 8일 구국군 200여명은 가야허일본경찰분서를 습격하였고 6월 14일에는 700여명 병력으로 삼도구를 다시 공격하여 일제가 무산수비대까지 동원하고 2차례의 비행공습까지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1932년 10월 27일 밤, 구국군 오의성부대 200여명은 쌍하진으로부터 목단촌을 경화하여 배초구를 습격하였고 11월 2일에는 대도회와 손을 잡고 동불사를 습격하였다.
  
“대도회 등 자발적인 대중무장과 구국군의 저항은 일제의 크나큰 장애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1932년 4월 19일 이까다가 이끄는 제19사단 1600여명의 간도파견대와 일본관동군 제10사단 1400여명 도합 3000여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두갈래로 연변에 쳐들어와 대도회와 구국군에 향해 대규모적인 포위토벌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화한 정규군에 의해 대도회가 괴멸되고 구국군도 괴사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들 수천명의 무장력량이 일제에 의해 비극을 맞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하여 일제의 연변침략이 견제되였고 동만 각 현 유격대건립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게 되었습니다.”
  
구국군과 대도회의 반일투쟁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교수의 긍정적인 평가였다.
항일의 기발을 추켜들고 연변지구에서 활동하던 구국군은 일제의 “포위토벌”로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1933년부터 중쏘변계로 밀리다가 쏘련으로 넘어간후 쏘련으로부터 관내로 철수해버리기 시작했다. 왕덕림과 공헌영 등이 이끄는 부대도 연변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구국군의 장병들은 의연히 남아있었는데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 등이 계속 남아있었다. 이들이 이끄는 구국군은 연변과 동녕, 녕안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통일적이 못되였는데 어떤 이는 항일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주저하면서 방황하고있었다. 이러한 장병들은 틀림없는 중요한 항일력량이였다.
  
제1차반“토벌”전에서 각 현 항일유격대는 구국군의 남아있는 부대를 쟁취하여 공동항일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동녕현소재지전투
1933년 9월, 김일성이 지휘하는 왕청, 훈춘 항일유격대의 110여명으로 조직된 결사대는 오의성, 시세영, 사충항이 이끄는 길림구국군과 리청천이 인솔하는 대한독립군부대와 련합작전하여 동녕현소재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련합부대의 병력은 3000여명이였다. 동녕현소재지에는 이사다가 이끄는 500여명 일본관동군 병력과 관퇀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병력외에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놈들은 대포와 비행기로 장비되여있었고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라자구를 떠난 원정부대는 며칠간의 시간을 로상에서 보낸후 9월 6일 밤부터 9월 7일 낮까지 동년현소재지전투를 벌리였다. 유격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국군과 제3퇀과 함께 동녕성 서대문밖 릉선에 2층으로 축성되여있는 서성포대를 쳐부실 임무를 맡았다.
  
유격대 지휘관 김일성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훈춘중대를 짜작골에 배치하고 왕청중대를 주공방향에 진출시켜 서산포대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밤 9시 적진에 은밀히 접근한 유격대 파괴조는 진공의 신호총소리와 함께 적포대를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아간에는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왕청유격대는 련속하여 10여차의 진공을 발동하면서 혈전을 벌리였다. 그때를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을 봉쇄하게 하는 한편 일부 역량을 포대북쪽으로 위회시켜 맹렬한 작탄공격으로 서산포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동틀무렵이 다 되어서야 포대는 저항을 중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주력부대는 일본군수비대병영을 강철그물같은 봉쇄망으로 둘러싸고 적의 필사적인 반돌격시도를 가차없이 좌절시키였다. 일본군은 북문으로 도망쳤다.
  
편의대로 가장하고 시내에 미리부터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을 거쳐 시내에 돌입한 구국군부대들도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전투를 하였다.
  
...우리 부대는 결사적인 시가전으로 점령구역을 확대하면서 적들을 현성일각으로 압축하였다. 구국군도 이에 고무되여 병기공장을 점령하고 군수품적치장들을 습격하였다. 시가전은 여러 시간동안 계속되였다.
  
련합작전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였다고 인정한 나는 아군에 철수명령을 내리였다. 유격대는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현성밖으로 빠져나오는 구국군부대들을 화력으로 엄호하였다.
  
우리가 사충항려단장이 중상을 당한채 시내안에 쓰러져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이때였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 사잔판에 려단장을 남겨둔채 시내밖으로 도망쳐버리였다. 부관도 그를 돌보지 않고 살구멍을 찾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 나는 최충국에게 사충항을 구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최충국은 그 명령을 결사적으로 집행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낸 사충항을 등에 업고 그를 화력으로 엄호하면서 부대를 고지쪽으로 무사히 빼돌리였다.’
  
이번 전투는 동만유격대와 구국군 등 반일무장부대와의 가장 규모가 큰 한차례의 련합전투였다. 전투에서 유격대원들은 유격대의 영용왕강한 전투정신을 충분히 과시했으며 구국군과 기타 항일부대의 높은 신망을 얻었다.
동녕성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일본군과 위만군 150여명을 죽이고 7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위만경찰 2명을 죽이고 3명을 부상입혔다.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에서는 51명이 희생되고 19명이 상했다.
  
라자구공격전
1934년 6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군 제3퇀, 제4퇀의 부분적대원들, 수녕반일오맹군, 라자구일대의 사충항, 공헌영, 시세영, 리산협이 거느린 항일구국군은 도합 600여명으로 련합부대를 구성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을 들부시기로 하였다.
  
련합부대는 주보중과 김일성의 사회하에 적들을 소멸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련합군의 진공기미를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부근에 있는 소속부대 500여명을 라자구에 집결시켜 전호를 파고 포대를 쌓아놓고 저항할 준비를 하였다.
  
6월 26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부대는 부락서쪽의 평지에 매복하여 적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사도하자에 주둔하고있던 수녕반일동맹군과 항일구국군 사충항, 시세영 부대는 마을동산의 뒤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습격하였다. 위만군은 박격포로 아군의 진지를 포격하였으나 련합부대가 맹렬하게 반격하는바람에 하는 수없이 라자구거리로 도로 들어갔다. 이날 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적 30여명을 죽이고 보총 4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이튿날, 인민혁명군, 동맹군, 항일구국군의 지휘원들은 회의를 열고 세 개 부대를 편성하여 라자구를 공격할 전투방안을 짰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라자구공격전이 시작되였다. 제2부대는 라자구서쪽으로부터 거리에 쳐들어가 총 한방 쏘지 않고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경찰들을 포로하고 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들은 그 길로 제3부대와 련합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영부를 진공하였다.
  
제1부대는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는데 그것은 이번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고리였다. 그런데 적들의 포화가 어찌나 맹렬한지 일거에 쳐부실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구국군의 어떤 지휘원들은 동요되여 철퇴하자고 주장하였다. 구국군이 철퇴하면 아군은 매우 큰 손실을 받을것이였다. 인민혁명군전사들이 다시 한번 공격하였으나 여전히 서산포대를 점령할수 없었다.
  
이때 시가전도 긴장했다. 위만군은 아군을 반격하기 위하여 한 상점을 점령했다. 그러자 훈춘 4퇀의 부분적조선족전사들은 상점지붕에 올라가 뜨락을 지키는 적들에게 연길폭탄을 안기였다. 하지만 놈들은 그냥 완강하게 버티고있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였다.
  
전투가 시작된지 사흘째되는 날인 28일이였다. 전투를 시작하기전에 아군지휘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각 부대의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일거에 점령하기로 하였다. 적들은 박격포를 쏘아대고 비행기로 폭격하였다. 그래서 구국군은 많은 중상자를 냈다. 구국군은 동요했고 사기가 저락되였다. 이것을 본 인민혁명군 전사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꼭 점령하여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인민혁명군 전사들이 결사적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들어가 30분동안에 “난공불락의 보루”라고 큰 소리치던 적의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시가전에서 동요하던 구국군전사들이 갑자기 사기가 올라 용감히 적의 영부로 쳐들어갔다. 구국군은 인민혁명군과 협동작전하여 재빨리 위만군 영부를 짓부셔버렸다.
  
전투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하는수없이 투항하겠으니 담판할 대표를 파견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련합부대 지휘부에서는 적의 요구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반일부대에서 담판하러 오는 대표 한사람을 솨죽였다. 그러자 적들은 다시 진지를 사수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련합부대는 7주야의 격전을 거쳤지만 라자구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는 바람에 련합부대는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련합부대는 이번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이번 진공전을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는데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44. 제2차《반토벌》투쟁

 


 
일제 "보보점령"전술로 모조리 죽이고 불살라 유격대 적후에서 일군 위만군 습격 군수창고 소탕
  
소왕청작전
1933년 11월 17일, 일제는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소왕청유격근거지, 연길현 왕우구, 삼도만유격근거지,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자, 남구 유격근거지를 불의에 포위공격해왔다. 일제의 토벌중점은 왕청유격근거지였다. 1500여명의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이 3개 방면으로 소왕청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기는 아군의 군정지도기관이 자리잡고있는 마촌과 리수구를 연거퍼 폭격하였다.
왕청유격대의 반“토벌”투쟁의 총성은 뾰족산과 마반산에서부터 울렸다. 유격대와 적위대는 유리한 산세를 리용하여 적을 진지 가까이까지 끌여들여 매복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적들은 뽀족산앞자락에서 60키로메터 상거한곳에까지 기여들었다.
“땅, 땅...”
유격대는 불의에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한편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 적을 요정냈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놓는 벼락치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유격대의 드센 반격에 적군은 악착같이 달려들었으나 전초진지를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 산기슭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등뒤로부터 우박같은 총탄이 쏟아졌다. 유격대원들은 언녕부터 반대편 산우에 매복해있었던 것이다. 배후의 공격까지 받은 적군은 10여명의 살상자를 남기고 줄행랑을 놓고말았다.
포수대로 조직된 수십개의 저격조는 유리한 자세를 리용하여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을 쏘아눕혔고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전호를 오르내렸다. 아이들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마반산 쑥밭골초소에서 적을 저격하던 방차대는 새벽부터 쑥밭골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적과 치렬하게 싸웠다. 귀틀집초소가 불에 타 물어질 때까지 적의 진공을 7차례나 물리치면서 영용히 싸운 방차대원들은 총탄을 열세군데, 일곱군데, 세군데, 두군데 맞은 유격대원도 있었다. 그후 왕청유격구사람들은 그들을 이름 대신 “13련발”, “7련발”, “3련발”, “2련발”이라고 불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련속 투입되자 유격대는 전면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새로운 전술적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종심깊이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법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게 때리였다.
  
불무지작탄전은 그 효률이 100프로였다. 유격대는 진지를 옮길 때마다 다음 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아군의 방어진을 차지하게 바쁘게 불무지앞에 모여들어 언몸을 녹이군 하였다. 그럴때마다 작탄이 폭발하여 적들을 요정냈다.
  
유격대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속에 들여보내여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 같은데 총을 서너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군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루밤사이에도 세 번, 네 번, 지어는 다섯 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적들의 전술도 이만저만 악착스럽지 않았다. 유격구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토벌”이 아니라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이행하였다.
  
일본군의 포화에 잿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유격대에 검질기게 달라붙어 장기전을 시도하는 한편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죽였다.
  
한달 나마 소왕청 반“토벌”전투를 진행하면서 유격대는 적군 200여명을 소멸하였다. 그러나 그 한달 나마되는 동안 항일군민 1000여명이 죽었다. 거기에다 반“민생단”투쟁까지 겹치여 유격근거지는 인심이 황황해졌고 당과 유격대의 력량이 엄중히 쇠퇴되였다.
  
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공왕청현위는 소왕청유격구를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1934년 1월의 어느날 밤, 항일군민들은 적들의 방위가 허술한 서대파와 쟈피거우를 돌파구로 하여 포위망을 뚫은후 대황외와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했다.
  
적아간의 공방전이 가렬하게 진행되던 어느날 유격대 정위 김일성의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는 건의하에 유격대는 두패로 나뉘여 작전하게 되었다. 한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심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패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적구로 나갔다.
  
2월중순, “토벌”대는 십리평항일유격근거지를 거듭 진공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과 특위기관은 부분적 유격대과 군중들과 함께 십리평 묘구의 대북구일대로 전이했다. 3월 21일 적군이 포위해왔다.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는 전투에서 중병으로 시달리고있던 동장영은 설상가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조선족녀전사 최금숙(왕청현부녀회 주임)은 탄알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동장영을 업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동장영은 최금숙에게 엎힌채 희생되고 최금숙도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적들의 등뒤를 들부시다
김일성의 지휘하에 유격대 한 개 편대는 밤어둠을 타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예견대로 적후방은 오히려 텅 비여있었다. 그때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맨처음 친 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우리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울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삼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사이의 철길을 끼고있는 주요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 “토벌대”로 변장한 우리는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의 조로 나누어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여일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기타 유격구에서의 반"토벌"전
연길현유격구는 대부분은 야산지대여서 적들에게 쉽게 로출될 불리한 형편에 있었다. 일제는 “연길현 공비소굴을 완전히 소멸한다”고 장담하면서 포위공격해왔다.
  
적들은 연길현 팔구와 왕우구 등 유격근거지에 이르자 야포와 박격포 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유격대를 공격했다. 부암에서 벌어진 첫날 전투에서 유격대의 명사수들은 50여명 적을 사살,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유격대와 군중들이 집중되여있는 사방대를 향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왔다. 적들은 사방대의 관문인 작살바위유격대진지를 맹포격하면서 아군의 방선을 뚫으려 들었다. 작살바위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은 적을 근거지에 접근시켜놓은후 맹사격을 들이대 쓰러눕히기도 하고 바위돌을 굴려 대갈통을 박살내기도 하면서 하루동안이나 고수했다.
  
1933년 12월 24일부터 1934년 2월 21일까지 연길현유격대 주력은 연길현 삼도만유격근거지일대에서 적들과 격렬한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4년 2월초 연길현경찰국장 및 경찰대대장이 령솔하는 300여명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거 진공했다. 삼도만유격근거지 군민들은 련속 14일간 적과 23차 교전하여 150여명을 섬멸하였다. 3월 29일, 김순덕, 왕덕태, 남창익 등이 인솔하는 유격대는 연길현 팔도구의 삼상촌과 장재촌 사이에 매복하여있다가 “토벌”하러 오는 팔도구경찰대와 자위대를 공격하여 경찰순경부장을 비롯한 일군 몇 명을 격살, “토벌”을 격퇴시켰다. 같은 달 연길현유격대 한 개 지대는 삼도만 소묘구에서 “토벌”대 15명을 사살하고 총 13자루를 로획했다.
  
유격대는 근거지보위전투를 벌리는 동시에 부분적 병력을 적후에 파견하여 적병영과 군사요새를 습격하였다. 1934년초 연길현유격대 한부대는 로동자들의 배합하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천보산동은광에 쳐들어가 대량의 탄약과 광산경비대의 총을 뢰획했다.
  
화룡현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일본군을 쳐부셔 기타 유격근거지군민들의 반“토벌”전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유격대 대장 차룡덕은 유격대를 이끌어 삼도구의 일본경찰대를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했다. 유격대는 또 청두골에서 매복전을 벌려 일본수비대를 공격, 군용자동차를 훼멸시키고 30여명을 격살했다.
  
훈춘현유격대도 대황구와 소오도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50여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유격근거지내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벌려 많은 령도간부와 전사들을 의심하고 처결하는 바람에 유격대의 사기가 저락되고 인심이 황황하여 반“토벌”전에서 작전을 순조롭게 조직할수 없어서 중대한 손실을 보기도 했다.
  
1934년 봄 동만 4개 현 유격근거지군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의 “토벌”과 맞섰다. 근거지의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량면으로 유격대를 원호하였다. “토벌”군이 쳐들어와 무차별학살과 방화를 했으나 군중들은 추호도 굴하지 않고 불탄 집터에 불도 꺼지기전에 다시 집을 지었다. 적들이 소각하면 짓고 또 짓고 하여 심지어 한 집터우에 서른두번이나 집을 짓기까지 하면서 유격대와 혼연일체가 되어 근거지를 보위하면서 “포위토벌”을 분쇄했다. 이번 반“포위토벌”을 통하여 유격대와 공산당조직은 더욱 장대해졌다.
 
45. 일제의 집중영 《집단부락》

 

부락주위에 높은 담벽 쌓고 깊은 도랑 파 밤낮 주민 한사람 걸리면 10호 련좌

일제의 "채무농노"로
“일제는 정치면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고 조선족인민들과 항일부대와의 혈연적인 련계를 단절시켜 유격구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경제면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을 <안무>한다는 미명하에 <반일적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집단부락정책>이거나 <안전농촌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의 이런 정책은 조선족인민들을 일본독점자본에 예속시키는 “통제-안정방침”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통치정책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931년 “9.18”사변이후 일제의 침략전쟁과 항일무장조직에 대한 “토벌”로 하여 수많은 조선족농민들은 집이 소각당하는 등 전쟁재앙을 입어 도처로 류랑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동북 각지에 피난민이 생겼는데 위만주국민정부척정사 제10과의 “간도집단부락건설개술”(1935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연변 4개 현의 피난민은 1611호에 8387명에 달했다.

일제는 피난민을 “구제안캇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총독부와 망철회사가 공동으로 투자하고 동아권업회사가 경영하기로 하고 1932년부터 우선 남북만의 피난민을 안치하기 위하여 료녕성 철령현 락석산, 1933년에는 료녕성 영구현 전장대, 흑룡강성 주하현(현재 상지현) 하동촌, 1934년에는 흑룡강성 수화현 현성부근, 1935년에는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각기 “안전농촌”을 건설하고 피난민과 류랑민을 수용하였다. 일제는 “안전농촌”을 경영하면서 “단순한 구제에 머물러있지 않고 진일보 저극적인 지도하에 조선인의 모범촌을 건립한다”고 하면서 1938년부터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하였다.

자작농창정계획이란 일제의 투자하에 토지, 부락건설비, 가옥건축비, 농업경영비 등을 농민들에게 대여준후 8푼의 리자를 가첨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매년 분년정기상환으로 10~15년간에 빚을 전부 상환하면 토지와 가옥 등이 개인소유로 되어 자작농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보기에는 농민의 경제적지위를 향상시키는듯한 정책으로 보이나 실제상 농민들을 채무농노로 전락시켜 동아권업회사의 토지에 속박되게 하여 자유로 이주하지 못하게 하며 농촌내에는 경찰분서와 자위단을 건립하고 농민들을 감시함으로써 항일부대와 민중간의 련계를 단절시키자는 정책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안전농촌의 농민들은 해마다 빚을 상환하기는 하나 이듬해 봄이 되면 생활이 곤난하게 되어 또 회사에서 돈을 꿰내여 그해의 농사를 지으나 이듬해는 또 빚을 더 지게 되는 처지에 빠지는 악선순환을 거듭해야 했다.

“자작농창정”대상으로 된 조선족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본식민회사에 빚과 리자를 상환해야 할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가렴잡세도 납부해야 했다. 만약 제때에 규정된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면 이른바 “연장세”와 “예약위반금액”과 같은 추가금액을 내야 했다. 이렇게 되어 농민들의 빚진 노예로 되어야했다. 1935년 연길현 동성용촌에는 “자작농창정”대상으로 된 집이 42세대있었는데 그들은 360정보의 토지를 부치고있었다. 그 토지값은 도합 3만 5500엔이였다. 1945년에 이르러 이곳 농민들은 이미 각종 세금 5만 7300여엔을 납부하였으나 일본식민지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후 4년동안에 1만 6700엔을 더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제의 “자작농창정계획”은 일본식민주의자들이 략탈한 토지를 고가로 파는 고리대금형식의 매우 간편한 방식에 의거하여 최대액수의 리익을 빨아내는 착취수단이였다.

"보갑제도" 실시
“1933년부터 일제는 연변지구에 이른바 <피난민과 빈곤호구제>의 명의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처음에는 원지방으로 돌아갈수 없는 피난민을 상대로 상부지부근 또는 기타 <안전한 지대>에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안치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1차로는 북하마탕, 이란구 태양 등 9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했는데 855호에 4470명이 수용되여있었고 1934년에 제2차로 연길현 금불사, 삼명월구 등 1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는데 수용되여있은 농호는 478호, 인구는 2557명이였다고 한다.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치안특별공작의 일환으로 삼고 무릇 항일유격구 및 항일근거지를 “토벌”, 소각하고 근거지의 인민과 그 부근의 산재호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민중을 감시하고 항일유격대 및 기타 항일군과의 련계를 차단하는 즉 “비민분리”의 “치안숙정” 목적을 위하여 리용하였다. 일제의 1935년 12월 통계에 의하면 연변에 건설한 “집단부락”은 121개이며 1만 2362호, 8만 1955명을 수용하였다.

1936년 8월, 일제와 괴뢰만주국정부는 “재만조선인지도강요”를 제정하고 연변 5개 현과 동변도의 18개 현을 조선족집거구로 지정, 중쏘, 중몽 변계지구와 기타 산재지구와 조선족을 강박적으로 일제가 지정한곳에 가서 집중하게 하였다. 일제는 “집단부락”건설을 위하여 농촌에 산재해있는 집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한데 모아 저들의 통제와 감시밑에 몰아넣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집단부락”의 구조는 1개 촌에 100호를 기준으로 하고 부락 4변 주위에는 2.5메터의 담벽을 쌓고 담벽 4각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며 대문은 한 개만 내였다. 항일부대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담벽밖에는 또 너비 3메터, 깊이 2메터의 깊은 도랑을 팠다. 부락 중앙에는 경찰분서 파출소와 자위단을 설치하고 부락 통용문은 밤낮 자위단이 보초를 섰는데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는 대문을 닫는다. 부락주민들에게는 “량민증”을 발급하여 “량민증”이 없는자는 “반일분자” 또는 “통비”혐의로 체포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5가작통”, “10가련좌법” 등으로 불리우는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10호를 한패로 하고 촌 또는 이에 준할수 있는 구역내의 패로 1갑을, 경찰서 관할구역내의 갑들로 1보를 조작하고 주민들 호상간에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통비”혐의에 걸리면 본인은 물론 5호나 10호가 “련좌”되여 함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부락민 호상간에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1936년 3월말, 일제는 동만지방에서 “보갑제도”를 실시한 정황은 이렇다. 연길경찰청, 보 2개, 갑 44개, 패 429개,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화룡현, 안도현 등 다섯 개 현에다 보 116개, 갑 523개, 패 7278개를 조작했다.

가혹한 수용소
차조구 중평촌의 “집단부락”은 1934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동안에 건설되였다. 이 “집단부락”은 연변에서 두 번째로 건설한 36개소의 “집단부락”가운데의 하나로서 당국에서 조작한 “방아를 위한 집단부락”규격에 의해 건설되였다. 부락의 형태는 정방형이였는데 포대, 토성, 전호, 전기철조망 등의 방어설비를 갖추었다. 포대는 진흙을 이겨서 쌓거나 토피로 쌓았고 포대와 포대사이의 거리는 100메터이고 포대안에는 방한설비로 온돌을 놓았다.

흙토성높이는 3.33메터이고 밑너비는 1.98메터, 웃너비는 0.82메터이고 토성우에는 14호철사로 전기철조망이거나 가시철조망을 늘이였다. 전호의 표준은 웃너비 4.62메터, 밑너비 0.99메터이고 길이는 3.33메터이상이였고 문안팎에 약 2.62메터 높이의 철조망을 둘렀다.

“집단부락”건설에 수요되는 설비는 비용만도 당시 시가로 약 11만 4060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집단부락”건설에 동원된 로동력은 연인수로 3300명이였는데 그것은 호당에 풍기면 연인수로 28.6명이나 되었다. 공공시설비용과 영농자금, 가옥건축비는 호당 6250원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한 이 금액은 새로 지은 자기의 가옥을 저당잡히고 4년을 환납기한으로 하고 현에서 대여받은것인데 절대부분 농호들은 그 돈을 환납할 능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집단부락”에 들어선 첫날부터 채무자로 전락되였다.

중평촌의 “집단부락”에는 105호의 조선족과 5호의 한족농민이 수용되는데 그들은 원래 241쌍의 경작지를 가지고있었는데 호당 2.34쌍이였다. 그러나 “집단부락”에 수용된후 경작지면적은 크게 감소되였다. 경작지를 1.7쌍이하 갖고있는 농호가 이사하기전의 12%로부터 32%로 늘어났다. 자작농은 27.6%로부터 15.6로 감소되였고 소작농은 51.7%로부터 59.3%로 증가되였다. 부락과 멀리 떨어진곳에 가서 밭을 부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먼곳의 밭들은 죄다 황무지로 변했다. 식량이 모자라는 농민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웠다. 그들이 들어있는 집은 헐망하기짝이 없었다. 굶주림과 추워에 견디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이 앓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집단부락에서는 공무인원과 불구자를 제외하고 18세부터 40세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자위단에 참가해야 했다. 부락내에 자위단시설이 설치되고 몇자루의 총과 탄알이 배치되였으며 단원들은 륜번으로 순라를 돌았다. 매호에서는 자위단비와 보갑비 등 경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집단부락”의 경비는 일본헌병대의 지휘밑에 위만군과 경찰 그리고 매 “집단부락”에 조직된 약 50~100명에 달하는 일반자위단 혹은 무장자위단이 담당하였다. 1935년 연변유격근거지주변에 조직된 자위단은 241개였는데 그 대원은 7146명이였다. 1936년에는 319개로 1만 8131명으로 증가되였다. 이가운데 직업무장자위단이 11개로서 141명이였다.

“집단부락”에는 부락장과 부부락장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락장은 “보갑련좌법”에 의해 갑장을 겸하고 부부락장은 자위단장을 겸하였는데 만주국현장이 그들을 임명하였다. 부락장은 현의 일반행정보조사무를 겸하고 부락민에 대한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부부락장은 부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자위단에 대한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였다.

부락민은 외출시 규정된 분량이상의 량식과 물자를 가지고 다닐수 없었으며 반드시 부락장 또는 경찰서의 허가가 있어야 휴대할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이 항일부대에 물자, 량식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하기 위해서였다.

“실제상 <집단부락>은 <집중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집단부락>의 전략적인 성적을 보고 이 정책을 1936년부터 전 동북에 보급하였습니다. 항일부대가 활약하고있는곳이기만 하면 강제로 <보급>하였는데 어떤곳에서는 단독으로 <집단부락>을 건설하였고 어떤곳에서는 <집가병촌(集家幷村)>으로 산재호를 모조리 불사르고 강제로 <치안이 확보된>부락에 집결시켰는바 <병촌>부락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한 부락에 수용하고 유격근거지나 유격구는 전부 소각 또는 파괴하여 <무인지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집단부락”정책은 중세기적인 야만적이고 가혹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46. 독립사의 출격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건립 주동출격해 반“토벌”투쟁 전개
  
능지영회의
두차례의 일본군“토벌”을 이겨낸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더한층 발전장대해져 1934년 봄 동만의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발전하였으며 적위대 등 군중성 자위무장도 1000여명 되었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이러한 항일무장대오는 이미 동만지구의 항일무장의 골간력량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1934년 3월말 중공동만특위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유격대는 중공중앙의 “1.26”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동만의 4개 현 유격대를 토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건립”하라는 지시정신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항일유격근거지에서 중공동만특위와 4개현 유격대책임자들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동만항일유격투쟁 력사상 한차례의 중요한 회의였다.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 연길현유격대 대대장 주진, 정위 왕덕태 등 15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독립사 사장에 주진, 정위에 왕덕태가 선발되였다.
  
독립사는 4개 퇀으로 편성, 제1퇀은 원 연길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고, 제2퇀은 원 화룡현유격대로서 아래에 5개 련을 두고, 제4퇀은 원 훈춘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기로 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지휘부는 잠시 삼도만 동구에 앉히였다.
  
회의에서는 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을 강화하고 항일유격구를 확대시키며 항일유격전쟁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길동반일련합군과 남만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하여 동만과 길동에 분산되여 있는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할 방침을 확정했다.
  
주동적으로 적을 타격
독립사가 건립된후 일제의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단부락”건설을 더욱 다그쳤다. 때문에 로항일근거지에서의 독립사이 활동은 날따라 곤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사는 “한곳을 고수하면서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진공책략을 취하라”는 중공만주성위의 유격전술을 채택, 죽도록 산골을 사수하면서 적들과 소모전만을 펼치던 국면을 타개하고 적극적으로 적점령구에 진격해들어가 활동하기로 했다.
4월 1일, 동북인민군 제2군 독립사의 일부는 戮舅퓻諭별?련합하여 연길현 팔도구금광을 습격, 일만군과 3시간동안의 접전을 하였다.
  
4월 7일 독립사 일부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일만군경찰들을 습격, “집단부락”수건작업을 파괴했다. 4월 18일, 독립사 제1퇀 30여명은 왕청현 배초구 신안툰의 자위단을 습격, 총 20여자루 로획했다. 4월 22일, 독립사 일부는 연길현 차조구를 습격한후 명월구로부터 증원오는 일만군 한 개 부대를 소멸했다. 4월 23일, 독립사 제3퇀은 “집단부락”를 한창 수건하고있는 화룡현 우심촌을 습격하였다. 5월 2일 독립사 제3퇀은 안도현에서 련속 4일간의 격전을 벌려 안도 대전자를 점령, 일만군 30여명을 격살했다. 5월 9일 독립사 제1퇀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연길현 사도만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위만군을 습격 17명을 투항시키고 총 11자루를 로획했다.
  
7월에는 독립사 제2퇀 일부가 산림부대와 련합, 300여명 병력으로 안도 대전자를 밤낮 11일동안 포위공격하였다. 8월상순 독립사 제2퇀과 항일의용군은 안도현 대사하를 진공, 위만군 30여명을 소멸, 70여명을 포로했으며 100여자루 총을 로획했다. 8월중순 독립사 제2퇀은 기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점령, 위만군 300여명을 기의하게 하였고 그 일부를 인민혁명군에 참가시켰다.
  
안도현에서 독립사는 10개 반일무장부대와 련합작전하면서 왕덕태를 총지휘로 하는 항일련합지휘부를 건립하였는데 그 병력이 1000여명이 되었다. 련합부대는 련속적인 승리를 하면서 처장즈, 대전자, 태평구 등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3퇀과 제4퇀 주력도 왕청현, 동녕현, 녕하현 일대에서 유격전쟁을 주동적을 벌리였다. 왕청의 각 근거지는 적들의 장기적인 “포위토벌”로 하여 크게 파괴되였다. 하여 제3퇀은 적들의 주력부대를 피해 왕청과 녕안변계일대로 전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4년 5월 7일, 독립사 제3퇀은 구국군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위만군부대를 진공하여 많은 총과 탄약을 로획했다. 제3퇀은 또 소왕청 마촌등지에서 일만군과 전투를 벌려 일만군 25명을 소멸했다.
독립사 제4퇀은 훈춘으로부터 왕청, 동녕변계로 전이해와 활동을 벌리였는데 그 일부는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동녕현 이도하구의 위만군 장정단을 진공, 100여명을 포로하고 보총 30여자루를 로획했다. 6월 23일에는 라자구공격전을 벌리였다.
적들의 기재에 따르면 1934년 4월부터 10월 사이에 동만항일련합부대가 일만군을 103차나 주동적으로 습격하였는데 참전 련인수는 3537명이였다. 그중 2군 독립사가 53차 단독 출격, 참전 련인수는 1350명이였다고 한다.
  
제3차 반"토벌"투쟁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동만항일부대의 중견력량으로 장대해졌다. 독립사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에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지휘부를 건립하고 대일작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반일무장련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와 맞섰다. 일제는 반일력량이 장대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1934년 가을, 일제는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3차 “대토벌”을 감행했다.
  
일제는 중국공농홍군을 “포위토벌”한 장개석이 경험을 리용하여 중요한 부대를 중요한 도시와 교통요도에 배치하여 사수하게 하는 한편 정예부대를 집결시켜 “보보위영(步步爲營)”작전방침을 펼치였다. 적들은 항일근거지를 포위한후 “추격하면서 토벌”하거나 습격하는 등 전술로 독립사의 주력을 소멸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잔혹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인민군중과 항일부대와의 련계를 끊어놓아 항일부대가 기아와 추위속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려고 시도했다.
  
1934년 9월 히로세사단장을 총지휘로 하는 일본군정예부대와 위만군경비려, 정안군 등 “토벌대”는 비행기와 대포의 배합과 엄호하에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와 각 유격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준엄한 형세에 직면한 독립사는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을 타격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이미 파괴된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새롭게 개척한 근거지로 전이했다. 제1퇀은 연길현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등 근거지에서 철퇴하여 안도현 경내와 남호두 등지로 전이하고 제2퇀은 화룡현 어랑촌에서 물러나와 안도현 처창즈로 옮겨갔다. 제3퇀은 왕청현 대황외, 대왕청, 소왕청에서 퇴각하여 요영구로 전이하고 제4퇀은 훈춘현 하남, 하북, 반가채에서 빠져나와 금창, 화소포일대로 옮겨갔다.
  
독립사 각 퇀은 적들과 조우전, 습격전을 벌리면서 전이했다. 10월 8일, 독립사 300여명은 왕청현 대황외에서 이께다의 일본군 “토벌”대와 맞띠웠다. 독립사의 맹공격에 일본군은 격퇴당하고말았다. 독립사 제1퇀은 연길현 의란구 신흥동에서 일본군 무라다부대를 격퇴한후 주동적으로 기와바야시 “토벌대”를 습격하여 놈들을 섬멸했다. 11월, 독립사 제3퇀은 왕청현 삼차구와 대황외에서 일본 노구찌부대와 교전을 벌리였다. 이와 동시에 제2퇀의 130여명 전사들은 적들의 등뒤를 돌아 위자구위만경찰서를 습격했다. 12월초 독립사 제3퇀 제4련, 제4퇀 제5련 파견대 150여명은 녕안현 석두하자에서 위만군과 맞띠워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 1월 독립사는 성공적으로 대전이하였다. 하여 독립사 각 퇀은 전투에서 주동이 되어 반“토벌”투쟁에 림할수 있게 되었다.
  
1934년 4월 독립사 제2퇀은 동만특위와 사부의 통일적 포치와 따라 안도현 처창즈방면으로 진군했다. 4월부터 8월사이에 제2퇀은 독립퇀과 함께 대전자를 두차례나 포위공격하고 반일부대와 공동으로 대사하부락을 습격하고 안도현소재지를 공격하는 등 일련의 전투를 진행하여 처창즈, 대전자, 태평구 일대를 통제,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있는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4년말부터 1935년초까지 삼도만근거지에서 기아와 엄한을 이겨낸 삼도만, 왕우구, 팔도구 유격근거지의 군민들이 안도현 신선동을 거쳐 처창즈에 들어갔고 화룡현 천수동과 머구령에 있던 어랑촌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1935년 1월 일제는 여러갈래로 처창즈를 향해 진공해왔다. 아군은 도로를 파괴하고 적들의 통신력량을 끊어놓아 일군과 위만군이 련합작전을 못하도록 하였다. 하여 처창즈유격구보위전에서 적 40여명을 격살, 총 20여자루를 로획한 반면 아군은 몇 명의 사망자를 냈을뿐이였다. 제1퇀과 제2퇀은 처창즈를 근거지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벌려 1935년 1월부터 5월사이 30여차례 전투를 벌렸는데 적 600여명을  살상하고 360여자루의 총과 각종 군사물자를 로획했다.
  
1935년 3월 21일, 독립사 제4퇀은 훈춘 금창으로부터 왕청경내로 진군하던 도중 전쟁이 싫어 한 개 련의 위만군병사들이 대황구에 피해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4퇀 전사들은 인차 대황구 위만군병영을 포위한후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강렬한 정치공세하에 위만군 련장은 82명 병사를 거느리고 인민혁명군에 참가했다. 정돈과 교양을 거쳐 새롭게 3개 련을 편성, 훈춘퇀은 도합 7개 련으로 늘어났다.
  
1935년 4월말 독립사 제1퇀, 제2퇀은 안도현경내에서 위만군 1개 경비영을 매복습격하여 련장 2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살상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제3차 반“토벌”투쟁에서 동만의 각지 근거지는 엄중한 파괴를 당했으나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함으로써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을 보전하고 적들의 “토벌”를 타개했다.
 
47. 새로운 항일근거지 개척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군민 혼연일체 되어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위증민을 동만에 파견하였다. 위증민은 연길현 삼도만에서 얼마동안 조사한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대황외에서 동만당단특위 제1차련석회의를 소집(세칭 “대황구회의”)하였다. 이번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왕중산, 종자운, 주수동, 장창수, 리학충, 조아범, 리실일, 림수산, 최봉문, 강창연, 리동규, 김희문, 왕윤성 등 26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는데 주요하게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지난 1년간 중앙과 성위의 공작방침정책을 집행할 정황을 조사한후 동만당단과 군대의 공작방향과 긴급임무를 제정, 당단특위령도기구를 개조했다.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를 철소하고 위증민, 리학충, 리광림, 왕윤성, 왕정렬, 왕중산, 마진금 등으로 특위를 조직한후 위증민이 특위서기를 담당했다. 공청단특위서기는 주수동이 맡았다.
  
인민혁명건설공작을 강화할데 근거하여 1935년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련석회의(세칭 “요영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는 독립사 정위 왕덕태와 특위 서기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독립사의 지도자들과 제 1,2,3,4퇀의 정위, 공청단만주성위 특파원 종자운 및 공청단동만특위책임자 도합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오는 4월에 동만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으며 “인민혁명군정치사업조례”, “인민혁명군전사대우조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제2군 독립사의 활동방향을 확정하였는데 원래의 항일근거지를 고수하는 동시에 수분대전자(왕청현 라자구지대)와 안도현 처창즈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군중기초가 두터우나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교통이 불편한 돈화, 화전, 동녕, 녕안, 목릉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독립사 지도부와 각 퇀 간부들을 조절하였다.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리승규,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장봉운,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하덕윤, 정위에 왕윤성이 임명되였다.
  
회의후 동만특위는 수분대전자로 이동하고 독립사본부는 처창즈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왕청과 훈춘의 근거지군민들은 수분대전자에 집결하고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근거지 항일기관과 군민들은 처창즈로 이동하였다.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부터 시작하여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에서 범한 “좌”경착오가 점차 시정되기 시작했으며 진일보로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관철되게 되었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 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후 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혁명단체를 묶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산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35년 1월, 연길현,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자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소ᅦ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산나물을 먹을 때 기름 한방울 놓지 못하였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 군중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도 그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린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유격구주민들은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부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리자리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빨을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뿐만아니라 그래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은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며 골수이며 반일정신이며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들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의해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기관은 라자구의 사도하자로 전이해 간후 원유의 혁명적군중에 의거하고 여러갈래의 항일력량과 련합하면서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 확대했다.
  
2600여호 거주민들이 살고있는 라자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보위하기 좋은 훌륭한 전략기지였다. 일찍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작일군을 파견하여 라자구에 당조직을 건립, 라자구구위를 설립하였다. 구위의 령도아래 삼도하자, 하동, 태평구, 신춘자, 로무주거우 등지에 7개의 기층 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부녀회 등 혁명군중조직이 결성되였다. 1934년 독립사가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사충항의 항일구국군 등 기타 항일부대와 손잡고 라자구전투를 벌린후부터 라자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구로 되었다. 하여 독립사 제3퇀, 제4퇀 장병들과 혁명적군중들은 요영구, 탕수허즈, 금창 등지로부터 라자구에 모여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공동만특위서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