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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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동만유격근거지의 포기

 

더 큰 손실 막기 위해 주동적으로 유격근거지 포기 원정길에 올라

처창즈근거지의 포기
1935년 8월 30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이른바 “소화 10년 관동군추기치안숙정만주국방면협력요망”을 제정하고 항일무장“토벌”의 중점을 빈강, 길림, 간도, 봉천, 안동 등 5개 성에 두었다. 이 “숙청계획”에 따라 일제와 위만국은 장춘, 열하일대에서 대량의 군대를 움직여 동만, 수녕에 투입, 3개월내에 반일무장력을 철저히 소멸한다고 장담했다.
  
1935년 9월중순, 일만군은 추기“대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 제2퇀은 부대를 여러갈래 소분대로 편성한후 안도, 돈화, 몽강 일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적들을 대처했다.
  
1935년 10월, 적들은 수백명의 일만군을 동원하여 처창즈유격근거지를 포위공격하였다. 토벌군은 오동양차, 송강, 쓰치개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조이며 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제2군 군장 왕덕태의 지휘하에 직사포, 박격포, 경기, 중기 등 중무기로 무장한 우세한 적들과 련속 며칠동안 접전하였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정황에서 근거지를 끝까지 보위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군은 주력부대를 내두산쪽으로 이동시키고 반일자위대는 근거지군중들을 데리고 서남차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서남차에서 두달 남아 머물러있던 반일자위대와 근거지군중들은 근거지인민들을 해산시키고 반일자위대도 유격전으로 넘아가라?동만특위와 군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근거지군중들을 놓고 말하면 이것은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물과 고기처럼 생사를 같이하던 부대를 떠나 보내고 근거지마저 버린후 적구로 내려가야 하니 앞이 캄캄해날 수밖에 없었다. 대회를 열고 근거지해산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내성있게 해설하여 군중들은 어렵지 않게 리치를 깨닫기는 했으나 정작 해산을 집행하는 실무적단계에 들어가서는 적구로 내려갈수 없다고 나누웠다.
  
군중들은 풀을 뜯어먹고 짐승가죽을 우려먹어도 좋으니 여기서 죽든살든 하겠다면서 야단을 쳤다. 적구로 갈바에는 차라리 유격구에서 굶어죽겠다면서 떠들어댔다. 어떻게 적구에 내려가 왜놈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살겠는가! 안될 일이다!
  
일부 군중들은 적구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참군을 요청하였다. 입대적령기에 들어서지 않은 아동들과 소선대원들도 혁명군을 따라가겠다고 성화를 부리였다. 어떤 아동단원은 데려가기 싫으면 차라리 총으로 쏘아달라고 하면서 매달려 강짜를 부리기도 했다.
  
유격구의 해산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전에는 인민들은 식량을 군대에 공급하여 전투를 견지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군대가 인민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과 싸워 량식을 빼앗아다가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혁명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보따리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개월이나 존속하였던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적아력량대비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1935년 11월에 해산되였다. 처창즈에 있던 제2군 군부와 일부분 부대 그리고 병기공장, 옷공장, 병원 등 후방기관들이 모두 내두산으로 옮겨갔다.
  
내두산은 마을서쪽에 두 개의 젖꼭지모양의 산이 있는 것으로 하여 생긴 이름인데 태고연한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은 이 부락을 중심으로 송강과 천지에 이르는 주위 100여킬로메터 구간은 무인지경이였다. 그래서 망망한 림해속에 숨어있는 이 마을을 하늘아래 첫동네라 하였다.
  
내두산에 진주한 인민혁명군은 로천무대를 가설하고 무기탈취투쟁, 녀성해방 등 내용을 담은 작품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한편 정치공작원들은 주민들에게 일제를 쳐부셔야 한다는 도리를 선전하였다. 중공안도구위행동위원회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낡은 구장제를 페지하고 정권의 성격을 띤 농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서부원정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1935년 후반기부터 남북만에로의 간고한 원정을 시작했다.
1935년 8월, 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은 제2퇀의 2련과 3련의 150여명으로 서부원정대를 조직하고 처창즈를 떠나 무송을 지나 몽강지구로 나갔다. 서부원정의 목적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를 맺은후 동남만유격구를 한데 련결시켜 료녕, 길림 두 성 변계지대에 유격근거지를 건립, 련합작전을 벌리려는데 있었다.
  
8월말, 서부원정대는 제1군의 강남유격구에 도착, 먼저 1군 제8퇀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리동광 등 제1군 관병들과 유격구군중들은 제2군 서부원정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월 4일, 몽강현 나이굉부근에서 제1군과 제2군 간부련석회의를 거행했다. 회의에서 쌍방은 자기군의 활동지구와 항일투쟁정황을 소개하면서 투쟁경험을 교류했다. 아울러 련합작전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중심으로 길료변경유격구를 개척할문제와 전 동북항일정부 및 항일련군총사령부건립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상응한 결의를 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제2군의 회사로 하여 동만항일유격구를 분할하고 포위하려던 적들의 음모는 철저히 실패하고말았다. 두군의 회사는 또 동만과 남만의 두유격구를 하나로 이어 놓아 유격전쟁가운데서 밀접히 배합하면서 협동작전하는데 유리하게 했으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창건을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동시에 북만지구의 제3, 제4, 제5, 제6군 및 기타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제2군은 서부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임무를 완수한후 몽강을 떠나 1935년 11월 내두산유격근거지로 돌아왔다.
  
내두산보위전
내두산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1935년 겨울, 안도현으로부터 악명이 자자한 리선도“토벌대”와 안도현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박격포부대, 위만경찰, 위만군 등 800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내두산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제2군주력은 적후에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리고있는 상황이여서 내두산근거지에는 두 개 련 병력과 후근기관일군들뿐이였다.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비록 현저했으나 절대 물러설수는 없었다. 군장 왕덕태는 건정하게 최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적들은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적과 맞서 싸웠다. 적들은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전사들은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면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첫날 전투에서 적들은 1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튿날 적들은 또다시 삼면으로 포위공격해왔다. 군장 왕덕태는 좌우부대에 적들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라고 명령한후 한 개 부대를 인솔하여 정면으로 반격해나갔다. 아군의 드센 반격에 적들은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고말았다.
  
전투가 치렬해지면서 우리 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아동단, 녀전사, 부상병까지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밥과 물, 탄약을 최전선에까지 날라왔다.
  
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왕덕태는 소분대습격전을 벌리였다. 소분대는 사면으로 적들을 들이쳐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날이 갈수록 적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아군은 투자가 앙양되였다. 시기가 성숙되였음을 간파한 왕덕태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명령, 맨앞장에 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 백병전을 벌리였다. 한창 격투를 벌리고있을 때 아군 소분대는 민첩하게 적들의 등뒤로 달라붙어 번개마냥 습격전을 벌리였다. 하여 적들은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쩔수 없었던 적들은 부랴부랴 산아래로 철퇴해버리고말았다. 내두산을 한입에 삼켜버리려고 기염을 토하던 적들은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제일 추운 겨울이라 엄한 추위까지 덮쳐들어 더는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으며 승리적으로 내두산유격근거지를 보위했다.왕덕태주력부대가 녕안으로 전이해간후 적들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가지고 다시 내두산을 진공해왔다. 1936년 1월 일만군 “토벌대”는 미친 듯이 쳐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적들의 두차례 진공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군사력의 뚜렷한 차이로 하여 적들의 진공을 더는 격퇴할수 없게 되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군민들은 주동적으로 근거지를 버리고 무송방면으로 전이했다.
 
50. 로흑산전투

 

정안군 사도하자를 피로 물들이고 인민혁명군 지혜롭게 정안군 괴멸

피로 물든 사도하자
라자구와 동녕현부근의 로흑산은 지형이 복잡하여 우리 군이 활동을 활발히 벌리는데 매우 유리한 지구였다. 곡창지대인 로흑산부근은 또 아군의 식량기지이기도 했다. 일제는 항일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고 유격활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일찍 1934년말에 정안군을 로흑산에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정안군은 악패지주와 한간주구들의 자제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였는데 일본군지휘관이 직접 지휘하고있었다. 정안군은 무기장비가 월등했는바 스스로 황군의 “철군”이라고 자칭했다.

정안군은 백성들에게 못된짓이란 못된짓은 다하는 비적무리였다. 놈들은 쩍하면 행패를 부리면서 백성들이 소, 돼지, 닭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악질적으로 항일부대를 추격, “토벌”했는바 반동기염은 실로 하늘을 찔렀다.

팔소매에 “정안군”이라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린다고 하여 백성들은 이자들을 “훙수톨(紅袖頭)”이라고 불렀다. 어디에 “홍수톨”이 나타나면 그곳 백성들의 머리우에는 재난이 날아들었다.

라자구에서 서쪽으로 7.5킬로메터쯤 들어가면 28호 농가가 오붓이 모여사는 사도하자라는 마을이 있다. 시도하자에는 5킬로메터 더 들어가면 사간방이라는 곳인데 동북인민군 제3퇀의 밀영경계소였다. 이 경계소에서 15킬로메터 들어가면 투로퍼띵즈인데 바로 3퇀의 밀영지가 있었다.

사도하자에는 세칸짜리 큰 기와집 한 채가 있었는데 혁명군은 사도하자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회의를 하고 혁명가곡을 배워주면서 항일선전을 하였다. 주보중, 김일성, 시세영 등 항일면장들이 자주 나든다고 하여 사람들은 사도하자를 “공산당사령부”라고 불렀다.

음력 12월, 일본놈 절름발이퇀장이 령솔하는 정안군이 동녕으로부터 5갑(라자구 下河)에 와서 음력설을 쇨때였다. 개다리본성을 고치지 못하고있던 주구 서일남이 절름발이퇀장을 찾아와서 “사도하자는 공산당의 둥지이다. 몽땅 공산당이다.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고자질했다. 보고를 접한 절름발이의 얼굴엔 지독한 랭기가 감돌았다.

1935년 음력 정월보름날 밤, 시도하자 주민들이 깊이 잠들어있을 때 절름발이 일본놈은 대포와 중기등으로 무장한 백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사도하자를 포위해왔다. 날이 밝을 무렵이였다.
“쿵쾅!”
“뚜루룩...”
난데없이 날아들어와 터지는 포탄소리와 자지러진 기관총소리에 마을의 새벽정적은 산산쪼각이 났다. 마을은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포연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아츠럽게 울려나왔다. 한시간만에 마을은 잿더미로 되고 말았다.

한창 포격을 하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은후 놈들은 마을로 돌격해들어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대학살은 마을동족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오우준, 김군삼 등 몇집 식구들이 제일 먼저 살해당했다. 봉사였던 총수산의 어머니는 날창에 찔려 밸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숨진 두 손자의 손목을 꼭 잡고 피못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녀의 셋째아들(19세)은 차몰이군 주로인과 한데 묶이여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가에서 참살당했다. 머리에 총알을 여러발 맞아 대뇌가 랑자하게 터져나와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홀아비 은령감은 물만두를 삶다가 놈들이 총창에 찔려 가마목에 쓰러져 숨졌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살아남은 마을주민들을 밀짚가리곁에 몰아다 세우고 기관총을 휘둘렀다. 그 속엔 외지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삼도하자의 오명학로인은 산에 가 올무를 놓다가 놈들에게 살해당했고 훈춘현의 지하공작원인 리영실과 그의 딸은 김군삼네 집에 왔다가 참살당했다. 놈들은 도합 57명을 참살했는데 그중 16명이 총창에 찔려 죽었다.

이번 참살에서 마을서쪽에 살고있던 세집식구들이 요행 죽음을 면했다. 총소리에 깨여나 밖에 나온 리용덕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을이 삽시에 포화에 휩싸이고있었던 것이다. 혁명군이 마을을 향해 포와 기관총을 쏠수는 없었다. 적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이 틀림없다. 리로인은 가까이의 설씨, 정씨네 집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이요! 빨리 강쪽으로 뒤오!”
리로인의 웨침소리에 정신차린 세집 식구는 강쪽으로 달음쳐가 버들숲속에 숨었다. 하여 세집의 12식구가 요행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놈들은 돌아갈 때 주령감네 말 두필을 몰고갔다.

날이 희붐히 밝자 린근마을이 주민들이 사도하자에 달려왔다. 사람들은 밀짚가리앞에 쓰러진 시체속에서 요행 살아있는 조선족어린애 8명을 찾아냈다. 김룡운이 8명 여자애 중 하나를 자기가 키우기로 하고 나머지 7명은 안아다 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척이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대강 짠 관에라도 시체를 넣어 묻을수 있었으나 친척이 없는 주검은 움 속에 묻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혜로 정안군을 소멸
한족청년 총수산과 조선족청년 리씨는 식구들의 주검을 묻고나니 혈혈단신이 되었다. 비분에 찬 그들은 그날로 3퇀 밀영으로 찾아갔다. 정위 김일성이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의 참살정황을 낱낱이 보고했다.
“우리를 혁명군에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꼭 원쑤를 갚고야말겠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은후 즉시로 한 개 반 전사들을 현지에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과연 모든 것이 사실이였다. 사도하자 참변소식을 접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과 제4퇀은 어찌해서나 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김일성, 후국충 등 지휘관들은 정안군을 소멸하기 위해 정찰병들을 파견, 적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장악했다.

1935년 6월, 라자구에서 단오명절을 쇤 인민혁명군부대는 라자구 석두하자에서 떠나 로흑산방면으로 향발, 황혼 무렵 동남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정안군이 겨울에만 “토벌”을 하고 여름에는 될 수록 항일군과 교전을 피하면서 산림대나 토비 같은것만 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이에 적들을 끌어내여 매복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4퇀 주력부대는 적들이 보는데서 일부러 대낮에 부대를 라자구로 철수시켰다가 그날 밤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로흑산에서 서쪽으로 10킬로메터 떨어진 투도구를 돌아왔다. 부대는 골짜기 심처의 남북 량측 산에 은밀히 매복했다. 아군은 높이 약 200~300메터되는 좌우 산릉선과 골짜기 가까이의 산기슭을 따라 전호를 파고 기여드는 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연후에 한 개 소분대를 출동시켜 적들을 꿰여오게 했다. 소분대는 중국말을 잘하는 대원들로 구성됐다. 전사들은 산림대로 가장하고 왕보만으로 내려갔다. 마을에 내겨간 소분대는 산림대행세를 부리면서 백성들의 소를 빼앗기도 하고 가재도구를 차서 굴리기도 하고 남새밭의 바자를 뽑아버리기도 하면서 한바탕 야료를 부리는척하다가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된판인지 정안군은 아군의 유인에 걸려들지 않았다. 아군은 매복지점에서 하루밤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다.

다음날에도 소분대는 마을에 내려가 산림대행세를 하고 식량을 가득 실은 소수레를 몰고 오면서 산림대만이 통용하는 용어로 떠들어 댔다.
적들은 끝내 낚시찌를 물고야 말았다. 아침 8시쯤 되어 소분대를 산림대인줄로 안 적들은 소분대의 발자취를 물고 골짜기로 졸졸 따라 들어왔다.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은 소분대를 놓칠세라 바싹 뒤쫓았다. 척후를 앞세운 적들은 인면혁명군이 감쪽같이 매복해있는줄도 모르고 기름냄새를 맡은 고양이마냥 포위권안으로 들어섰다. 놈들의 발걸음소리마저 금방 귀가에 들려왔다. 놈들이 지나가는 어떤 곳은 가까이 10메터가량 되기도 했다. 드디여 적들의 전 부대가 사격권안에 들어섰다.
“땅!”
사격을 알리는 총소리가 야무지게 골짜기의 고요를 터뜨렸다. 아군의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였다. 이와 동시에 골짜기를 들었다놓는 혁명군전사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무장을 요구하지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의들은 누구를 위해 일본놈의 총마개로 되어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인민혁명군전사들은 맹호마냥 적들을 향해 돌격해 내려갔다. 비발치듯 퍼붓는 혁명군의 총탄에 적들은 삼대마냥 쓰러졌다. 전투는 30분만에 아군의 철저한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는 인민혁명군은 일본지휘관을 비롯한 적 100여명을 완전히 섬멸하고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문, 경기관총 1정, 보총 80여자루, 목갑총 7자루, 박격포탄을을 비롯한 각종 탄환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철군”이라 자랑하던 일제의 정안군은 이렇게 괴멸되고 말았다.

로흑산전투의 승리는 인면혁명군의 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준비를 더 잘하게 하였다.

북만원정
로흑산전투후 인민혁명군 제3퇀, 제4퇀은 왕청현 수분대전자에 돌아와 휴식정돈하면서 녕안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유격구에 3퇀의 제1, 제2, 제3련, 4퇀의 제4련 등 3분의 1병력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대는 제3퇀 퇀장 방진성, 정위 김일성, 제4퇀 퇀장 후국충 등이 인솔하는 북만원정대를 구성, 6월말에 녕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유격구를 확대시켜 길동유격구와 이어놓고 길동지구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5군과 련계를 맺으며 배합작전하려는데 있었다.

부대는 서북령, 로야령 등 고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산악행군을 해야 했다. 살을 지지는 것 같은 뙤약볕과 모기떼의 성화를 받으면서 로야령을 넘기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부대는 무수한 곤난을 극복하면서 7월에 승리적으로 녕안현 로청구의 산동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산동툰에 이르렀다.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은 동만원정대와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회사를 막기 위해 목단강, 녕안, 동경성 등지로부터 800여명 병력을 모아가지고 산동툰을 향해 진격해왔다. 적들의 진공은 아군의 드센 반격을 받았다. 반나절의 전투 끝에 적들은 끝내 물러가고야말았다. 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주보중이 인솔하는 제5군과 회사했다.

두 부대의 지휘원들은 녕안현 이도하자에서 제2군, 제5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제2군 3퇀 4련, 4퇀 2련과 청년의용군, 제5군, 1,2,4퇀으로 서부파견대를 무어 2군 3퇀 정위 김일성, 5군의 시세영, 리형박등의 인솔하에 앵목, 돈화일대로 나가 활동하면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하고 류한흥, 후국충 등이 지휘하는 2군 3퇀 5련, 4퇀 3련, 5련은 녕안에 남아 5군과 함께 활동하며 왕윤성이 이끄는 2군 4퇀 1련, 6련, 7련은 왕청, 훈춘에 돌아가 남아있는 부대와 함께 유격전을 견지하기로 결의했다.
 
51.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조선족항일무장력 조선혁명력량 및 중국항일무장력량 이중사명 확인
  
용맹한 서부파견대
1935년 9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추기“토벌”을 발동했다. 서부파견대는 액목에 온후 일만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리였다.
  
9월중순, 서부파견대는 액모현 청구자, 6호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려 적들을 소멸했다. 9월26일, 돈화현 관지서남에서 일만군을 매복습격하여 위만군 제11련대장 진옥청을 비롯한 일만군 10여명을 격살하고 군수물품을 로획했다. 10월에는 액목현 만리구, 삼도구에서 위만군과 두차례 교전하여 적들을 살상, 포로했다. 11월3일, 서부파견대는 액목현 청구자부근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전부 소멸하고 경기관총 1정, 보총 10자루, 권총 2자루, 탄알 600발을 로획했다.
  
청구자전투에서 서부파견대는 자신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해 적들로 하여금 크나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특히 전투중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왜놈만 죽인다!” 등 구호들을 은을 내여 많은 위만군 병사들이 인민혁명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지어 인민혁명군을 가만히 방조해주기가지 했다. 어떤 위만군 장령들은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셋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 본척해달라”고까지 하면서 일부러 교전을 피하기도 했다.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기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 쓰면 위만군이였다. 인민혁명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갑모를 쓴 일본군만을 골라서 갈기군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디였다. 그래서 인민혁명군은 위만군에 향해 인민혁명군과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련락했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인면혁명군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어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 것을 알리였다. 이런 상황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빨찌산이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 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들만 골라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탯8?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씩 한데모여서서 “지지가갚, “지지가갚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 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 장만 내도 무기, 탄약, 식량을 실어다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 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려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이 총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서부파견대는 11월 5일, 앵목현 로투구부근에서 일본군 11명과 자위단 몇놈을 죽였다. 또 액목현성에 쳐들어가 일만군 20여명을 소멸하고 많은 총과 탄알을 로획했다.
  
12월6일, 서부파견대는 돈화 관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유격활동을 범위를 더한층 확대하기로 결정, 리형박, 김일성이 제5군 제1사 제1퇀 제1련과 제2군 제3퇀 제4련, 제4퇀 제2련의 110여명으로 분견대를 조직, 이끌고 서남으로 진격하여 황니허, 교하지구에서 길돈철도를 습격하면서 아군의 정치영향력을 확대하고 나머지 부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이 부서에 따라 서부파견대 분견대는 12월 7일, 먼저 관지를 공격, 일본교관의 지휘하에 있는 위만경찰중대와 1시간남짓 격전을 벌리여 일본군교관 3명을 비롯한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위만경찰들이 분분히 총을 놓고 투항해 아군은 관지거리를 손쉽게 점령하게 되었다. 통구강자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소식을 듣고 즉시 증원병 200여명을 관지에 파견했다. 아군은 적들이 경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통구강자 동북부의 길 량켠에 매복해있다가 적들이 포위권안에 들어서자 맹렬히 사격, 대부분의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와 동시에 적들의 본영이 비여있는 틈을 타서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뒤돌아가 통구강자본부를 점령하게 했다.
  
관지와 통구강자를 점령한 아군은 3일동안 남아있으면서 군중대회를 열고 일제주구를 청산, 적들의 창고를 헤쳐 식량과 물자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대련대는 관지와 통구강자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후 즉각 대량의 일만군과 위만경찰을 출병시켜 돈화 동부와 서부의 관지, 통구강자, 흑석, 맹목에 쳐들어왔다. 1936년 1월 7일, 아군은 흑석진을 공격, 3시간 남짓되는 격전을 벌려 적들의 방선을 철저히 쳐부수고 흑석진을 완전히 공략했다. 1월 8일 흑석진에서 철퇴한 아군은 이튿날(1월 9일) 앵목진을 진공, 2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액목진을 장악했다.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휘관 1명, 교관 2명 헌병 6명을 격살하고 위만군 50여명을 살상, 대량의 탄약과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부대는 군중대회를 열고 로획한 군수물자 일부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5년 11월부터 1936년 1월말까지 두달남짓되는 사이에 서부파견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수차의 전투를 벌려 적들의 “토벌”활동에 충격을 주면서 일부분의 유생력량을 훼멸, 이 지구에서의 일만군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광범한 군중들에게 항일구국 선전, 조직 사업을 펼쳐 2군과 5군의 정치적력량면을 확대, 군중들의 항일열정을 고무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민혁명군에 가입하여 부대의 력량을 장대시켰다. 2군 4퇀 2련의 서부원정을 시작할 때에는 일색으로 조선족전사들이였지만 이때에 와서는 많은 한족전사들이 편입되여 보충되였다.
  
미혼진회의
1936년 2월 10일, 국제공산당주대 중국공산당대표단은 “8.1선언”의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여러 반일의용군은 함께 전 중국적으로 통일된 항일련군을 조직하자”는 정신에 따라 “전 동북의 항일련군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초안”을 제출하고 반일통일전선의 수요에 적응하여 전 동북의 항일군대의 명칭을 동북인민혁명군으로부터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으로 고칠 것을 결정하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국공산당 국제대표단에 사업회보를 갔던 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1936년 2월 5일, 흑룡강성 녕안현 경박호 북호두에 있는 제5군 군부에 도착하여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 주보중 등과 함께 항일련군편성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를 토의연구한후 5군 군부를 떠나 동만으로 오는 도중 경박호 남호두에서 녕안에서 회사한 제2군과 제5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제2군, 제5군 주요령도간부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성위를 철회하고 유격구에 따라 남만, 동만, 길동, 송강 등 4개 성위를 건립할데 관한 지시정신과 동북항일투쟁에 관계되는 일련의 정신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중공대표단의 “중한민족은 련합하여 공동항일함으로써 중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조선족문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기본주장과 중공동만당조직에서는 항인 “민생단”책략을 개변하여 망군노를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을 흡인하여 광범위한 항일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생단”문제에 대한 지시정신도 전달했다.
  
회의후 위증민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왕덕태, 리학충, 김일성 등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유격구의 미혼진에 이르렀다.
미혼진에 다달은 제2군의 주요한 간부들은 위증민의 사회하에 동만특위와 제2군 군, 사, 퇀급 간부들이 참석한 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전영림 등이 참석하였다.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만인민혁명군을 중한항일련군으로 편성할 건의”를 전달한후 제2군 평선문제를 상세하게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이 광범위하게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적응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일치하게 결의했다. 동시에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항일련군 가운데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를 각기 건립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고 마땅히 항일련군의 이름으로 무장투쟁을 함께 조직하고 벌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8.1선언”과 “동북항일련군통일군대건제선언”을 충분히 토론한 기초에서 회의참가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편성할 것을 결정했다. 왕덕태가 군장으로 임명되고 위증민, 리학충, 류한흥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사와 군부직속교련퇀, 소년영을 두었다.
  
제1사는 원래의 제1퇀에 일부의 반일삼림대를 흡수하여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안봉학이 임명되고 주수동, 려백기, 박덕범 등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으며 아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겸)가 임명되였다. 제3사는 원래의 정2퇀과 제3퇀의 일부 및 전영림이 이끌던 항일의용군 6개 중대를 합쳐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고 산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7퇀 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마덕전이 임명되였다. 3월 20일, 사충항이 부대를 이끌고 항일련군 제2군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여 제4, 제5, 제6퇀이 인차 편성되였다. 사충항이 사장으로 임명되고 왕윤성, 진한장이 정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자균, 정치부주임에 왕송백, 제6퇀은 사부직속지휘에 두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은 전원이 2000여명이였는데 그중 조선족이 절반을 차지했다.
  
군당위원회는 군정위, 군장, 군정치부주임 및 세 개 사의 정위, 사장 등 9명으로 조직되였는데 그들로는 위증민, 왕덕태,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왕윤성, 사충항, 김일성, 조아범 등이다. 위증민이 서기로 당선되였다.
 
52. 남북만으로의 전이

 
제2군 남북만에서 일만군 호되게 족쳐 동광서 재만조선인광복회조직문제 토의
  
따푸차이허전투
동북항일련군 제2군 각 사는 제2군, 제5군 당위특별회의에서 결정한 “남만의 1군과 길동의 5군과 협동작전하면서 광대한 유격구를 개척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부대를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제1군과 함께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제1, 제3사는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이 인솔하에 돈화, 화전, 무송, 몽강, 림강, 장백 등지로 진군해들어갔다. 제5군과 배합작전하면서 수녕항일유격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제2사는 진한장, 왕윤성의 령솔하에 녕안, 목릉, 동녕 일대로 진격해들어갔다.
  
제2군 군장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이 이끄는 제1사 주력부대는 서진박차를 가하면서 전투기회를 노리다가 4월초, 돈화, 화전 경내로 들어가 따푸차이허전투를 진행했다. 이번 전투는 제2군이 창립된후 그 주력부대가 남만으로 향하는 도중 연변경내에서 벌린 가장 큰 전투였다.
  
따푸차이허는 장광재령산맥인 부얼령 동북쪽, 한총령과 목단령의 서남쪽에 위치하고있는데 장광재령을 계선으로 길림지구인 화전현과 잇닿아있고 동남으로는 안도현과 통화지대의 무송현과 이웃하고 있다. 1930년대포초반까지만 하여도 따푸차이허에는 인가가 몇호 되지 않았다. 1936년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면서 부근의 석인구, 경구, 류수하자 등지의 산재호들을 집중시켜 마을을 만든후 위만경찰서까지 설치하여 경비를 강화하였다. 따푸차이허는 일본군이 돈화 남부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거점이였다. 이곳에서 능히 안도, 돈화, 화전 3개 현의 접경지대를 통제할수 있어 항일련군 제2군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는데 매우 큰 장애로 되었다.
  
따푸차이허는 돈화현소재지와 60킬로메터 떨어져있기에 일단 일이 나면 증원부대가 금방 닿을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군사적위치를 가지고있는 따푸차이허를 진공하기 위하여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은 제1사 사장 안봉학 등과 면밀한 전투방안을 세웠다.
  
1936년 4월 6일, 제2군의 소분대는 따푸차이허를 포위, 공격하는것처럼 꾸미고 주력부대는 밤도와 돈화와 따푸차이허 중간에 있는 한총령으로 강행군해갔다. 이튿날 동틀 무렵 한총령에 이른 부대는 길 량쪽산의 수림속과 골어구에 매복했다.
  
4월 7일,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따푸차이허가 항일군의 공격에 림하고있다는 정황을 접한후 즉각 500여명의 일본군과 250여명의 위만경찰을 출동시켜 급급히 따푸차이허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튿날 오전 9시, 적들의 선견부대 60~70명이 아군의 포위망속으로 먼저 들어섰다. 선견부대가 지나간 뒤를 이어 대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섰다. 점심때쯤 하여 일만군 대부대는 제1사의 매복권안에 완전히 잡히고말았다.
“땅, 땅!”
공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와 함께 길량켠 매복하고있던 항일련군 전사들은 일만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수류탄과 작탄이 적중으로 날아들어가 굉음을 울리면서 적들의 대갈통을 박살내고 살점을 뜯어 하늘로 날려보냈다. 사기충천한 항일련군 전사들의 공격앞에서 묵사발이 되어 쩔쩔매기만 하던 적들은 드디여 창황히 퇴각했다. 항일련군은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대량의 적들을 섬멸하고 많은 중형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전장을 수습한 아군은 따푸차이허를 습격하기 위해 인차 되돌아섰다. 10일 새벽 아군의 주력부대는 따푸차이허 동쪽어구에 바싹 접근하여 적의 포대를 점령하고 다른 한 부대는 서북쪽에 있는 적의 포대를 까부시였다. 위만군대대장은 두 개 중대를 거느리고 부얼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그곳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았다. 대대장이 졸개 몇을 데리고 도망친외에 두 개 중대가 전부 아군에 의해 포로되고말았다.
따푸차이허를 점령한 항일련군은 군중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구국정책을 선전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당장에서 항일련군에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따푸차이허전투후 1사 주력은 남하하여 무송, 몽강 일대로 진격, 유격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동강회의
항일련군 제2군 제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안도를 출발하여 무송경내로 직접 진격해들어가 몇차례의 전투를 벌렸다. 3사의 주력부대는 4월, 만강을 습격하여 주둔하고있는 적들에게 회멸성타격을 가했고 5월초 동강부근에 이르러 동강툰위만군병영을 습격하여 침중한 타격을 줌과 아울러 적의 거점을 제거해버렸다.
  
5월초, 제2군 군장 왕덕태는 1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도착하여 김일성의 3사와 회사한후 손가봉교(孫家峰窖)밀영에서 군, 사급 간부회의를 소집, 1사와 3사의 금후 행동계획을 연구했다. 회의에서 3사는 무송, 안도, 장백, 림강 등에서 활동하면서 장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무송과 안도경내에는 항일의용군소분대와 항일산림대가 많이 활동하고있었다. 회의에서는 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을 쟁취하여 항일련군에 가입시켜 제9퇀과 제10퇀을 새롭게 편성, 제3사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괴무를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왕진아를 제8퇀 정위로, 손장상을 제3사 참모로 임명했다.
  
동강회의에서는 또 항일유격구의 군중공작을 강화하고 광범한 항일군중을 동원하여 항일구국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아울러 “일본의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과 련합하여 한인(韓人)내부 반일련합전선을 건설하라”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조선족군중들로 결성된 통일전선조직-“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문제를 토의, 조국광복회는 모든 반일력량과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남북만에서의 전투
동강회의후 왕덕태는 제3사 8퇀을 이끌고 무송현 북강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김일성은 3사 7퇀, 9퇀을 이끌고 무송현 서강과 림강현 변경에서 활동했다. 리학충은 군부소년영을 이끌어 마안산밀영일대에서 활동했고 제3사 10퇀은 무송현소재지 남쪽에 있는 송강일대에서 활동했다.
  
5월 8일, 제3사 10퇀은 삼도묘령에서 무송현위만경찰대대의 수십명 병력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렸는데 싸움에서 대대장 왕영성을 비롯한 많은 적들을 격살하였다. 5월중순 제3사 7퇀은 탕하구부근에서 무송의 위만군 모부 기병 3련과 조우,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섬멸하고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다.
  
동강회의가 있은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제3사 사부에서는 일만군 한 개 대대 병력이 무송으로부터 림강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7퇀, 9퇀의 일부 병력과 경위련 도합 200여명이 산발을 타고 급행군하여 림강과 무송 가운데 있는 로령에 음밀히 매복해있다가 적선견부대가 포위권안에 들자 맹렬히 사격, 1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각종 무기 30여자루와 탄알 2000여발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후 7퇀의 한 소부대는 농민복장을 한후 당지 군중들속에 섞여 서강툰으로 잠입,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여 40여명 위만군을 살상하거나 포로했다. 본부대가 서강에 진주한후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투후 서강의 40여명 젊은이가 항일련군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6월 6일에도 3사의 100여명으로 조직된 한 부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림강현 서남차의 적거점을 지혜롭게 탈취하였다. 농민복장을 한 전사들이 깜쪽같이 적보초병에게 슬슬 다가선후 맹호마냥 달려들어 총을 빼앗은후 쓰러눕혔다. 이어 부대가 번개같이 경찰분소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아군은 적 18명을 격살하고 총 18자루를 로획, 경찰분소를 불살라버리고 포대를 폭파해버렸다.
  
서남차전투후 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서강과 동강에서 련이어 전투를 벌려 적들을 타격했다. 7퇀, 8퇀, 경위련은 무송의 서강툰에 이른후 어둠을 타서 서강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을 습격, 10여명을 격살하고 1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무기를 로획했다. 다른 한 부대는 동강위만병영을 들이쳐 중대장 이하 10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 제3사의 장백산지구에서의 유격전쟁과 반일통일전선의 부단한 확대는 제2군의 위망을 높여주었으며 당지 여러 민족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한편 새롭게 편성된 제2군 제2사는 녕안, 왕청, 동녕 등지에서 적들과 전투를 벌리였다. 2사 4퇀 4련, 7련은 녕안현 퇀싼즈에서 100여명 일만군과 교전, 40여명을 소멸하였고 위자구에서는 포위를 돌파하면서 40여명을 소멸했다. 1936년 3월 23일, 2사 5퇀의 한 개 부대는 도-녕(도문-녕안)철도의 삼차구역에서 왕청현 락타산으로 들어가는 일군을 공격했다. 5월 18일에는 2사 4퇀과 5군 1사 3퇀이 녕안현 경박호남쪽에서 련합작전을 펼쳐 일본군 10여명을 격살했다. 5월 27일, 제2사 일부 부대와 제5사 일부 부대는 녕안현 연통구의 위만경찰대를 습격하여 3명을 격살하고 나머지 30여명을 전부 포로했다. 후국충이 인솔하는 2사 4퇀 한 q부대와 5군 부군장 시세영이 인솔하는 부대는 녕안현 사도하자에서 위만삼림경찰대를 습격, 60여명을 포로했다. 이도하자에서는 하루동안의 격전을 벌려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고 10여차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6월초, 2군 2사 4퇀 주력부대는 녕안현 예허난거우에서 위만살림경찰대를 습격, 1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6월 23일, 2군 2사 5퇀은 돈화현 소황구에서 위만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소멸했다. 7월, 2군 2사 한 부대는 동경성에서 남호두로 가는 도로에서 일본군용자동차운수대를 습격하여 차에 타고있던 적들을 소멸하고 차량 3대를 소각,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로획했다. 이 시기 2군 2사 6퇀은 2군의 참모장 류한흥 등의 인솔하에 동녕, 왕청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벌려 부단히 적들을 타격하였다.
  
총적으로 항일련군 제2군 2사는 1936년 봄과 여름 사이에 치빙과 수녕지구에서 제5군과 밀접히 배합, 협동작전하면서 크게 발전장대해졌다.
 
53.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건립

 

하리회의서 조선인공작 회복할데 관한 결의 채택 중국혁명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족의 이중사명 제시
  
조국광복회 결성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김일성회고록(제4권)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을 타고 교원대표와 로동자대표 각각 한사람씩 왔다.
  
력사적인 조국광복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였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다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일성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힘있게 전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진술한후 “조국광복회10대강령”(김일성 작성)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김일성 작성)을 대회심의에 붙였다. 대표들은 심중한 토론을 건친후 강령과 선언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재만 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령토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현할 것.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써울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해없이 발전시킬 것.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발할 것.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베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벌없는 인륜적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페, 강제적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문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8시간로공제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범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강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여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친선을 유지할 것.
  
5일동안의 토의를 거친후 김동명(김일성), 리동백,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채택되였다.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반일회, 농민협회, 부녀회 등 각종 반일단체의 조선민족을 조국광복회두리에 묶어세워 반일에 총궐기시키게 했다. 강령에는 중조민족과 일본제국주의자와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된 정황하에 신변에 쌍중임무를 걸머진 동북조선족인민들이 반드시 해결하고 리행해햐 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대외정책 등 제 방면의 문제가 명백히 제시되였으며 한 방면으로는 중국혁명에 참가해야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는 중조공동항일무장투쟁의 정책도 구현되여있었다.
  
“조국광복회는 민족주의세력을 비롯한 모든 반일력량은 한데 뭉치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였습니다. 과거의 계급투쟁을 버리고 평화, 민주주의기치하에 일체 항일력량을 포섭, 전민족이 항전에 떨쳐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족들은 구국회두리에 뭉쳐 항일에 떨쳐나섰습니다.”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족구광복회가 창립된후 김일성은 권영벽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장백산일대의 농촌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하여 7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결성, 리제순이 회장을, 장증렬, 황금옥이 각기 청년부장, 부녀부장을 맡았다. 1937년초 장백현조국광복회는 산하에 상강구위와 하강구위를 두었다.
상강구위산하에는 신흥촌, 행산, 19도구, 주경동, 대사동, 평강동, 왕가동, 치부동 등 9개 지회를 두었고 하강구위산하에는 도천리, 요방자, 14도구, 신방자, 탕성리, 태호산, 팔도구, 구도구 등 8개 지회를 두었다. 지회산하에는 49개 분회를 두었고 회원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금천하리회의
4개월 남짓 되는 간고한 려정을 거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주력부대인 제1사와 제3사는 안도, 돈화, 무송, 림강, 몽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1936년 6월 드디여 남만의 금천현 하리항일유격근거지에 다달았다.
  
7월 4일, 중공남만특위에서는 금천하리의 후방기지인 혜가구밀영에서 50여명 대표가 참가한 제2차당대표대회를 거행했다. 동만특위서기이며 제2군 정위인 위증민이 한 개 련의 병력을 이끌고 때마침 하리에 도착하여 회의에 렬석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만당조직과 제1군에 공산국제제7차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하려던 위증민은 직접 대회에서 상기의 정신을 보고하게 되었다. 대표대회에서 제1군 군장 양전우가 군사보고를, 남만특위서기 리동광(조선족)이 당의 지방사업보고를 진술했다. 대회에서는 중공남만특위 제1차대표대회이래의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고 금후의 사업방침과 책략을 제정,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고 당조직과 항일련군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 문제를 토의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또 조선인공작을 회복할데 관한 결의가 채택되였으며 조선족은 일제를 타도한후 자원의 기초에서 동북에 남아 자치를 실현할수도 있고 조선 해방과 독립에 몸바칠수도 있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중공남만당대표대회가 페회된 며칠후인 7월 7일, 위증민과 양정우는 금천하리에 있는 항일련군 제1군 밀영에서 동남만특위 및 제1, 제2군 주요한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리동광, 류좌건, 왕인재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 위증민이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만주성위를 철회하고 동만, 남만, 길동, 송강 4개 성위를 조직하며 항일련군을 “로군”으로 편성할데 대한 지시정신을 전달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동북항일투쟁의 새로운 형세를 분석하고 동북지구의 중공당과 항일련군부대의 목전의 전투임무를 제시했다. 회의에서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연변지구와 동변도지구에서 활동하고있는 제1군과 제2군을 합병하여 동북항일련군 1로군으로 재편성할 문제와 두 지구의 당조직을 합병하여 동남만성위를 건립할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했다. 연변지구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미 적들에 의해 파괴되였고 제2군의 주력도 이미 남만으로 전이해온 상황이다. 이것은 1,2군의 배합작전과 공산당의 통일령도에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하여 회의에서는 동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혹은 중공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로 재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위증민이 중공남만성위서기로 선거되였다. 위증민, 양정우, 왕덕태, 리동광, 리학충, 조아범, 김일성, 이준산, 안이화, 주수동, 진한장, 왕윤성, 송철암, 려백기, 전광, 왕인재 등 16명이 성위원으로 선거되였다.
  
회의에서는 제1, 제2군을 련합하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편성하고 통일적인 군사지휘기관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총사령부를 조직했다. 총사령 겸 정위를 양정우가 맡고 부총사령 왕덕태, 총정치부 주임을 위증민이 맡았다. 제1로군산하에 제1, 제2군을 두고 6개 사를 배치했다. 원래의 제1군의 1,2,3사는 그대로 편제를 두고 제2군의 3개 사를 4,5,6사로 개칭했다. 제1군 군장과 정위를 양정우가 겸직하고 정치부 주임을 송철암, 참모장을 안광훈이 맡았다. 제1사 사장에 정빈, 정치부 주임에 호국산, 참모장에 리민환, 제2사 사장 겸 정위에 조국안, 참모장에 리희민, 제3사 사장에 왕인재, 정위에 주건화, 참모장에 양준항이 임명되였다. 제2군 군장을 왕덕태, 정위를 위증민, 정치부 주임을 리학충, 참모장을 류한흥이 맡았다. 제4사 사장에 안봉학, 정위에 주수동,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 제3퇀 퇀장에 랑화가, 정위에 주수동이 임명되였다. 제4사 사장에 사충항, 정위에 왕윤성, 참모장에 진한장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제5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왕송백이 임명되였다. 제6퇀은 퇀장, 정위를 정하지 않고 사부에서 직접 령도하기로 했다. 제6사 사장에 김일성, 저우이에 조아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는데 제7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김재범, 제8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왕진아,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정위에 김산호, 제10퇀 퇀장에 서학충이 임명되였다. 2군 병력은 근 3000여명 되었는데 조선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하리회의에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유격활동방침과 임무를 확정하고 제1, 제2군과 각 사의 활동구역을 획분했다. 제1군 군부와 제1, 제3사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렬하, 수원으로 서정하여 관내 홍군들의 동정과 배합하라는 지시에 좇아 료남, 료서로 진군, 광활한 지역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유격전쟁을 벌리기로 하고 제2군 군부와 제2, 제6사는 무송, 몽강, 통화, 장백, 림강 등 로유격구에서 투쟁을 견지하면서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로 했다. 제5사는 동만, 수녕 지구에 남아 제5군과 배합하여 유격활동을 벌림과 동시에 제1로군과 남만성위, 제3, 제5군 및 북만, 길동 당조직과의 련계를 확보하기로 했다.
 
54. 장백으로의 진격

 
무송에서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해 적을 호되게 타격 대덕수 소덕수 반절구 전투 벌려 항일련군 위망 떨쳐
  
무송현소재지전투
1936년 8월, 쟝쟈탕즈밀영에서 제2군 제4, 제6사, 제1군 제2사의 주요한 간부들과 장백산지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의용군 간부들과 장백산지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의용군 두령들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병력을 집중, 련합작전하여 무송의 중요한 진들을 습격하기로 작전방침을 정했다. 8월중순, 제2군의 1500여명 주력부대와 항일구국군 리홍빈부대, 항일의용군 구참, 만순, 만군부대의 600여명은 쟝쟈탕즈회의 부서에 좇아 무송현 서북부에 집결하였다. 군중을 발동, 단결하고 항일련군의 영향면을 확대하기 위해 제2군 군부는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무송현소재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무송은 통화지구 일만군의 큰 거점이였다. 일제는 무송을 “동변도 치안숙정”의 중점거접으로 삼고 실전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다까하시 한 개 중대의 일본군 정예부대와 위만군 한 개 영, 위만경찰 한 개 대개 도합 10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있었다. 무기장비가 좋고 탄알도 충족했으며 견고한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 있어 일제는 무송을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라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런만큼 무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것은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아주 의의가 컸다. 무송현소재지공격은 장백산서북부일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는 전투로 될것이였다.
  
제2군 6사 사장 김일성은 한때 무송에서 지낸적있기에 시가지를 손금보듯 알고있었고 항일부대의 영향하에 있는 위만군 한 개 중대가 서문보초를 서고있어서 작전에 퍽 유리했다. 위만군 왕부중대장은 아군이 성시를 공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