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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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로령회의》와 《혜산사건》

 

타락분자 비겁분자들 적에게 투항하고 당조직과 항일련군 엄중한 파괴를 당해

"제1차로령회의"
“로구교사변”후 항일련군 제1로군은 영용히 싸워 일제의 부단한 “토벌”을 분쇄했지만 항일유격근거지도 크게 파괴되였으며 항일련군도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인 위증민은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후의 국내외형세와 동북항전의 새로운 형세를 연구한후 1로군의 투쟁방침과 임무를 확정하려고 총사령원 양정우와 회합할 것을 기획했다. 이에 양전우는 제1군 군부 및 직속부대를 이끌고 환인에서 북상하여 집안에 이르고 위증민은 제2군 주력부대를 이끌어 남하하여 집안의 로령에서 만나기로 했다.
  
1938년 5월 상순, 위증민부대와 양정우가 거느린 제1군 군부가 집안의 로령산구에서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오도구밀영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가 소집되였다. 이번 회의를 세칭 “제1차로령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양준항, 한인화, 황해봉, 진수명, 서철, 려백기, 이준산, 송무선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국과 동남만의 투쟁형세를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였으며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들의 전면적인 진공을 분쇄” 할 방침과 책략을 채택, 금후의 유격운동의 방향문제를 토의하기도 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관내의 팔로군과 련계할 문제와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이 배합작전문제를 제의했다. 양정우의 제의에 따라 당중앙과 팔로군과이 련계를 계속하여 추진하기 위해 다시 서정하기로 결정, 제1군 제3사가 서정을 선행하기로 했다. 그뒤를 이어 제1군 제1, 제2사가 따르기로 했다. 각 항일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위해 제2군 제4사, 제6사는 계속하여 통화지구에서 유격활동을 벌리기로 하고 제5사는 의연히 수녕지구에서 활동하면서 길동, 북만지구 항일련군들과 련락공작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제1로군 개편
로령회의의 정신에 좇아 제1로군 각 부대는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양정우가 이끄는 서부원정부대는 움직이자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고있을 때 제1군 제1사 사장 정빈이 적에게 투항했다. 원래 양정우가 제1군 군부와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환 인을 떠난후 본계, 환인, 관전, 봉성일대의 투쟁형세는 급격히 악회되였던 것이다. 적들의 군사“토벌”, 경제봉쇄, 정치유항의 지독한 정책에 의해 항일대오중의 견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요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13일, 일제의 “장도공작반”과 “흑기유격대”가 갑작스레 환인현 우모구 서차밀영을 습격했다. 남만성위 선전부 인쇄주임 반제 등 5명이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제1군 참모장 안광훈이 체포된후 별절해버렸다. 안광훈은 변절한후 적들에게 제1군의 중요한 기밀을 제공했다. 안광훈의 공술에 의해 적들은 2월 25일, 환인현 쭈무타이즈에서 제1군 정치부 선전과장 겸 남만성위 비서처 편집주임 박세창을 체포했다. 3월 6일에는 환인현 우모대산에서 남만성위 청년부장이며 항일구국청년단 남만총회 서기인 류좌건을 살해했다.
  
“장도공작반”은 교란을 목적으로 변절자 안광훈, 후국신 등더러 여러차례 제1사 사장 정빈에게 투항을 권우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한편 “흑기유격대”는 군사적진공을 가해왔다. 적들은 6월 8일, 제1사 근거지의 포석하에까지 진공해왔다. 정빈은 부대를 거느리고 관전, 환인, 본계로 이동하면서 여러 차례 적들의 타격을 받았다. 6월 29일, 정빈은 본계에서 “장도공작반”의 투항서를 접수한후 투항을 견결히 반대한 1사 6퇀 정위 리철수, 1사 정치부 보안련 정위 김종한 등 지휘원들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수하 29명과 함께 적들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제1군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고말았다. 제1군은 물론 전반 항일련군 제1로군의 군부서, 부대건제, 지휘원들의 활동경로와 경로와 부대의 활동구역, 전략전술, 군수물자원천, 소속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 등을 잘 알고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정빈은 투항후 두말할 것 없이 이 모든 것을 적들에게 일일이 교대했다. 정빈의 투항으로 하여 1군의 서부원정계획은 더구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정빈의 투항으로 엄중한 손실을 받은 중공남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938년 7월중순, 양정우, 위증민, 방진성, 이준산, 서철, 한인화, 황해동, 양준항, 려백기, 손무선, 리흥소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재차 집안의 로령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정빈이 변절한후 정세에 좇아 1로군의 전반 항일투쟁에 대해 다시 연구했다. 회의에서는 일부대오를 남겨 로령산구에서 계속 유격전을 견지하게 학 주력부대는 룡강산맥의 하리와 화전, 몽강 등 산악지대로 이동하면서 서부원정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제1로군의 군과 사의 체제를 취소하고 총사령부의 통일적인 령도하에 한 개 경위려와 3개 방면군으로 재편 성, 각 부대의 작전지역을 새로 획분할데 관한 중요한 결정을 짓기도 했다.
  
1938년 7월말, 원 제 1,2군 교도퇀과 2군 독립려를 합병하여 사령부경위려로 편성, 양정우의 직속령도를 받게 했다. 려장에 방진성이 맡고 정위에 한인화가 맡았다. 독립려의 병력은 도합 500여명이였는데 주요하게 금천, 몽강, 집안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동년 8월 50여명으로 된 소년철혈대를 무어 총사령부의 활동에 밀접히 배합하게 했다. 8월, 제1군 2사와 2군의 부분적 병력으로 금천현 곰골에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조아범, 정치부 주임에 이준산, 참모장에 윤하태가 맡고 아래에 한 개 퇀과 한 개 기관총반을 두었다. 병력은 약 250명, 집안, 림강, 통화, 금천, 휘남, 몽강 등지에서 활동했다. 11월, 몽강현 남패지에서 원 제2군 6사로 제2방면군을 편성하였다. 지휘에 김일성, 정치부 주임에 려백기, 참모장에 림수산이 맡았다. 아래에 2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50여명, 장백, 무송, 몽강, 림강, 화룡, 안도, 연길, 훈춘, 왕청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9년 7월말 돈화현 한양구(지금의 안도현경내)에서 원 제2군 4,5사가 합병하에 제3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맡았다. 아래에 3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 연길, 왕청, 훈춘, 돈화, 액목, 교하, 녕안, 오상, 서란 등지에서 활동했다.
  
"혜산사건"
중공당원인 권영벽은 1935년 조국광복회가 설립된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30여명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장백현에 파견되여 장백현조국광복회를 조직했으며 조국광복회의 우수한 회원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여 당조직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드디여 1937년 중공장백현위를 건설, 제1임 현위서기를 맡았다. 7월, 장백현 17도구에서 제1차중공장백현위원회를 소집, 군중을 발동하고 항일련군의 항일투쟁에 배합하여 일만군의 병툰계획을 파괴하는 등 투쟁방향을 명확히 했다.
  
간고한 나날 장백현위는  전 현 각급 당조직과 당의 외각조직, 광범한 인민군중을 조직, 령도하여 항일을 선전하고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발리였다.
  
장백현위의 이러한 혁명활동은 적들에게 큰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적들은 “장백특무공작대대”를 무어 사처에 특무를 파견하여 정보를 탐지했다. 적들에게 걸려든 김태국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 몇 대를 맞고는 권영벽이 17도구에 있다는 것을 인차 고스란히 섬겨바쳤다. 9월의 어느 깊은 밤 조선 혜산의 일본경찰들은 감쪽같이 17도구에 기여들어 권영벽과 서응진을 체포했다. “혜산사건”은 이렇게 막을 열게 되었다. 김태국의 고발에 의해 벌써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핵심들이 검거되게 되었다. 제1차검거를 통하여 적들은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두고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까지 마수를 뻗치였다. 하여 장백현위와 장백현조국광복회는 마비되거나 해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마동화는 장증렬이 체포되였는데 마동희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스스로 끊으면서 투쟁을 견지한 반면 장증렬은 곤장맛을 몇 개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 관하에서 자기와 련계를 맺고있던 혁명조직의 지돟핵심성원들을 다 불었으며 항일부대와 밀영의 위치까지도 아는것대로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 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렬처럼 변절하고 말았다. 조개구는 재봉대가 자리잡고있는 간판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들 전원이 희생되게 했다.
  
이번 사건에서 수많은 중공당원, 조국광복회 회원, 반일인사들이 체포되였는데 일제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하여도 167명이나 된다. 일제는 이들의 “죄”를 158페지의 판결서로 렬거, 전원이 “치안유지법위반”이고 그 외에 주택침입, 강도, 살인, 살인미수, 방화, 공문서회손, 우편법위반, 전신법위반, 총포화약류취체위반, 출판법위반, 륙군형법위반, 군기보관법위반, 법인을 감추고 비호한 죄 등 되도록 중하게 하기 위하여 갖은 죄명을 다 들씌웠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적들에게 압수된것으로는 기관지 “火田民”제1호로부터 7호까지, 비밀출판물 “朝鮮共産主義者의 任務”, “同志여 團結하라!”, “日中戰爭과 朝鮮靑年의 任務”, “國際뉴스”, “사회주의란 무엇인갚외 10여종, 무기로서는 권총, 탄약, 단도 등이였다. 이러한 죄목으로 일제는 1941년 8월 28일, 167명에 대해 판결했는데 권영벽 등 6명을 사형에, 박금철 등 4명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그 외에 15년징역에 4명, 13년징역에 6명, 12년징역에 9명, 10년징역에 18명, 8년징역에 14명, 7년징역에 7명, 6년징역에 4명, 5년징역에 8명, 4년징역에 10명, 3년 6개월 징역에 7명, 3년징역에 48명, 2년 6개월 징역에 5명, 2년징역에 16명이 언도되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결국 중공장백현위와 조국광복회의 령도기관은 철저한 파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금후 항일련군의 군사활동에 엄중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62. 고난의 행군

 
추위 기아 병마 일만군의 포위공격 이겨내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개척 위해 고난의 행군 강행

일제의 "3성련합토벌"
1937년 7월부터 시작한 “3년숙정계획”에 근거하여 DFL제는 5만여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3강지구에 대한 1년 반동안의 “대토벌”을 감행한후 “치안숙정”의 중점을 동남만지구에 돌리였다. 하여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의 1년 반 동안의 “3성련합토벌”을 감행했다. 이번 “대토벌”의 주공목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이며 주요한 토벌구역은 간도성과 통화성 전체, 길림성 동부인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지와 목단강성의 녕안현이였다.

이번 “대토벌”에 참가한 일만군경은 도합 6만명, 그중 일본군으로는 관동군독립수비대 제5, 제9, 제21, 제7, 제8, 제4 등 6개 대대(후에 제19, 제20대대를 증가)였다. 그외에 각 대대에 20개의 무선전분대와 헌병을 배비, 총 6400여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위만군은 제2군관구보병 제2려, 기병 제2려, 제2교도대, 제8군관구 제1, 제2, 제3혼성려, 제8교도대, 제6군관구 1개 려, 제7군관구 1개려, 제1군관구 보병 제5퇀 및 통신부대와 자동차대 등 도합 2만 5000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경찰대로는 통화성경찰대(10개 대대), 간도성경찰대(5개“토벌”대), 길림성경찰대(14개“토벌”대), 목단강성경찰대, 간도특설부대, 통화성의 9개 현, 간도성의 5개 현, 길림성의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 현과 목단강성의 녕안현 경찰대, 통화, 간도, 길림 3성 및 소속 각 현의 경찰조직과 특별순찰반, 동변도지구의 각 위만삼림경찰대, 위만신경경찰학교 학병대, 위만영구해상 경찰대의 비행기 2대, 및 금주, 봉천, 빈강 등 성의 경찰증원대 도합 3만여명이였다.
  
일제는 “3성련합대토벌”을 대체상 3개 단계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4월까지 제1간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통화성 각현과 길림성 화전현에 두고 제1로군 총사령부와 경위려 및 제1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 4월부터 9월까지 제2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안도, 화룡, 왕청, 목단강성의 녕안, 동녕, 길림성의 서란, 빈강성의 오상 등지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9월부터 1941년3월까지 제3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특히는 목단강, 간도, 길림3성변경지구와 왕청, 훈춘, 동녕, 앵목 4개 현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일제는 미친듯한 군사 “토벌”과 함께 “토벌”구역에서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항일련군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 항일부대에 량식한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통화, 간도, 길림 3성에 예비도로 20여갈래를 새롭게 건설했고 100킬로메터의 전화선을 새롭게 가설했다. “토벌”기간에 일제는 도로와 철도 량켠에 농작물을 심지 못하게 했고 산비탈에 밭을 일구지 못하게 했다. 철도와 도로 량켠에 50메터내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리게 하고 철도와 도로연선에 경위대를 배치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제는 항일련군밀영 2085개를 회멸해버렸다.

일제는 군사 “토벌”과 함께 “사상토벌”, “문화토벌”도 감행했는데 “토벌”지구에 대량의 “선무”인원을 파견하여 “선무활동”을 하게 했다. 동시에 “토벌”지구에 반공삐리와 색정적인 사진, 음란한 서적과 간행물을 살포하여 항일련군의 사상을 부식시키고 정신을 유혹시키려 했다. 항일련군내부를 분화시킬 목적으로 일제는 항일련군 고급장령을 잡거나 죽이면 상금을 준다고 결정했다. 군급간부의 경우 1만원, 시급간부의 경우 5000원, 퇀장, 참모장의 경우 2000원, 기타 장령은 1000원으로 상금을 정했다. 일제의 발광적인 “토벌”은 항ᄋ릴녀군에 참중한 타격을 주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만군에게 도살된 항일군민은 1170여명이 되었고 포로된 사람은 900여명이 되었다.

일제의 "다니전술"
1938년 11월 25일,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는 몽강의 남패자에서 제2군 제6사와 회사한후 2군 6사를 정식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하였다. 김일성이 지휘로 임명되고 려백기가 정위로 림수산이 참모장으로 필수문이 부관으로 림춘추가 의관임명되였다. 직속경위련 련장에 오백룡, 제7퇀 퇀장에 오중흡, 저우이에 주재일, 제8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박덕산,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영이 임명되였다. 병력은 총 500여명이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수많은 지하조직이 파과되였기에 1938년 장백지구의 반일혁명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제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산구에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기 위하여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장백현 북대정자로 진격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행군은 적들의 추격과 함께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무서운 병마가 한데 뒤엉킨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고난의 행군이였다.

그해따라 추석전에 첫 서리가 내렸고 추석후엔 인차 큰 눈이 퍼부어 초겨울부터 박달나무얼어터지는 강추위가 들이닥쳤다. 부대는 출발하자부터 적들의 추격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마와 식량난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였지만 아군은 무려 110여일의 엄창난 품을 들여서야 행군을 완성할수 있었으니 그 간고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말치 않아도 짐작할수 잇을 것이다. 행군은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행기까지 날리면서 싸움에 열을 올렸다. 적들은 처음부터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진드기를 일어로 “다니”라고함)을 썼다. “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았다가 항ᄋ리련군이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항일련군에 대해서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이였다. 그 전술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면서 줄창 쫓겨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가게 하는 악착한 전술이기도 했다.

적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아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함정속에 빠진 안군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줄 모르는 적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무턱대고 추격만 당하면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자멸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갈지자전법”이엿다. “갈지자전법”이란 행군로를 갈지자모양으로 잡아나가는것이였는데 굽인돌이마다에서 되돌아아 앉아 지키고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전술이였다. “갈지자전법”은 눈이 몇갈씩 쌓인 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들을 무찌르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이였다.

그해 겨울따라 눈이 어찌도 많이 내렸는지 앞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수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대원도 50~60메터만 걸으면 맥이 진해 주저앉군 했다. 어떤곳은 눈이 너무 깊어 몸을 굴려 다져가며 길을 내야 했고 어떤곳은 눈굴을 파고 지나가야 했다. 적들은 어차피 아군이 낸 갈지자길을 졸졸 따라오는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갈지자전법"
7퇀 퇀장 오중흡은 행군종대의 맨 뒤에서 갈지자모양으로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전투소조를 배치시켰다가 적들이 다가붙으면 사격하게 했다. 적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사이에 매복타격조를 이동시켰다가는 적들이 다시 다가오면 또 답새기군 했다.

적들은 아군이 낸 외통길을 따라오기 때문에 매번 얻어맞는 신세가 돼버렸다. 아군은 드디여 주동권을 쥐고 적을 타격할수 잇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군은 림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푸를 벌리면서 1939년 정초에 장백현 7도구에 이르렀다. 적들은 갈수록 더많은 “토벌”대를 내몰아왔다. 적기가 아군의 행방을 찾느라고 자주 돌아치기 때문에 우등불초자 맘대로 피울수 없어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끊임없는 행군이 이어지다보니 걸음녀서 잠잘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군의 행방을 탐지한 적기가 지상부대에 련락을 주어 “토벌대”를 행군종대에 벌떼처럼 달려들게 하였다.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요 하늘에도 적이였다. 급박한 고나두에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앞에서 달려드는 적은 기관총소대가 무찌르고 뒤로 달려드는 적은 7퇀이 막고 나머지 대원들은 측명돌파로 포위속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험한 고비는 요행 모면했지만 노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이에 큰 병력의 집단행군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간파한 부대는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것을 결정했다. 부대는 세 개의 방향으로 분산하기로 했다. 지휘 김일성이 경위련과 기관총소대를 이끌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방향으로 나가고 오중흡의 7퇀이 장백현 상강구일대로, 8퇀과 기타부대가 무송현 동강일대에로 나가기로 했다.

부대가 분산되자 집중타격의 성화는 덜 받게 되었으나 식량난만은 어쩔수 없었다.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끎으면서 청봉방향으로 행군했다. 먹을것이 없어 전부대가 아사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봉부근에서 난데없는 가을하지 않은채로 남아있는 조밭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속에 파묻혀있는 조이삭을 보고 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형을살펴보니 봄에 부대가 신태자밀영으로 가면서 씨붙임을 한 조밭이였다. 지난봄, 부대전사들이 여길르 지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봄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이 허둥지둥 어디론지 달아나버렸다. 아마 항일련군을 일본군“토벌”로 생각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밭임자가 가을에 와서 곡식을 거두어가게 하자고 조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밭의 조가 가을을 하지 않은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눈무지속에서 한이삭두이삭 힘들게 따낸 조이삭을 찧어 죽을 쒀먹었다.

그러나 그 좁쌀마저 인차 거덜이 났다. 이제 식량을 구할수 있는 방도는 청봉밀영에 가서 감자를 한배낭씩 얻어가지고 가는 것뿐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감자밭에 이르러보니 감자는 이미 다 파가고 없었다. “토벌대”는 어느새 뒤에까지 따라와서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부대는 골짜기를 버리고 벌판쪽으로 내려간후 날이 저문 틈을 타서 강행군으로 멀리 빠져나갔다.

강행군 도중 삼림부대병영을 만나 돌격해들어가보니 놈들은 이미 다 도망쳐버리고 금방까지 음식을 먹던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대원들은 식탁우에 푸짐히 차례져있는 음식을 배낭에 챙겨넣은후 뒤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리고 부후물등판으로 피해버렸으나 또다시 추격에 돌고 말았다. 적들은 건빵 한 개 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달라붙었다.

대낮에 버젓이 들판 지나
지휘 김일성은 부대로 하여금 추격해오는 적을 뒤꼬리에 단채로 한바퀴 돌자면 하루걸음이 잘되는 부후물등판두리를 빙빙 돌게 하였다. 한 두어비퀴 돌았을 때 새로운 “토벌대”가 나타나 아군과 뒤따르던 본래의 짝패들 짬에 끼여들었다. 서로 련계가 없는 두 무리의 적이 겹쳐서 추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를 타 부대원들은 흰천으로 몸을 감싸면서 감쪽같이 옆으로 빠진후 숲속에 숨어버렸다.

맨 뒤에서 추격해오던 적들은 앞의 대오가 항일련군인줄 알고 사격을 가했다. 이에 적들은 저들끼지 숱한 주검을 내면서 생사결단하고 맞붙고말았다.

이번엔 적들이 심산에만 주의를 돌리는 틈을 타서 아군은 적들의 눈길이 덜 쏠리는 야산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행군이 간고할수록 도주자가 생겨나는 것이 막심한 문제였다. 도주자들은 인차 적에게 투항한후 항일련군의 종적을 일러바쳐 다시 추격, 혹은 포위속에 빠져들게 했다.

심산을 버리고 가재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은 헌헌한 벌판이였다. 그러나 적들은 포대에서 아군을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건드리지 못했다. 주력이 산에 가 있다보니 부락에는 력량이 얼마 없는데다가 아군의 기세가 하도 당당해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아군은 대낮에 벌판을 버젓이 지나 수림지대로 들어가 밥도 해먹고 휴식도 할수 있었다.

수림지대를 벗어나 다시 행군하고있을 때 적들이 뒤에서 추격해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후 척후병들이 앞에도 적이 있다고 알려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일본군이고 앞에서 마주오는 것은 만주국부대였다. 아군은 적은 병력으로 뒤를 견제하게 한후 아무멋도 모르고 마주오고있는 위만군부대를 무찌르면서 포위를 돌파하려고 작전을 짠후 전투에 달라붙었다. 경위련장 오백룡이 맨 앞장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마주오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만주국부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자 굉장한 부대와 맞붙은 줄 알고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꼬리빳빳이 퇴각했다. 아군은 적들이 던진 배낭들에서 먹을 것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신고 대통로있는데까지 맹추격했다.

드디여 분산행군하던 각 부대가 3개월남아되는 간고한 행군을 거쳐 북대정자에서 최사하게 되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제마당으로 되었다. 100여일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뒹굴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1939년 4월, 김일성의 주최하에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반년래의 유격활동의 경험교훈을 총결하고 금후의 활동방향을 연구, 필요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63. 올기강전투와 천보산전투

 

제2방면군 두만강 넘나들며 일본군 짓부시고 연변인민 고향에 돌아와 자제병 열렬히 환영
  
올기강전투
1939년 4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장백현 북대정자회의후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격, 대홍단전투 등을 벌리고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넜다.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오중흡의 제7퇀을 올기강서쪽지데에 배치하고 자신은 제8퇀과 경위련을 이끌고 두만강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동골, 휘풍동일대로 진격해왔다. 부대가 휘풍동에 도착하자 집단부락 경찰대는 접전도 하지 않고 꼬리를 빼버려 아군은 손쉽게 집단부락을 점령했다. 아군은 화룡현 광평 등지를 휩쓸면서 10여개의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일만군경을 거듭 격파, 수많은 적을 소멸했다. 아군은 간 곳마다에서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일군중들은 자신들의 자제병이 고향에 온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각처에서 얻어맞은 일본군은 대부분를 움직여 검질기게 항일련군의 뒤를 쫓았다. 아군은 추격해오는 적을 페문투부근에서 일망타진하기로 작전을 짠후 두만강상류의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에서 활동하고있는 제7퇀마저 불러들여 백리평북쪽의 동수골막바지에 집결시켜놓았다.
  
그때 백리평에는 가장 악질적인 토벌대 “정안군”1개 련이 주둔하고있었다. 적들은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하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후 매일 페문툰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교대로 나뉘여 다리목을 지키고있었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화룡현일대의 도로와 마을마다에 삼엄한 경계망을 늘여놓고있었다. 그때 화북전선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워 천황의 표창까지 받았다는 다이노라는 자가 “토벌대장”을 맡고있었다. 이자는 가슴팍에 아수라를 입묵해가지고 다니면서 “아수라”로 자칭하기도 하는 악착하기 그지없는자였다.
  
6월 10일 새벽 3시경, 동수골을 떠나 아군 300여명은 백일평 올기강기슭에 이르러 적들을 유인하고저 금점굴주위의 돌들을 짓밟아 놓은 다음 부근에 매복하였다. 올기강기슭 큰길을 사이두고 서편언덕 북쪽과 약 500메터 거리를 상거한 지점에 8퇀 정위 박덕산(김일)이 책임진 기관총소대와 8퇀을 일렬횡대로 매복시키고 맞은편 밀림지대에 오중흡의 7퇀가 경위련을 매복시켰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메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은 청산리골짜기에 있는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서쪽 영액령에서 동남으로 흘러나오는 강이다. 해란강은 베개봉서북쪽의 로리커호가 그 발원지대인데 올기강발원지의 북쪽 약 3킬로메터의 산너머에 있다. 올기강은 베개봉서쪽에서 흘러나와 약 25킬로메터 흘러 소마록하와 합수된후 홍기하로 이름을 바뀌여진다 올기강량쪽기슭은 갈숲으로 우거져있고 자동차길이 그 한옆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에는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놓여있었다. 매복전을 펼치기에는 제격인 지형이였다. 게다가 전사들이 모두 풀로 위장하고있었기에 가까이에서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안개가 서서히 거치기 시작하는 늦은 아침, 만단의 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일평쪽으로 내려가다가 총을 쏘았다. 드디여 백일평쪽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다이노가 거느린 정안군 한 개 련이 여러 정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기세사납게 나타났다. 때는 오전 8시경이였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의 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찬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으로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간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도랑옆에 쓰러졌습니다...
올기강기슭은 순식간에 일본군시체로 너저분해졌다. 첫방에 얻어맞은 다이노대장은 살겠다고 금전굴로 기여들어갔다가 그곳에 매복해있던 아군 전사들에 의해 처단되였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울렸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기세 드높게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몇놈이 내뛰닥 우리 전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도관이하 50여명을 소멸하고 대부분을 포로했다. 전리품은 기관총 4정, 보총 100여자루였으며 아군은 1명의 손실도 보지 않았다.
  
올기강전투의 승리는 연변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군중들은 전투의 승리를 열렬히 환호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련군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부대를 찾아왔다.
  
천보산전투
6월 29일, 제2방면군 제9퇀은 제2군 4사, 5사의 부분적 부대와 함께 천보산을 습격할 목적으로 300여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박덕범(4사 참모장), 최현(4사 1퇀 퇀장), 마덕전(제2방면군 9퇀 퇀장)은 부대를 이끌고 30일 저녁 삼면으로 천보산을 포위했다.
  
“9.18”사변후 천보산광산은 일본침략자들의 연변의 지하자원을 략탈하는 주요한 기지였다. 이리하여 놈들은 이곳에다 일본수비대와 위만군, 경찰부대 및 위만무장자위단을 주둔시켜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부대를 항일련군“토벌”을 위해 우심산으로 출동시키다나니 광산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니 네귀에 탐조등이 환히 켜져있어 어둠속에서 광산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정문으로 밤대거리 로동자들이 나가고있었다. 부대는 두패로 갈라져 한패는 천보산부락을 들이치고 다른 한패는 광산을 들이치기로 했다.
  
4사 1퇀 전사들은 출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광산에 이르러 보초병을 해제낀후 순식간에 광산구역으로 돌입해들어갔다. 눈깜빡할새에 광산에 있는 경찰들은 몽땅 생포하고 일본군수비대와 맞불질했다. 놈들의 저항을 완강했다. 전반 전투계획에 영행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소수의 전사들을 남겨 놈들과 계속하여 맞불질하게 하고 대부분 전사들은 광산의 설비들을 파괴하고 광산사무소를 습격하게 했다. 광산사무소를 점령한 전사들은 도끼로 금고자물쇠를 마스고 대량의 위만화페를 찾아내 마대에 담아메고 나온후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른 한패의 전사들은 퇴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천보산마으로 내려와 일본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상점, 량식점, 약방 등을 습격하여 대량의 량식, 천, 약품, 신 등을 로획했다. 경찰서를들이친 전사들은 류치장문을 짓부시고 갇혀있던 로동자들을 구해냈다.
  
아군은 전투에서 광산보위단 단장 요시다를 포함한 15명의 일본놈들을 소멸하고 2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후 아군은 광산에 불을 지르고 로동자들의 협조로 로획품을 운반하는데 그중 50여명이 자진하여 항일련군에 가입했다. 임동자에 도착한후 생포한 놈들중 악질분자 다섯놈을 그 자리에서 처단해버리고 일부분 전리품을 당지 백성들과 짐을 지고온 로동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천보산전투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바 적의 통계에 의하면 이번 전투에서 그들이 입은 손실은 80여만원이상에 달하였다. 그후 천보산광산은 또 1년동안이나 생산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튿날 임동자수림속에서 행군할 차비를 하고있는데 보초선에서 련락병이 달려와 적정을 알렸다. 천보산골짜기를 향해 로투구쪽에서 200여명의 일본군이 몰려온다는것이였다. 쳐들어오는 적들은 관동군정예부대인데 최신무기로 장비하고있었다.
  
아군은 휴식을 포기하고 인차 철수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화룡현 십리평으로 철퇴하고 아군을 계속하여 추격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산골짜기와 강가에 숙영지를 정하고 여기저기 우등불을 피웠다.
아군은 먼저 소수의 대원들로 밤에 적들의 숙영지를 습격한 다음 진펄로 끌어대여 골탕을 먹이기로 작전했다. 어두운 밤, 10여명 전사들이 여러 패의 습격조로 나뉘여 적진에 돌입해들어가 보초병을 제껴치우고 천막에 접근하여 기관총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에서 적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적들은 대오를 수습한후 산에 올라붙어 총질했으나 습격대원들은 이미 적의 사격권내에서 벗어나 귀로에 오르고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뜰무렵이였다. 적들은 다시 산정으로 돌격해왔다. 그러나 이 산정에는 적을 유인할 소분대만 있을뿐 대부대는 수림을 지나 진펄을 건너고 없었다. 소분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기동령활하게 진펄쪽으로 철퇴했다. 앞에 죽음의 진펄이 펼쳐져있는줄을 감감 모르고있는 적들은 “도쯔께끼!”를 부르면서 미친 듯이 추격해왔다. 그러나 진펄에 들어선 왜놈들은 덫에 갖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강이까지 쑥쑥 빠지는 진펄에서 허우적거릴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진펄 저쪽에서 6정의 기관총이 복수의 불을 내뿜었다. 진펄에 갖힌 왜놈들은 어쩌지 못하고 총알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한놈까지 까눕힌후 아군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면서 유유히 삼림속으로 사라졌다.
 
64. 대사하전투와 한총령전투

 
"워성타원"전술로 적을 꾀여들인후 악질적인 미야모또 “토벌대"를 섬멸
  
제3방면군의 설립
1939년 3월 11일, 류하부근의 밀영에서 한달나마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을 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와 소년철혈퇀, 2방면군 일부 및 제2군 제4사는 총사령원 양정우와 동남만특위서기이며 부총사령원 위증민의 인솔하에 화전현 북쪽에 있는 목기하림장을 들이친후 돈화, 화전, 안도, 무송 등 4개 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중요한 교통요충지 따푸차이허로 진군해갔다.
  
일제는 항일련군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야전군무기창고를 세우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있었다. 이 무기창고를 위만군 1개 영과 위만경찰 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부락주위에는 토성물 쌓고 그밖에다 또 높은 나무울바자를 세웠다.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부락사람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따푸차이허에 항일련군과 련계를 맺고있는 장영춘이라고 하는 무장자위단원이 있었다. 아군은 장영춘을 통해 따푸차이허에 주둔하고 있는 주력부대가 외지로 “토벌”을 나가고 성안에는 양정우와 위증민은 따푸차이허를 들이칠 것을 결정했다.
  
4월 7일 저녁 7시 30분, 제2군 4사는 산발을 타고 내려와 은밀히 서대문쪽에 접근하여 은페했다. 부대가 매복한지 얼마 안되여 서대문밖에 있던 위만군 몇이 말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성문밖에서 대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대문을 열려던 적 보초가 어망결에 항일련군이 성문밖에 매복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산군이 왔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아군은 잠시라도 지체할수 없었다.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아군의 총탄이 서대문을 향해 비발치듯 날아갔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내지 못한 적들은 서대문을 버리고 시가로 물러났다. 서대문으로 돌입해 들어간 아군은 서쪽구역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때 경위려와 소년철혈퇀도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들부시고 시가로 맹돌입해 들어갔다. 지방경찰대실, 경찰서, 일본군변영은 삽시에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전투에서 아군은 위만경찰부대 200여명과 일본경위 후지다 이찌후도와 만석척식출장소 주임 가이데 이이찌 등 일본인 2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어 진한장이 인솔하는 2군 5사와 5군 2사 5퇀은 련합하여 연길현을 거쳐 돈화 삼도구로 진군하다가 석두하자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맞다들어 격전을 벌려 일만군 32명을 격살하였다. 4월말, 부대는 안도현 청구자 “집단부락”을 들이쳐 적 6명을 격살하고 보총 30여자루와 탄알 1500여발을 로획했다. 6월 5일에는 항일련군 2군 4사 1퇀이 안도현 성북, 한총구를 습격, 일본교도관을 비롯한 위만군 2개 련 100여명을 전부 포로하고 경기관총, 보총, 권총 등을 로회했다. 그날 2군 5사는 오상현 랍림하삼림경찰대를 야습하여 100여명 로동자를 해방시키고 량식 등을 로획했다.
  
제1로군 총사령부를 찾고있던 2방면군 한부대는 안도현 미혼진에서 5사 진한장부대와 만난후 한양구에 있는 위증민의 주둔지로 왔다. 이렇게 모인 부대가 바로 천보산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7월말, 제2군 4사, 5사는 안도현 한양구에서 위증민의 사회하에 부대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제13퇀, 제14퇀, 제15퇀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이였다.
  
3방면군이 설립된후 위증민과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안도, 돈화지구에서 련속하여 일만군을 격파했다. 그중에서도 제3방면군의 전투기세를 떨친 싸움이였다.
  
대사하에서의 격전
대사하는 한요구동북쪽 안도현 소재지의 서북쪽의 위치해있는 규모가 큰 집단부락이였다. 부락은 토성으로 둘러쌓여있고 부락안에 있는 경찰서울안에는 높은 포대가 있었는데 적들은 거기에다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방을 감시하고있었다. 부락에는 경찰 30여명과 무장자위단 수십명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안도(송강)와 명월구의 적들이 인차 도착할수 있어 서뿔리 공격하기전엔 쉽잖은곳이였다. 이에 아군은 “위성타원전술”, 다시말하면 성을 포위하고 그 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즉 안도와 명월구의 적을 대사하에 끌어들여 소멸한다는것이였다.
  
8월 23일, 위증민은 13퇀, 15퇀과 2방면군 9퇀의 일부 부대 300여명 병력을 인솔하여 사가점 큰길옆 서쪽 도랑홈에 약 2.5킬로메터의 폭을  두고 매복해있다가 명월구방면으로 오는 적의 증원병을 치기로 하고 진한장이 인솔하는 14퇀과 경위련 200여명을 대사하집단부락을 친 다음 대사하 남쪽에 매복하여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오는 증원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대사하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부대는 대사하부락 토성밖에 매복해있었다. 아군의 계획에 의하면 0시에 보초가 교대하는 틈을 타 성안에 있는 지하일군 리홍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고있는데도 리홍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리홍산은 뜻밖에도 전날밤에 양초구에 일이 있어 불리워갔던 것이다.
  
아군은 하는수없이 날이 밝아 사람들이 물길러 나오는 기회에 공격하기로 했다. 성안에 우물이 없기에 날이 밝으면 적들은 보초를 철수하고 물 길러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드디어 날이 환히 밝았다. 아군은 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물 길러 나오기를 도정신해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또 벌어지고말았다. 그번 전투에 직접 참가한적 있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난데없는 일본경찰 한놈이 대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가 채소밭에 매복해있는 것을 보고 픽 돌아서더니 부락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섯”
토성에 붙어섰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그때 나도 토성에 붙어서있었다. 뛰던 놈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또 경찰서쪽으로 곧추 달려가며 “공산당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성문북쪽에 숨었던 전사가 그놈을 당장에서 쏴죽였다. 이 바람에 마을안에선 호각소리가 “호르륵, 호르륵”하며 련이어 나더니 집안에 있던 놈들이 북달질하며 포대안에 들어가 총질하였다. 진 한 장은 전투명령을 내리고 각 련의 주공방향을 제시하였다. 토성밖에 매복해있던 전사들은 마을안으로 물밑듯 들어가는데 경찰서뜨락의 포대에서 기관총이 미친 듯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탄알은 눈앞에 와 우박처럼 떨어져다. 우리는 담벽에 다가붙어 경찰서쪽으로 돌진해들어가다가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사격선을 피하여 부근의 민가에 흩어져들어갔다. 이곳 집들은 기차굴처럼 길게 지은 줄집인데 아래웃집사이에는 간벽이 있었다. 적든 계속 총질하였다. 우리는 민가의 벽을 뚫고 나가 포대에 대고 사격하였다. 그런데 탄알은 포대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적아의 교전은 치렬하였다. 적진을 노리고 있던 김수학패장이 한손에 수류탄을 쥐고 배밀이해 나갔다. 한 전사가 또 김패장의 뒤를 어어갔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포대높이는 5메터가량 되었다. 두 용사는 포대벽에 가붙어서 수류탄을 올리뿌렸다. 헌데 수류탄은 화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총질했다. 두 용사는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쥐여 다시 올리뿌리려다가 그만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의 기관총수가 요란한 폭파소리에 놀라 대가리를 움츠리고 앉았다가 다시 쳐드는 순간 이여다. 1선에 매복해있던 동무들이 포대화구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누구의 탄알이 명중했는지 적의 기관총수가 맞아서 화력이 멎었다. 이 순간 우리는 경찰서의 토담을 넘어들어가 포대안에 수류탄을 밀어넣고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뒤미처 대부대가 들어와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사하를 점령하였다...
  
전반전투는 원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은 부지휘 후국충에게 14퇀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송강방면으로 달려가적의 증원부대를 저격할 것을 명령했다. 저격부대는 전속력으로 소사하남쪽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군이 소사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본군은 9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아군이 매복하려던 고개를 너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여TT다. 적탄이 비발치듯 날아왔으나 전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언덕 나가다가 후국충부지휘와 14퇀 허자장, 정위 양형후(조선족)가 희생되였다. 지휘관을 잃은 저나들은 눈에 달이 올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일격에 돌진해들어갔다. 아군은 드디여 소사언덕을 점령하였으며 왜놈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대사하를 치면 명월구에서 인차 오리라고 예견했던 적증원부대는 이날낮에 오지 않아 류수촌 남구에 매복한 부대들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말았다. 해가 진 다음 각 부대들은 류수촌집단부락을 중심으로 린근의 집단부락들을 분공하여 진공한후 하루밤을 류숙시키로 하였다. 안길, 전동규부대를 류수촌부락을 들이칠 때 적들의 저항은 드셌다. 50여명 경찰과 자위단은 맞불질 하면서 완강히 버티였으니 불과 5분도 채 안되여 아군은 적들을 무찌르고 부락을 점령했다.
  
최현부대는 동량툰을 점령했다. 최현퇀장은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기로 했다. 하여 안도현소재지,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전화를 쳐 “우리 항일련군은 이미 대사하와 대장강, 동양툰을 점령하였다. 용기가 있으면 싸우러 오라!”고 위협조로 통고했다.
  
자정이 되자 과연 증원병을 태운 적 트럭 6대가 동양툰에 들어섰다. 보초선에 있던 전사들이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했다. 녀기관총사수 허성숙은 한 대원에게 빨리 지휘부에 가 알리라고 말하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둘렀다. 이 전투에서 부대의 녀장군으로 불리우면서 사랑받던 허성숙은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증원부대는 아군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는지라 부랴부랴 송강쪽으로 내뺐다. 이튿날 아군은 또다시 전날에 포치하였던 매복지점에와 매복하였다. 송강에서 명월구로 가는 길은 이 이 길밖에 없기에 되돌아가는 적들은 반드시 이 길로 지날것이였다.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본군과 조선인 “특설부대”, 그리고 일본군가족 수명을 태운 대형 군용트럭 7대가 안도현성족으로부터 아군의 포치선으로 질주해왔다. 그중 한 대의 트럭에 앉은 적들은 대사하전투에서 요행 살아남은 적들이였다. 트럭은 아군 매복선남쪽 하단을 거쳐 2.5킬로메터쯤 질주하여 오다가 선두의 트럭이 정지하자 그 뒤로부터 따라오던 트럭이 전부 한곳에 집결되였다.
  
아군의 기관총, 보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어떤 놈은 자동차우에서 죽고 어떤 놈은 뛰여내리다 맞아죽었다. 불과 몇십분 사이에 적주력은 소멸되였으며 살아남은 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남은 적도 도로서쪽 홈에 매복한 아군의 집중사격에 의하여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군의 돌격신호가 울리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여구나 되었다. 미야모도는 운전실에서 나오자도 못한채 죽었다.
  
이튿동안의 전투에서 제3방면군은 적 25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7정의 경기관총과 700여자루의 보총, 권총 및 여러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한총령매복전
대사하전투후 제3방면군은 부대의 식량과 기타 군수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총령에서 적들을 매복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보화기를 통하여 9월 25일에 일본군 마쯔시마부대가 돈화로부터 대포시하로 “추기토벌”을 나온다는 정보를 도청한후 제3방면군의 주력부와 제5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인 도정비부대 도합 500여명은 9월 24일(음력 8월 12일) 한총령 남쪽비탈의 고해루에서 매복전을 펼치기로 작전,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참모장 박득범의 령솔하에 목적지를 향해 강행군했다.
  
이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였는데 간혹 안개까지 끼여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적들은 도로 량켠 200메터안의 초목들을 몽땅 베여버리고 번번한 개활지대를 만들어버렸는데 그 거리가 약 50킬로메터나 되었다. 뿐만아니라 한총령과 그 길가의 고지마다에는 높은 포대까지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밤낮으로 아군의 행동을 경계하고있었다. 부대는 가을비와 안개를 리용하여 한총령의 요차즈에서 북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한총령남쪽기슭의 좁고도 긴산골짜기인 고해루부근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꽉 우거져 매복전을 펼치기에 제격인곳이였다. 돈화에서 따푸차이허로 통하는 도로는 바로 이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진한장은 한 개 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작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25일 점심때쯤 드디여 놈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군소장 마쯔시마가 령솔하는 “토벌대”였다. 놈들은 12대의 트럭에 앉아오고있었다. 그속에는 50여면 위만경찰들을 실은 2대의 트럭도 있었다. 놈들의 자동차가 아군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섰다.
“땅!”
사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전사들은 놈들을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전사들이 전사들이 던진 수류탄은 호선을 그으면서 날아가 놈들의 머리우에서 련속 터졌다. 적자동차들은 하나하나 불길속에 휩싸이고말았다.
  
그러나 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력량을 조직하여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화력을 몇 대의 자동차에만 집중한후 마쯔시마 소장을 쏴죽였다. 마쯔시마소장은 아직 자동차에서 내리지도 못한채 총알받이로 되고말았다. 놈들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놈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놈들의 트럭도 머리를 돌려 오던길로 내뺐다.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아군은 혼란에 바진 적진으로 맹호마냥 돌진해들어갔다. 맹렬한 격전을 통해 아군은 적의 주력을 기본상 소멸해버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꼬리빳빳이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마쯔시마소장을 비롯한 일본군 100여명을 격사하고 자동차 1대를 불살라버렸으며 기관총 4점, 보총 100여자루, 탄알 70여상자를 로획했다.
 
65. 홍기하에서의 대승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일제"포위토벌"로 근거지 상실 제2방명군 홍기하에서 마에다부대 전멸
  
두도류하회의
1939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동북에 대량의 부대를 증파하여 잔폭한 “포위토벌”을 감행했다. 련속적이고 전면적인 진공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엄중한 손실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악착한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항일련군과 군중들간의 련계가 단절되여 항일련군은 엄중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동남만의 항일투쟁형세는 날따라 악화되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항일련군 제1로군 총부는 료령근거지를 포기하고 북으로 전이, 심산밀림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로써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유격근거지의 상실과 더불어 유격구역도 점차 축소되면서 항일련군 각 부대는 부득불 장백산지구의 높은 밀림지대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환경속에서 전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긴급한 정세밑에서 양정우는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항일련군밀영에서 1939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양정우, 위증민, 전광, 방진성, 서철, 한인화, 황해봉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토벌”투쟁을 벌릴것인가 하는 책략문제를 놓고 세심히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엄중한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후 실력을 보존하고 섬멸적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각 부대들을 소부대로 분산시켜 활동할 방침을 제정했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각 부대의 반“토벌”활동구역과 전투임무를 획분했는데 제1방면군은 조아범의 지휘하에 몽강, 휘남, 금천, 림강 등 현의 린접지대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며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무송, 화전,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고 제3방면군은 두갈래로 나누는데 한갈래는 위증민의 지휘하에 돈화, 화전, 길림지구에서 활동하며 다른 한갈래는 진한장의 지휘하에 녕안, 동녕, 교하, 오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면서 북만의 형제부대와 련계를 맺기로 했다. 양전우는 총사령부의 경위려와 1방면군 일부 부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각 부대와 배합작전을 하기로 했다.
  
제1차두도류하회의후 각 부대는 기동령활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일제의 거점과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식량 등 긴요한 필수품을 해결했다. 근거지를 상실한 불리한 환경속에서 항일련군은 신출귀몰하면서 적을 주동적으로 타격, 자신의 력량을 지켜나갔다. 적들이 기재한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1939년 하반년에 항일련군 제1로군은 적들과 276차의 싸움을 벌렸는데 아군이 주동적으로 적을 습격한 차수는 177차였다.
  
양정우가 직접 지휘하는 사령부부대 400여명 전사들이 적들과 여러차례 접전하면서 제1차두도류하회의정신을 각 부대에 전달하고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원 양정우가 불행하게 전사한 것이다. 1940년 2월 23일, 35세의 나젊은 항일명장 양정우는 수백명이나 되는 적들과 혼자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양정우의 희생은 1로군의 투쟁형세에 급작스러운 역전을 불러왔다. 적들은 “만주치안의 암”을 근치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더욱 발광적인 “토벌”을 벌리였던 것이다. 이에 1로군의 중임을 한어깨에 떠메게 된 위증민은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다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위증민, 전광, 서철, 한인화, 박덕범, 리명산, 진수명(사령부비서), 김광학(제1방면군 정치부 주임), 김백산(경위려 제3퇀 퇀장), 황해봉(경위려 제1퇀 정위), 김재범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지방당조직이 엄중히 파괴되고 지방군중사업이 박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대내의 우수한 간부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대내의 우수한 간부를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각 계층가운데서 군중을 발동하고 반일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련락원을 쏘련에 파견하여 중앙(국제당주재 중공대표)과 련계를 맺기로 하였다.
  
전광이 지방당사업을 전면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김재범 등 5명으로 구성된 연변지방사업위원회를 구성, 동남지구에 내려가 지방사업을 개척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장백산지구에서 장기적인 “토벌”을 받아 엄중한 손실을 본 정황에서 제1로군 주력부대르 장도선철도이북에로 진군시켜 목릉, 오상, 녕안, 왕청 등지에서 소부대의 분산유격활동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 외에 1로군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했다. 중공동남만성위 서기 위증민이 1로군의 총지휘르 맡았다. 전광이 동남만성위원회 겸 제1로군 지방사업부장, 군수처장을, 한인회가 성위위원 겸 제1로군 군부참모, 경위려 정위를, 서철이 성위 위원 겸 군의처 처장을, 김재범이 성위 후보위원으로 각각 임명되였다.
  
당시의 형세가 얼마나 참혹하고 위급했는가 하는 것은 위증민이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에 보낸 1940년 4월과 1940년 7월에 보낸 보고서만 보고도 알수 있을 것이다. 1940년 4월의 보고서에서 위증민