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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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장백림해에 대량의 밀영 건설 유격활동에 돌입 낮이면 적의 세상이다가도 밤이면 우리 세상 되여
     
림해에 세워진 밀영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적들의 “토벌”에 주동적으로 반격하면서 정치적영향력을 확대, 1936년말에 이르러서는 장백일대의 광활한 지역이 공산당과 항일련군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장백산지구는 서간도와 조선,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거점이기에 이일대를 통제하는 것은 자못 중요했다. 이런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2군 주력은 장백산지구에 대량의 기회를 리용하여 2군 주력은 장백산지구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하여 유격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때로부터 장백일대는 일제와의 교전회수가 가장 많고 총포성이 가장 높은 전장으로 되었다.
  
밀영건설은 대부분 소분대의 몫이였다. 소분대는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파견되여 가서 지점을 선택한후 밀영을 건설했다. 이런 밀영은 키가 낮은 온돌식영방이였는데 일반적으로 나무가 밀집해있는 높은 산의 복부에 건설했다. 밀영은 목제형과 석제형이였다. 목제형은 통나무로 짓는 귀틀집이였는데 바닥을 몇자 파들어갔기에 밖에서 보기에는 키가 낮아보아나 집안은 높았다. 지붕은 나뭇가지나 풀로 덮어 위장하고 주위에 나무와 풀을 옮겨심어 외부의 시야를 가리였다. 실내는 구둘로 덥히였는데 연기는 밖에다 낸 고랑을 따라 2~3리 상거한곳에 가 피여오른다. 이런 고랑도 초목으로 가리워놓아 얼핏 발견할수 없게 했다. 석제형은 산기슭을 리용하여 건설했는데 산세르르 따라 몇메터 파들어간후 돌을 쌓아 만든다. 산굴식의 집이여서 보온성이 강해 좋았다. 이런 밀영은 물론 수원이 충족한곳에다 지였다.
  
1936년 봄 항일련군 2군이 안도현과 무송현 경내에서 활동할 때 이미 이런 밀영을 리용한적 있는바 미혼진밀영, 로투띵즈밀영, 마안산밀영 등이 그것이였다. 이번에 장백, 무송일대에 대량적으로 밀영을 건설했는데 무송, 장백, 안도, 금천, 관전, 류하, 몽강 등지에 건설한 밀영들로는 곰골밀영, 홍두산밀영, 양무띵즈밀영, 나얼훙밀영, 띠수이라즈밀영, 청봉밀영 등이다. 조선쪽에도 밀영을 건설했는데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極?등이다.
  
2군에서 건설한 밀영은 건축방식이 령활하고 다양했으며 전용성이 강했는바 영방, 지휘부, 통신처, 정훈부, 수리소, 인쇄공장, 학교, 간부훈련소, 량식창고 등 다종다양했다. 밀영마다 용도와 크기가 달랐다. 2군 6사에서 장백에다 건설한 곰골밀영은 비교적 규모가 큰 밀영이였는데 밀영은 장백현소재지에서 90킬로메터, 이도강에서 40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남부 90킬로메터 지점의 심산밀림에 자리잡고있었다. 곰골밀영은 남으로 19도하가 막아서 있고 서로 홍두산맥이 둘레를 쳐주고있어 천연적인 유격근거지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6사는 여기에다 부대병영, 련락처, 병기공장, 병원, 수군학교등을 세웠다. 어떤 밀영은 길이 30메터, 너비 8메터, 높이 2.6메터로서 비교적 규모가 컸는데 한꺼번에 200여명을 용납할수도 있었다.
  
이러한 밀영을 리용하여 항일련군은 숙영문제를 해결했을뿐만아니라 자신을 엄호했으며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군중과 련계, 신출귀몰하면서 유격전을 벌려나갔다.
  
낮이면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남만에 온후 유격근거지를 개척함과 동시에 유능한 간부와 당원들을 인민군중속에 파견하여 선전고동활동을 벌리였다. 그들은 당조직을 건립하고 조국광복회, 청년동맹, 반일회, 부녀회, 반일소년단 등 군중적인 혁명단체를 결성했다. 1936년말부터 1937년 2월 장백현 20도구에 조국광복회장백현공작위원회를 건립, 산하에 수십개의 기층조직을 세웠다. 이시기 장백현 19도구에 권영벽을 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원회를건립하고 아래에 3개 특별지부와 10여개 직속 당지부를 두었다. 적들의 통치지구에 건립된 군중단체들은 장백현위의 령도아래에서 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이런 군중단체들은 또 량식과 병력을 보충하는 큰 뒤심이기도 했다. 이 시기 300여명 청년이 항일련군 제2군에 참가했다.
  
반일단체에서는 당조직의 령도하에 청년들을 골간으로 하는 “생산유격대는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유격대는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반군사조직이였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생산로동에 참가하여 량식을 생산해 항일련군에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적정을 정찰하거나 보초를 섰으며 유사시에는 항일련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장백항일유격근거지는 연변에 항일유격근거지때와 같지 않았다.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때와 같지 않았다. 연변의 유격구는 해방지구의 유격구였는데 유격구에서는 적구의 군중들을 쓴외보듯 했으며 지어 적통치지구의 인민들에 대해 “백색군중”이라고 하면서 적대시하였고 중간지대의 군중들에 대해서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경원시하였다. 그러나 장백에서는 군중을 “적”, “백”으로 갈라놓는 실책을 피해 적점령구 깊이에까지 들어가 군중공작을 하여 항일하려는 모든 군중을 단결, 투쟁에로 불러들였다. 하여 집단부락의 경비를 맡은 자위단원들속에도 우리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들의 기층정권기관에도 당에서 파견한 공작인원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대부분의 구장, 촌장, 툰장자리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원들의 심부름을 해주는척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꾸리고 항일군에 보낼 후방물자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쳤다. 하여 낮이면 적의 세상이지만 밤만 되면 우리들의 세상이였다.
  
“언제인가 우리는 팔도강이라는 집단부락에 식량공작을 간 일이 있었다. 팔도강의 자위단에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있었다. 우리 소분대는 이 공작원의 련락을 받고 혁명가요를 부르며 곤두총을 쏘면서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공작원이 미리 마련해놓은 식랑만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가 철수한 다음 공작원은 일본인경찰을 찾아가 유격대가 마을을 들이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포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 포대 때문에 자위단이 살아났다고 하면서 놈들을 속여넘기였다.”(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광활한 심산밀림속에서 유격활동을 벌렸을뿐만아니라 적점령구의 반일단체와 인민군중들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부대를 장대시켰다.
  
반"토벌"전투
장백지구에서의 항일련군의 맹활약은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이에 관동군은 동변도를 포함한 만주일대에 항구적인 치안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만들기에 이르게 되었고 만주국정부는 “3개년치안숙정계획요강”을 내놓았다. 가장 중심적인 특별공작대상자로 정한 것이 바로 북부동변도 즉 장백, 림강, 무송, 동강, 휘남, 금천, 류하, 통하, 집안 등지였다. 위만주국은 중앙에 “동변도부흥위원회”를, 통화에 “동변도부흥판사처”와 “동변도특별치안유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만주국군부 최고고문인 사사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화토벌사령부”를 내오고 북부동변도의 치안확보를 겨냥하는 “동기대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의 동기토벌을 대비해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2사와 제2군4사,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의 령도하에 장백, 무송, 몽강, 안도 등 현에다 많은 밀영을 건설하고 대량의 량식과 군수물자를 축적, 반“토벌”전을 준비했다.
  
반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남부조선의 경찰부대도 북부의 상악지대로 이동했고 치치할에 있던 광동군부대들도 장백산쪽으로 남하기기 시작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산하 부대들도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만경찰부대들과 위만군“토벌대”들도 항일련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우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어졌다. 바로 아무렵부터 적들은 경찰관의 안해들까지 사격훈련을 시키였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 같은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일대 두메산골 오솔길들로는 대표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했다. 장백산지대는 “토벌대”들로 쫙 덮혔다. 적들은 “이번 토벌을 최종적인 것으로 하여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면서 장백산일대를 참빗질하였다. 그러나 항일련군의 기동령활한 유격전앞에서 적들은 간곳마다에서 골탕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 10일, 2군 4사와 6사의 400여명 전사는 안도현남부의 동청구부근에서 위만군 제7려 14퇀을 습격 일본군 대좌와 중좌를 비롯한 10여명을 격살했다. 이에 적들은 5000여명 병력을 긁어모아 4사와 6사를 포위추격해왔다.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 등은 부대를 이끌고 무송, 림강, 몽강 등지의 림해설원으로 적들을 끌고다녔다.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곳에서 한바탕 두둘기고 저곳에서 뒤통을 답새기면서 적들의 추격을 파괴해버렸다. 11월 4일,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는 대양차위만군주둔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후 맹렬한 공격하는 한편 정치공세를 들이대 10여분만에 적들이 두손들고 투항하게했다. 하여 아군은 기관총 2정, 보총 150여자루, 탄알 15상자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으며 적들의 장백산지구로 들어오는 목이나 다를바 없는 군사요충지를 회멸해버림으로서 장백산지구 각 현 항일유격선로를 개통해놓았다.
  
11월하순, 2군에서는 무송현 소탕하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정보를 알아낸 적들은 600여명 병력을 동원해 소탕하를 향해 진군해들어왔다. 소탕하서북측의 고지를 점령한 적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아군의 주둔지를 향해 돌연적으로 습격해왔다. 왕덕태는 1개 패를 파견하여 군중을 엄호하면서 후퇴하게 하고 군부 교도퇀 1개 련을 적들의 등뒤로 빠져나가게 하여 앞뒤로 적을 포위해버리려 했다.
  
적들의 공격을 점점 거세져 전투는 갈수록 가렬해졌다. 아군의 희생자도 점점 많아졌다. 긴요한 관두에 아군의 기관총수가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적들은 머리를 쳐들고 미친개마냥 달려들었다. 이때 6사8퇀 정위 김산호가 비발치는 총탄을 맞아 받아 달려나가 쓰러진 전우의 손에서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돌격해오던 적탄을 기관총사격에 폭폭 쓰러졌다. 그러나 그마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눈앞에서 두 전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 왕덕태는 벌떡 일어나 전우의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은밀히 파견되였던 교도퇀은 끝내 적들의 뒤등으로 공격해왔다. 최현퇀장이 인솔하는 4사1퇀도 정면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넘어서야 부대는 적들의 포위를 완전히 뚫고 나올수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임벼 제2군 군장인 왕덕태가 불행히도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왕덕태는 겨우 28살이였다.
  
왕덕태가 희생된후 제2군의 모든 령도중임을 위증민이 맡게 되었다. 위증민은 2군 4사, 6사와 1군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림강으로 전이했다. 12월 2군의 4사와 6사의 200여명 병력은 림강의 5도구에서 위만군과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격살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1937년 양력설, 500여명의 일만군이 6사의 홍두산밀영을 습격해왔다.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림강일대에서 활동하고있어 밀영에는 30여명의 전사들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한 전사들은 주동적으로 밀영을 비워놓은후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련속하여 적들을 볶아댔다. 이곳저곳에서 얻어맞은 적들은 100여구의 시체를 남긴채 창황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56.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용감무쌍한 6사 전사들 림기응변 신출귀몰하면서 곰골전투 홍두산전투 벌려 “동기대토벌” 분쇄
  
일제는 림강, 장백현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련속되는 타격을 받게 되자 창황히 병력을 집중하여 “동기토벌”을 감행, 장백현에서 활동하고있는 제2군 제6사를 포위섬멸하려고 망상했다. 이것을 간파한 아군은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적절히 백합하면서 유인매복전과 불의의 습격전, 철벽의 방어전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대오를 토막내여 소멸하는 전법 등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술을 활용하여 적들을 반격했다. 적들이 “토벌”을 강화하면 할수록 아군은 밀림속으로 적들을 골탕먹였다. 그중에서도 곰골전투는 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소탕전을 앞질러 좌절시킨 방어전투의 전범이였다.
  
곰골에서의 격전
적들의 “동기토벌”이 시작되자 6사 사장 김일성은 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주로 곰골밀영쪽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영을 탐지하고있는 농민옷차림의 밀정 두놈을 붙잡았다. 밀정들은 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후 산밑 “토벌대”에 신호를 보낼 임무를 맡고있었다. 밀정의 진술에 의하면 적들은 일만합동 “토벌대”를 편성하고있었는데 그중 한 부대는 이도강을 떠나 곧바로 곰골로 밀려오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16도구의 마가자 서북쪽을 거쳐 밀영으로 접근하고있는데 자기들이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였다. 이 “토벌굼?위해 회령에 있는 비행기까지 동원하기로 되어있었다.
  
형세는 급박했으나 적들의 포위환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여있지 않고있었다. 아군은 적들이 수색을 벌리면서 밀영으로 조여들고있는 형편에서 밀영근처의 유리한 지대에서 적을 친후 슬쩍 빠져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적을 삼개골지대에서 밤을 리용하여 한번 더 때리기로 작전을 짰다.
  
곰골의 남쪽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있었다. 적의 주력이 들어오게 되어있는 골에는 잘룩한 병보가지처럼 묘하게 생긴곳이 있었다. 이 골의 량쪽비탈은 날렵한 산짐승들조차도 발붙이기 힘든 벼랑이였다. 적들을 좁은 홈통속에 몰아넣고 족치기에는 둘도 없는 유리한 지형이였다. 사장 김일성은 2련과 4련을 동북쪽고지에 매복시키고 골안 깊은곳에 허위진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대원들을 거기에 배치하여 마치 주력이 그곳에 있는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했다. 배치가 완료되자 이번에는 유인조를 파견하여 적진에 들어가 밤새껏 소란을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대부대가 움직인것처럼 흔적을 내면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유인조는 적진으로 들어갔다. 유인조는 적들을 아군의 주력이 배치되여있는곳으로 끌어오려고 골바닥에 대부대가 지나간 듯이 무질서한 발자국을 내면서 허위진지쪽으로 올라갔다. 잠시후에 그쪽 산비탈에서는 여러개의 우등불연기가 솟구쳐오르고 떠들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유인조의 꼬리를 물고 골안에 들어선 적들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법석대는 허위진지쪽에 신경을 모으면서 공격대기를 했다. 적의 척후대는 기마대렬이였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 골안쪽의 허위진지를 살펴보며 쑥덕거리던 기마척후대의 일행중에서 기병 3명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내달려갔다.
  
반시간쯤 지나 기마척후대는 보병종대를 뱀꼬리처럼 기다랗게 달고 다시 골안에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조선주둔군 함흥 20사단의 패거리들이였다. 정안군장교들은 말을 얻어타지 못한채 졸개들과 함께 도보로 오고있었다. 적부대의 뒤꼬리에는 박격포를 분해하여 기르마에 얹은 대오가 뒤따랐다. 다른 골짜기로도 적들이 기여들었다. 포위환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뻔했다. 아군은 100여명뿐인데 비해 적은 500명도 더 되었다.  
“땅!”
공격의 신호총소리가 터지자 포위해있던 아군은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공격개시신호를 기다리던 적들은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되고말았다. 적들의 포는 폭탄을 장탄한채 전장에 나딩굴었다. 한바탕 타격을 가한후 아군은 어둠을 타서 슬쩍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아군의 공격, 눈코뜰새 없는 추격, 사나운 추위 등으로 시달릴대로 시달린 적들은 날밝기를 기다리기 위해 으슥한곳에다 숙영지를 마련했다. 이것을 정찰해낸 아군은 적숙영지야습을 주도했다. 야습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없었다. 한 개 패의 병력으로 무어진 습격조가 어둠을 타 적의 숙영지로 은밀히 접근해갔다. 습격조는 보초병을 사로잡아 숙영지내막을 알아냈다. 일본군대가 숙영지복판을 차지하고 위만군이 그 두리에 잠자리를 잡고있었으며 짐군으로 끌려간 백성들이 맨 바깥쪽에 총알받이로 배치되여있었다.
  
습격대원들은 적순찰병으로 가장하고 3명씩 나누어 조를 형성한후 미리 알아낸 군호로 적들을 기만하면서 보초선을 무사히 통과하여 숙영지 한복판까지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천막안에서 젖은 신발들을 우등불가에 걸어놓고 혼곤히 잠자고있었다. 눈앞의 적들을 향해 습격조원들은 맘놓고 사격을 들이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적들은 신발도 찾아 신을새 없이 허덤벼쳤다. 적아를 가리지 못한 적들은 제놈들끼리 향방없이 마구 쏴갈기기도 하였다. 숙영지는 벌둥지를 쑤셔놓은것처럼 발칵 뒤집히였다. 혼란한 틈을 타 습격조원들은 감쪽같이 빠져나왔다. 적들은 저들끼리 밤새껏 총격전을 벌려 무리죽음을 냈다. 어떤 놈들은 신발도 외투도 찾아신지 못하고 간신히 도망치긴 했지만 동북림해의 11월의 강추위에 거의다 얼어죽고말았다.
  
홍두산전투와 도천리전투
횡산에서 1937년의 음력설을 보낸 6사 사장 김일성은 일부 장병들을 거느리고 홍두산밀영으로 돌아왔다. 아직 행장도 풀지 않고있는판인데 망원초쪽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려왔다. 적들이 쳐들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정황은 아주 긴박했고 형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아군의 병력이란 기관총반과 리두수네 련의 대원 몇 명뿐이였다. 반면 적의 병력은 아군의 몇배나 더 되었다. 그런데다가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적들이 이미 망원초고지에 거의다 접근하고있을 때였다. 아군은 완전히 적들의 제압군내에 들어버리고 말았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투원들은 재빨리 남쪽릉선을 차지했다. 김일성은 리두수련장에게 지시하여 망원초의 대원들을 철수시키고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망원초의 대원들로 하여금 반드시 적들이 눈에 뜨이게 칼릉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망원초로 통하는 칼릉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수 있는 외통길이였다.
  
망원초의 전사들은 과연 적들을 칼릉선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적들은 자석을 따르는 쇠붙이처럼 망원초의 아군전사들의 뒤를 꼭 물고 칼릉선에 올라섰다. 홍두산 남쪽릉선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은 기다싶이하면서 가파른 릉선에 매달려있는 적들을 손금보듯 내려다보면서 경기관총을 휘둘렀다. 불의의 사격을 받은 적들은 퇴각한다는 것이 릉선아래 골바닥에 갇혀버렸다. 골짜기에 갇힌 적들은 이번엔 남쪽릉선을 오르려 했으나 남쪽릉선 비탈은 얼음강판이였기에 아군의 진지로 근본 접근할수 없었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거의 전멸되다싶이했지만 아군은 단 한명의 부상자를 냈을뿐이였다.
  
홍두산전투후 6사주력은 장백현 하강구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적들은 다시금 대병력을 긁어모아 항일련군을 찾아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고있었다. 아군의 주력부대가 하강구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적들의 력량을 분산시켜놓고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동기토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겨우내 항일련군을 뒤쫓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허탕만 치던 적들도 6사주력부대를 찾아 헤매이다가 지금 도천리부근에 주둔하고있었다.
요방자에서 도천리나 최령감골로 가려면 봇나무, 자작나무, 가시나무와 키가 넘는 갈대며 새초풀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무연한 15킬로메터의 소로길을 지나야 하였다. 만약 이 길로 적들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적들은 외줄로 행군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아군은 진대통이 가로놓인 요소요소에 매복해있다가 손쉽게 적들을 토막쳐 족칠수 있을것이였다.
  
유인조는 적들이 나타나자 그 선두대렬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한후 재빨리 몸을 피하여 가시덤불 등판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복병이 있는줄도 모르고 적들은 아군의 그림자를 뒤쫓아 무작정 가시덤불밭으로 뛰여들었다. 적들에게 있어서 가시덤불은 가시철조망과 다를바 없는 장애물이 아닐수 없었다. 가시덤불의 성화 때문에 적들의 대오는 토막토막 끊어지였다. 숨어있던 매복조성원들은 토막난 적대렬을 향해 사정없는 사격을 안겨주었다. 수백명의 적들은 아군의 토막치기전술에 걸려들어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갈팡질팡할뿐 어쩌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진맥진한 적들은 공포를 꺼안은채 도천리마을로 철퇴하고 말았다.
  
도천리마을의 항일련군 지하조직에서는 “공비군”을 소멸하러 온 장병들을 위로한다면서 닭도 잡고 쌀도 찧어 떡을 만들면서 우정 저녁식사를 늦잡아놓았다. 결국 패배의 수치도 모르고 만포식한 적들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앞 큰길 좌우에는 언녕부터 항일련군 전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이런줄도 모르고 늑장으로 부리면서 지나가던 적들은 갑자기 터지는 수류탄과 씽씽 날아드는 총알의 세례를 톡톡히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매복전에 걸려든 적들은 완전히 괴멸되고말았다. 새초가 깔린 등판에 적의 주검이 한 벌 널려있었다. 아군은 시체들을 총만 벗겨가지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 시체들을 실어나르느라고 적들은 24대의 소발구를 동원했다고 한다. 그 소발구 하나에 주검 9구씩 싣고 13도구까지 날라갔다고 하니 이날 황천객이 된 적들은 200명도 더 될것이였다.
적들의 “동기토벌”에 맞서 아군은 몇백차의 전투를 벌리면서 끝내 “토벌”을 분쇄했다. 항일련군의 련전련승으로 하여 장백땅은 완전히 항일련군의 세상이 되고말았다.
 
57. 로진창전투와 보천보전투

 

로진창에서 악질주구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고 압록강건너 보천보서 일제통치기관 들부셔
  
1937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제1퇀, 제3퇀, 6사 제9퇀, 제10퇀은 무송현 동강양무띵즈밀영에서 회사한후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1936년 가을부터 진행된 반“토벌”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1937년 상반년의 활동방향과 병력배비문제를 토의했다. 적아의 태세를 분석한후 부대를 나누어 유격활동을 진행하면서 적들의 분할포위를 돌파하기로 방침을 제정, 4사주력은 연변지구인 안도, 화룡으로 진군하여 유격활동을 하다가 다시 장백현으로 돌아오며 6사주력은 무송에서 장백현으로 곧바로 나아가 장백산구에서의 유격전을 견지하면서 적들의 1937년 춘기대“토벌”을 분쇄하기로 했다.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다
동강회의후 두만강연안을 거쳐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출할 임무를 맡은 4사 1퇀, 3퇀과 사부소속부대 및 6사 9퇀의 300여명 병력은 4사 정위 주수동, 1퇀 최현 등의 인솔하에ᅢ 며칠동안 급행군하여 돈화현 목단령에 다달았다. 4월초 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북쪽도로에서 군수물자를 만재한 군용마차 20여대를 습격하여 많은 식량과 피륙을 로획하여 결핍하던 군복과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4월 23일 안도현 승평령동남쪽에서 일본군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린후 적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안도현 로진창부근에 이르렀다.
  
4사 1퇀 퇀장 최현은 부대의 행동을 맛洋歐?위해 5명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파견하여 사위의 정형을 정찰하게 했는데 정찰조원들은 적의부대가 지나간 것 같은 많은 발자국이 나있는데 그 발자국에 고인물이 아직 흐린대로 있더라고 보고했다. 이에 최현은 3련을 파견하여 로진창동북쪽 묘령의 경계에 배치하고 주력부대는 수림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가지 않아 대사하에 이르렀다. 대사하는 워낙 물살이 세고 차거웠다. 게다가 봄물이 져서 부대가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다. 최현은 한 개 련을 파견하여 강에 다리를 놓아야 했다. 최현은 한 개 련을 파견하여 강에 다리를 놓게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강가의 금전굴곁에서 휴식을 취하게ᅢ 했다. 몹시 지친 전사들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코를 골면서 굳잠에 빠져들고말았다.
  
이때 황구령에서 항일련군에게 군수물자를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리도선은 200여명 병력을 거느리고 은밀히 아군의 뒤를 밟으면서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떠날 때 리도선은 상전앞에서 “이번 길에 공비들은 모조리 소멸하겠다. 만약 한놈이라도 놓친다면 황군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것이다”고 큰소리쳤다.
  
토비출신인 리도선은 한때 항일대오속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9.18”사변후 혁명을 배반하고 왜놈의 개다리로 되였다. 총질을 특별히 잘하는 명사수였던 이자는 주구의 자식들이 아니면 반역자거나 명포수들을 모아 부대를 묶어 우두머리질을 했다. 불악귀같은 놈들은 동만일대에서 수천명의 혁명투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그 대가로 왜놈에게서 훈장까지 탔으며 안도현치안대 사령의 보좌에까지 올랐다. 이자의 수하 중대장, 소대장은 거의다 왜놈들이였다. 리도선부대는 일본군과 배합하여 항일련군“토벌”에 나서서 나쁜짓이란 나쁜짓을 다 저질렀다. 이자는 마안산밀영을 포위하고 항일련군 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과 부상병들을 살해했고 처창즈, 황니거우, 석문자, 호로계자, 투도구 홍륭 등지를 여러번 “토벌”하면서 무고한 백성과 항일투사들을 무수히 살해했다. 리도선부대가 지나가는 마을들에서는 무고한 백성들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기에 안도지방사람들은 리도선을 “저승에서 보낸 악귀”라고 저주했다. 왜놈들의 특수훈련을 받은 이자들은 항일련군의 유격전술에 대해 익숙히 알고있었고 안도일대의 지형, 산세, 인심을 파악하고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계획하고 아군이 휴식하고있는 근처에까지 배밀이로 접근해온 적들은 30~40메터 사이두고 우리의 보초병에 의해 발견되였다. 보초병은 “적이다!”하고 큰소리로 웨치는 한편 방아쇠를 당겼다.
놈들은 아군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으려고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전사들은 재빨리 무기를 찾아들고 적들을 향해 맞불질을 했다. 정위 주수동이 적탄을 향해 맞불질을 했다. 정위 주수동이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사태는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항일련군의 유명한 기관총수 리경달이 벌떡 일어나 적들을 향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뜻하지 않은 불벼락을 얻어맞은 놈들은 잠시 대가리를 땅에 틀어박고 전진을 멈추었다. 하여 아군은 어려운 순간에 귀중한 시간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그때를 최현은 회상기 “혁명의 한길에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대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주위에 널려있는 금점구뎅이와 버럭더미로 분산하여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쳐들어오던 적들은 적지 않은 시체를 남기고 얼마쯤 물러섰으나 더 물러설곳이 없는 것을 알자 결사적으로 대들었다.
적아간의 화력간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강안이 금시에 포연으로 자욱해졌다.
아군부대들은 버럭들과 구뎅이들을 리용하여 계속 사격하였다. 그리하여 적대렬에는 혼란이 조성되였다.
“2중대는 좌측으로. 1중대는 우측으로!”
이것은 불리하게 널려있는 안군진지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구령에 의하여 부대성원들은 적탄이 우박치는속에서도 대렬을 재정돈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 금점구뎅이에서 허리를 솟구쳤다. 낮추었다 하며 전투를 지휘하고있었다. 그런데 적 두놈이 내앞에 나타나 나를 쏘려고 겨누었다. 순간 나는 허리를 굽혔으나 적탄은 나의 어깨를 때렸다. 나는 부상을 당했지만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다.
전투개시후 거의 반시간이 지나갔다... 아군의 완강한 방어와 명중사격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바득바득 기여들었다. 그때까지만도 적들은 벌써 수십명이나 꺼꾸러졌지만 아군의 턱밑으로 배밀이를 하며 기여드는것이였다. 놈들도 퇴각을 하기만 하면 전멸당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아간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는 20~30메터 지어는 약 10메터까지 된곳도 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아직도 공세를 취하고 우리는 수세에 처하여있었다. 피동적인 수세에 오래 머물게 되면 필연코 아군부대에 만회할수 없는 불리한 정세가 닥쳐올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놈들에게 반공세를 취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벌써 놈들도 구뎅이와 버럭밑으로 기여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투는 사실상 고착되고말았다. 놈들은 버럭을 몸가림삼고 혹은 구뎅이속에 대가리를 틀어박고 지구전을 기도하였다.
  
이제는 적들도 우리를 사격하기에 불리했고 우리도 역시 곤난하였다.
그런데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위험성이 있었다.
나는 이때 놈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것을 명령하였다. 우리의 수류탄들이 일제히 눈앞에 널려있는 적들의 음페지를 향해 날아갔다... 연거푸 안겨지는 수류탄불벼락을 받고 수많은 놈들이 비명을 울리며 쓰러지게 되자 남은 놈들이 뿔뿔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돌격명령을 하였다. 우리 용사들은 도망치는 적들을 향하여 성난 사자와도 같이 함성을 울리며 돌격해나갔다...
아군은 혼비백산한 적들을 총창으로 찌르고 총탄으로 쓰러뜨리면서 5킬로메터나 추격, 일망타진해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전사들은 “신선대”라고 불리우는 리도선의 악질부대와 싸운줄을 모르고있었다. 적들에게 짐군을 강제로 잡혀온 농민들의 말을 듣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전장을 수색할 때 한 농민이 시체사이게 끼여있는 한 군관을 가리켰다. 놈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으면서도 짐짓 숨진채 가장하고있었다. 농민은 저놈이 리도선이라고 손짓과 눈짓으로 전사들에게 알려주었다. 누군가 달려가 발로 몇 번 차도 놈은 죽은채 꼼짝하지 않았다. 수색해보니 목에는 항상 걸고 다니는 금인형이 걸려있고 호주머니에는 도장이 들어있었다. 틀림없는 리도선이였다. 놈은 총알에 넓적다리를 맞아 도망칠래야 도망칠수 없게 되자 시체더미속에 죽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을 발견했던 농민은 꽁무니에 차고있던 도끼를 빼들었다. “윽”하는 소리와 함께 악질지주의 대가리가 땅우에서 딩굴었다. 짐군들은 모여들어 몽둥이와 돌로 그놈의 시체를 죽탕을 만들어놓았다.
  
그때 현소재지까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쳐간 놈이 네놈인데 그놈들도 어떻게나 혼쌀이 났던지 당도하자마자 두놈은 그 자리에서 죽어자빠지고 한놈은 입원치료를 받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리도선부대에서 살아남은 놈은 단 한놈뿐인 것이다. 로진창전투는 리도선부대를 완전히 소멸해버림으로써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화광에 휩싸인 보천보
천상수와 소덕수를 거쳐 5월중순경 지양개등판에 이른 6사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오정비와 여러 가지 선동사업을 벌리였다. 대원들에게는 승마복형태의 새 여름군복을 지급하였다.
새 군복으로 옷차림으로 일신한 6사 장병들은 1937년 6월초,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구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곳에 와닿았다. 앞쪽의 등판이 제비등판이였는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곤장덕과 마주서있었다. 부대는 구시산마을에서 얼마간 머루르다가 제비등판에 올랐다.
6월 3일 새벽이였다. 조선의 높고낮은 산봉우리들이 키돋움을 하면서 6사전사들을 반기였다. 망국의 설음을 안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총잡고 항일련군에 참가한 조선족전사들은 조선땅을 바라보면서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수 없었다.
  
그날 부대는 제비등판에서 로독을 풀었다. 선발대원들은 구시물동에 가서 떼목다리를 마련하였다. 6월 3일 밤, 부대는 압록강을 건넜다. 적들이 몇겹으로 경계진을 치고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선을 감쪽같이 건넜던 것이다. 구시물동은 소연한 물소리로 부대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부대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는 평평한 야산이였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다음날은 이른아침부터 곤장덕숲속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포고, 삐라, 격문도 준비하고 지도부회의도 소집했다. 정찰원들을 농민으로 가장시켜 시내동정을 면밀히 정찰하게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곤장덕을 내리여 곧바로 보천보시기가 위치를 차지했다. 부대가 어찌도 엄밀히 행동했는지 지휘처로 정한 근처의 농가앞마당에서 흥이 도도해 장기를 두고있던 농민들도 사정을 깜빡 모르고있었다.
“땅!”
정각 10시, 김일성은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보천보의 밤하늘에 쏘아올렸다.
신호총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맹렬한 사격으로 적기관들을 들수시였다. 먼저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이 안기여졌다. 삼림호구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부대는 거기에도 드센 공격을 들이댔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혔다.
얼마후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삼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거래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 전체가 여러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승리로 끝났다.
 
58. 일제의 황민화정책1

 

일제 로구교 점령 북경 포위 전면적침략 감행 동북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파쏘통치 강화
  
로구교사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왕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충돌이 야기되였는데 일본군은 송철원의 29군이 저항해나서자 로구교를 점령하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자그마한 우발적인 충돌이였던것만큼 얼마든지 현지교섭으로 해결할수 있었으나 일제는 구실을 찾고있던참이라 생트집으로 중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 것이다.
  
일제는 로구교사변에 앞서 1933년 1월의 산해관공략으로부터 시작하여 화북지구의 침입, 열하작전에 의한 성소재지 승덕의 점령, 진황도 상륙, 하북성 동부지구에로의 진격 등 군사작전을 벌리면서 미구에 감행하게 될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준비해왔다. 장개석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후 침략이 마수를 관내로 뻗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로농홍군을 “토벌”하는데 혈안이 되어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오히려 방대한 군사력량을 동원하여 서금에 있는 중앙쏘베트를 없애버리려고 무려 5차례에 걸쳐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로구교사변후 군부의 압력에 의해 일본 고노에내각을 각의에서 결정, 8월 13일 상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중일간의 큰 전쟁이 터지게 된 것이다. 로구교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근 3000일동안이나 중국을 피바다에 잠그고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속에 휘몰아넣는 전주곡이 되고말았다. 이로부터 일제는 광활한 중국땅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중국인민에 대한 무차별학살을 곳곳에서 감행,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르면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지배와 아세아의 맹주로 될 야수의 꿈을 무르익히려 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은 “평진이 위급하다! 중화민족이 위급하다!”고 대성질호하면서 한결같이 떨쳐나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중화민족의 생존의 길이기에 “민족통일전선의 튼튼한 장성을 쌓아 왜놈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전국에 호소했다. 7월 15일에는 “국공합작의 선언”을 국민당중앙에 보냈다. 서안사변을 계기로 려산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주은래의 담판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어 국민당도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의 선언에 대한 담화”를 발표, 국공합작을 기초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전민족적인 항전이 새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의 폭발은 동북항일투쟁의 전략적임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중국내지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발동하면서 이미 침략한 동북을 저들의 중요한 후방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리하여 관내는 항일전쟁의 주요전장으로 변해버렸다. 5년 남아 독립적으로 한부분으로 변하여 동북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관내의 주요전장에 대해 배합하고 지지하는 작전으로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무하에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했으며 각지 항일련군들도 새로운 항일투쟁의 고조를 형성하여 일제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조에 발맞추어 일본군에 대해 타격을 가했는데 이는 동북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습니다. 항일련군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신속하게 동북을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꿈이 파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면서 1936년 3월에 제정한 일제의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설명해주었다.
  
이 숙정대강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을 점령한후 동북을 침략을 확대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첫해(1936년 4월-1937년 3월)의 “숙정”중점지구는 빈강, 길림, 간도, 삼강(합강) 등 성이며 두 번째해(1937년 4월-1938년 3월)는 첫해의 “숙정”성과를 진일보로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한편 전 동북에 대한 “숙정” 공작을 확대하는것이며 세 번째해(1938년 4월-1939년 3월)에는 특수지구에 대한 “철저한 숙정”이였다. 적들은 “집단부락”을 건설해 무인구역을 만들며 경제봉쇄를 실시해 항일련군과 군중들의 련계를 단절시키는 한편 경찰, 특무 조직을 강화하여 항일무장을 고립시켜 적화사상의 뿌리를 빼버리려 했다. 로구료사변후 일제는 “숙정계획”에 대한 전략적인 변경을 했는데 그해 제2기 “치안숙정공작요강”에 “치안숙정의 주요지구를 만주국동부지구, 특히 동변도 및 동부삼각지대-장백산지구로 한다.”고 명확히 해놓았다. 이로써 적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을 주요목표로 정한후 병력을 집중하여 “3강성(길림, 통화, 간도)토벌”등을 감행해 반일무장을 완전히 소멸해버리려 시도했다.
  
일제는 항일련군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관계를 절단하기 위해 1936년에 이르러 동북지구에 이미 1만 3451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으며 보갑련좌법을 실시했다. 1938년의 통계에 의하면 일제가 동북에 경찰서 1233개소, 경찰분주소 3651개소, 파출소 1630개소나 설치하였으며 경찰은 10만명에 달했다. 연변지구에는 32개의 경찰서와 153개의 분주소, 55개의 파출소, 10개의 삼림경찰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찰총수는 4230여명에 달했다. 1940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 319개의 자위단이 있었는데 자위단이 1만 8131명이 있었다. 경찰과 자위단은 “경제범”, “형사범”, “사상범”, “국사범” 등 죄목을 씌워 무고한 인민을 마구 체포하고 형벌을 가했으며 도형에 언도하거나 학살했다.
  
일제의 문화 파쑈적통치
일제는 정치경제면에서뿐만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파쑈적인 노예화교육과 민족동화정책을 감행했다. 로구교사변후 일제는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일만일체”, “공존공영”, “천황지상”, “왕도락토” 등 반동사상을 고취했다. 1938년 1월 1일 위만주국은 이른바 “신학제”를 실행하면서 일어를 “국어”자리에 놓고 민족노화교육을 강압하기에 이르게 된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압박 역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자들은 조선족들에게 이른바 “황민화운동”을 진행하게 하면서 어떠한 장소에서도 본민족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강박적인 수단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조선족들이 본민족 성명을 가질 권리마저 박탈했다. 도처에 “신사”(일본황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를 세우고 조선족을 일본의 “선족”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박, 조선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고 조선민족을 저들이 마음대로 혹사하고 유린하는 “망국노”로 만들려 했다.
  
일제의 이러한 의도는 교육에서 돌출하게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이른바 “일시동인”, “내선일체”, “내선공학”이라고 조선족을 기만했다. 일제는 “문화통캇의 허울밑에 조선말과 조선력사를 말살하고 일본어와 일본력사에 대한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또 일본문화와 생활양식을 조선족청년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전통 문화와 교육을 파괴하고 민족의식을 없애며 나아가서는 조선민족을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망발했다. 일제는 “국민된 성격의 함양”을 위하여,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숙달시키기 위하여”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강박함과 아울러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인물, 시가, 풍속, 지방특성을 알리고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로 일관된 내용을 불어넣었다. 일제가 조작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아세아주의 동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렬도와 조선반도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만주국에서 빌린 관동주와 렬국에서 맡긴 남양제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경치가 좋은곳이 많다. 그가운데에도 후지산, 금강산, 세도내해는 널리 알려져있다. 9천만 국민이 우로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들면서 각자 그 업에 매진한다.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만한 곳이 다시 없다.
  
조선어 또는 “조선어 및 한문”과목의 교수방법은 일본어교수에 준하거나 일본어와 련계시켰고 경우에 따라서 일본어로 가르치게 하였다. 교과서내용도 되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을 골라넣었으며 그마저도 일본문화와 신민지정책이 가득 들어찬것이였다. 조선의 인문, 시가, 문학작품, 풍속, 지방특색 등 사항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교과서에는 대개 이런 내용의 글들이 실리였다.
  
一植木
福童이는 四月四日아침에 學校뒤집 老人을 만나서 인사를 엿주엇소.
老人“어제 너의들은 무슨 일로 그러케 일즉이 學校에 모엿느냐.”
福童“어제는 神武天皇祭日이올시다. 저의들은 일즉이 모여서 선생님을 따라 學校林에 갓다왓습니다.”
老人“그러면 植木을 하러 갓드냐.”
福童“네 學校에서는 神武天皇祭日植木日로 定하고 해마다 그날을 學校林에 가서 나무를 심습니다.”
老人“그것은 참 조흔 일이다. 죠션은 어듸든지 붉은 山이 만타.”...
  
력사와 지리교육도 조선력사와 조선지리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대신 보통학교 고급학년에 일본력사와 일본지리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중등학교들에 “력사지리”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청소년들의 력사의식과 만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기도 했다.
  
...이 무렵 조선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이 있어서 이를 3한이라고 했다. 그가운데서도 신라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웠고 세력 또한 강했다. 황후는 먼저 신라를 복종시킨다면 구마소는 스스로 평정될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께우찌노 스꾸네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토벌했다. 때는 기원 860년이였다... 황후는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에 건너가 그곳에서부터 신라로 쳐들어갔다. 군선이 바다에 가득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매 신라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고 천황이라는 훌륭한 군주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오는 것은 바로 일본의 신병일 것이다. 어떻게 방어할수 있을가 하더니 즉각 흰기를 들고 항복하여 황후의 앞에서 맹세하기를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은 있을지언정 매년 공물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을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황후는 개선하였는데 그후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도 또한 우리 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선은 천황의 덕에 이끌려 따르게 되고 구마소도 스스로 평정되였다...
  
이와같이 외곡된 터무니없는 “건국설화”를 꾸며대면서 조선이 예로부터 일본의 종속국이 였던것처럼 날조함으로써 조선청년들에게 렬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외에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에 들씌워 사실을 외곡했는가 하면 ‘강화도사건’도 조선이 도발했으며 중일갑오전쟁마저도 청나라가 도발한 것으로 외곡함으로써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 력사외곡의 글로 교과서를 일색화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59. 일제의 황민화정책2

 

"황국신민의 선서"외치면서 천황에게 충성맹세 "창씨변경세칙"강요로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
  
"황국신민의 선서"
1940년 5월, 부의는 두 번째로 도꾜에 불리워가 일본천황을 배일한 다음 천황이 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를 신경(장춘)에 세운 건국신묘에 가져다가 “건국신”으로 모시게 했다. 하여 동북지방을 완전히 일본 판도에 그어넣고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철저히 일본신민으로 전락시키려고 광분했다.
  
매일 아침조회시간이면 교직원과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일본 황궁과 만주국 제궁에 요배하며 일장기를 띄우고 “황국신민선서” 혹은 “국민훈”을 암송하여 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정오에는 장소와 교수시간에 관계없이 일본천호아과 만주국황제의 안녕을 빌면서 일제침략자들의 “승전” 및 죽은자들의 “명복”을 비는 “정오묵도”를 하게 했다. 학생들은 신사앞을 지날때면 반드시 모자를 벗고 절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하기만 하면 마구 때리고 가장 품행이 나쁜 학생으로 치부하여 락제 혹은 퇴학까지 시켰다. 때론 경찰이나 헌병에게 고발하여 체포학 류치장에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길림에서 공부하고있었는데 이러한 강요에 진절머리가 났더랬습니다. 방학이 되어 연변에 와보니 여기는 길림보다 엄청 더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은 완전히 일제의 황민화정책이 그늘에서 시달리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벌어지고있던 상황을 설명해주었?
학교마다에서는 첫 상학종이 울리면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후 “규죠요하이”를 해야 했다. 선생이 “덴노헤이까니 다이시데 사이게례(천황페하에게 최경례)”하고 웨치면 학생들은 동쪽을 향해 “사이게례”를 한다. 그다음 “고데이헤이까니 다이시데 시이게례(황제페하에게 최경례)”하면 서쪽 신경을 향해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페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의 서사(성인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겠다.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겠다.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겠다.
  
“황국민의 맹세(서사)”가 끝나면 아메데라스 오미가미를 향해 묵도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어서 승리하여주옵소서”라고 빈다. 아침조회가 끝난 교실에 들어가서 급장이 “일만기를 향해 경례!”학 소리치면 학생들은 일만국기에 15도경례를 한다. 그제야 제자리에 앉아 하루수업을 시작할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을 때면 밥곽을 책상우에 놓은후 급장이 “하시오도례” 하고 길게 빼면 저가락을 두 엄지손가락과 식지사이에 끼워들고 “저가락 들면 천지의 은혜와 부모와 시조의 은덕을 새기며 먹겠습니다”라고 외우고나서 밥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 급장이 다시 “하시오도례”라고 하면 저가락을 두엄지와 식지에 끼워들고 “고찌소사마”를 외운다.
  
일본말사용과 이런한 “맹세”같은 것을 도시주민과 농촌농민들에게도 강요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같은 것은 50세이하의 사람이면 왕왕 외워야 했는데 아니면 거리에 나설 궁리를 말아야 했다. 일본경찰은 길가는 청장년을 세워놓고 “오마에고, 고꾸신민노지까이오요메!(너 황국신민의 맹세를 읽어봐!)”라고 명령하는데 조금이라도 꺽꺽거리거나 외우지 못할 경우 “바가야로, 우찌니가에레!”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서 귀쌈을 후려갈긴후 집으로 되쫓아보내여 다시 외우게 했다. 불복하면 신분증을 빼앗는데 이것은 매맞는 일보다 더 무서웠다. 신분증이 없으면 외출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자칫하면 “공산비적”이로 몰리기 때문이다. 또 빼앗긴 신분증을 빼앗은 순사를 찾아가서 손이야발이야 빌고서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 하여 학교문턱을 가로타보지도 못한 일자무식의 농민들도 생계를 위해 일본말을 배우고 “맹세”를 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농민들의 황민화를 단속하기 위하여 일제는 시가지로 드나드는 어구를 지키기도 했다. 연길현 조양천에는 고바리소좌가 거느리는 261부대가 있었는데 이자들은 늘 조양천으로 드나드는 큰길어구를 지켰다. 삼봉동농민들은 조양천으로 일보러 들어갈 때면 일본병사들의 총칼에 가로막히군 했다. 왜놈들은 총창을 농민들의 가슴에 대고 상투적인 수법으로 “고고꾸신민노지까이”를 외우라고 으르렁거렸다. 물론 외우지 못하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귀쌈을 얻어맞는건 물론 시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집으로 쫓아보내 다시 외워가지고 와야 시가지로 들어가게 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대량의 조선청년들은 징병자, 징용자, 보국대로 뽑혀 끌려갔는데 일본말을 모르면 안되기에 일본어강습소, 조선청년특별훈련소를 세워 일본말을 억지로 배우게 했다.
“일제는 동북3성 조선족집거구에서 제일 지식이 있고 신체가 좋은 사람을 뽑아(자기가 먹을 쌀을 지고 가서) 서란현 막석에 꾸려놓은 훈련소에 보내여 훈련시켜 교관으로 양성한후 그 사람들을 다시 동북 각지 농촌에 보내여 훈련소를 꾸리게 하였는데 농민들은 1개월동안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훈련한후 징병 등에 뽑혀 나가야 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자신이 보고 겪은 사실을 피력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후 일제는 이러한 망발을 더욱 다그쳤다. 간도성만 하더라도 1944년 일본어강습소가 452개에 학생 2만 54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43년부터는 조선인청년들에 대해 이른바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높이고 징병제도실시의 기초를 닦는다는 명목으로 일본말학습을 주로 하는 훈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시켰다. 전기에는 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국민학교를 다녀본 청년들을 각 현 훈련소에에 보내여 3개월동안 합숙시키고 1년동안은 사숙시키면서 내무, 훈육, 학교교련 등을 진행하였다. 후기에는 서란현 국립중앙청년특별훈련소에 보내여 몇 달동안 강제훈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완전히 군사파쑈적이며 폭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훈련이 끝나면 물론 강제징병을 당해야 했다.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야
일제치하에서 학교에 다린 사람들은 지금도 “다이꼬빈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이꼬빈따란 일종의 독특한 체벌이였다. 이것은 학생 한사람이 잘못하면 그 학생이 소속된 학급전체에 강행하는 체벌인데 학생들을 두줄로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치게 하는것이였다. 체조때 간혹 늦게 나오거나 암송하라는 과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조심하지 않아 조선말을 했다거나 하면 다 이런 체벌을 받아야 했는데 학생들은 두줄로 마주서서 대방을 사정없이 때려야 했다. 느슨히 때리거나 하는 기미만 보이면 교원은 옆에서 사정없이 질책하여 세게 때리게 했는데 일단 맞고보면 대방에 대해 역시 힘껏 때리게 되는데 이렇게 교원이 성차할 때까지 때리면 다들 얼굴이 퉁퉁 붓기가 일쑤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일본인교원들은 학생들에게 신부름을 시키면서도 때리였다. “갔다와라”하면서 때리고 갔다오면 “갔다왔느냐?” 하면서 때렸다고 한다.
  
“이른바 ‘건국정신’이라는 과를 세우고 천조대신은 나라를 만든 신이라고 고취했으며 군인칙서, 교육칙서, 희란훈민조서, 국본전덩조서, 시국조서, 건국10년조서 등을 외우면서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조선인학생들을 핍박했습니다. 중학교는 철저히 일어화, 황민화, 병영화, 직업화시키기에 노력했습니다.” 박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